48화
샤를리즈가 좀 더 머리를 빗어 주었으면 했고, 더 많은 재밌는 이야기도 나눠 보고 싶었다.
오래전에 그녀의 놀이 친구랍시고 있던 시녀와 샤를리즈는 달랐다.
물론 샤를리즈가 여행을 가기 전에는 모진 말도 많이 했지만…….
사실 아리아에게 있어 가진 옷이나 장신구들로 모욕을 주는 건 크게 모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거의 평생을 공녀답게 살지 않았기에 사치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쯧쯔, 그렇게 예쁘게 타고나면 뭐 해?”
샤를리즈의 악의를 때로는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다.
아니, 너무 순수했기에 좋은 쪽으로 왜곡하기까지 했다.
와, 저 예쁜 공녀님 눈에 나도 예뻐 보이나 봐.
어디까지나 아리아가 절대적으로 선한 마음에서 해석한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과거 샤를리즈는 악독하게 아리아 또한 괴롭혔기에.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샤를리즈를 경험한 아리아는 또 한 번 선한 쪽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공녀님은 감정 표현이 서툰 것 같아.’
그래, 그렇기에 지금껏 제대로 표현을 못한 걸 테고 이제야 소통이 된 걸 거야.
아리아가 조그마한 주먹을 꼬옥 쥐었다.
‘공녀님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
책에서 본 친구는 서로 비밀도 털어놓던데, 혹시 감히 자신이 공녀님의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라면 안 될까?
아리아가 뺨을 잡고 수줍게 상기되는 동안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아리아.”
“오빠!”
아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킨은 기쁘게 상기된 아리아의 표정을 보고 살짝 놀랐다.
그로서도 꽤 드물게 보는 아리아의 들뜬 얼굴이었다.
오랜 업무를 마치고 온 그를 반갑게 맞이할 때나 보이던 얼굴.
아스킨이 창문 근처로 다가왔다.
아리아는 신이 나서 말을 걸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공녀님은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일 뿐이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체 공녀가 무슨 헛소리라도 한 것이 아닌지 여동생에게 물으러 왔던 아스킨이었다.
아리아의 말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얘기를 한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정말이야. 공녀님은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아리아, 그 여자는 지난번에 네게…….”
“오빠, 오빠가 그랬잖아. 기억나? 내가 5년 전쯤에 정말 정말로 많이 아팠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난 또다시 그렇게 아플까 봐 무서워했잖아.”
“그래, 기억나.”
“오빤 말했어. ‘지금 넌 다시 건강해졌어. 그러니까 언제나 현재를 바라봐. 아리아.’라고 말이야.”
“…….”
“……오빠는 현재를 보지 않는 거야?”
아리아는 과거의 샤를리즈가 아스킨에게 어떤 짓까지 했는지, 그 까맣고 깊디깊은 패악의 심해를 알지 못했다.
아스킨이, 그리고 이 성의 모든 사람들이 아리아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래서 아스킨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런 아스킨의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챈 아리아가 오빠의 눈치를 봤다.
“……너무 구박만 하지 말구, 조금만,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 주면 안 돼?”
오빠의 소맷자락을 미약하게 붙잡고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
언제나와 같은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아스킨은 샤를리즈의 모습을 떠올렸다.
“놔!!”
그녀가 제 외조부에게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알게 된, 억지로 연행되는 모습을.
우스웠다. 어찌 감히 지금 이 가냘픈 제 여동생의 모습과 그걸 비교한단 말인가?
“……아리아, 넌 마음이 너무 약해서 걱정이야.”
……그럼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스킨은 자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다.
최근 무리해서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아스킨은 검의 극의에 다다른 자신이 이 정도로 피로할 리가 없음을 잘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했다.
과거 샤를리즈는 정말이지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패악을 부렸다.
이제와 혼란을 인정하기에 아스킨의 지난 세월은 아주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다.
아스킨이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가 오빠를 쫓아 함께 고개를 돌리고, 두 남매가 나란히 창밖을 보았다.
“어? 공녀님이다.”
마침 창문 밖으로 샤를리즈가 보였다.
막 정문을 나선 모습을 아리아가 먼저 발견했다.
자연히 아스킨의 눈 또한 샤를리즈를 좇았다.
‘……성질이 난 건가?’
샤를리즈는 쿵쿵쿵쿵 거의 발을 구르다시피 걷고 있었다.
아스킨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패악을 떠는 것에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그녀는 저렇게 돌아가곤 했다.
왜일까, 처음 보는 모습도 아니건만 조금 달리 보였다.
이유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언제나 보이던 표독스러운 얼굴 대신에 씩씩대는 가벼운 분노와 염려, 시무룩함으로 얼룩진 표정 때문이었을지도.
“공녀님…… 이제 돌아가시는 걸까?”
“그렇겠지.”
샤를리즈는 혼자 씩씩대며 걷다가 순간이지만 비틀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스킨이 놀랄 정도로 휘청거렸다.
샤를리즈 발밑에는 돌부리가 있었다.
샤를리즈는 넘어지진 않았지만, 더욱 씩씩대며 돌부리를 보다가 이내 홧김에 커다란 돌부리를 걷어 차 버렸다.
함께 지켜보던 아리아마저도 ‘헉’ 하고 숨을 삼킬 정도의 힘이었다.
그러고는 샤를리즈는 발이 아파 자기 발목을 붙잡고 끙끙댔다.
……정말이지, 희극이 따로 없었다.
수도 내 귀족 아무나 붙잡고 이 일화를 들려주면 턱도 없는 소리 말라는 답이 나올 터였다.
악녀 샤를리즈가 돌부리를 걷어차고 끙끙댄다니.
“……저것 봐라. 저 공녀는 성격이 고약하다고.”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상황. 아스킨이 애써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
너무나도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배를 잡고 방이 떠나가라 소리 내어 웃는 여동생이 보였다.
“…….”
아스킨은 그대로 돌이 된 듯 굳었다.
정말이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아리아의 박장대소하는 모습이었다.
‘저 모습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지?’
일곱 살, 처음으로 정원을 선물받아 나비를 발견했을 때였다.
자그마치 10년 가까이 보지 못한 얼굴이라는 점 또한.
그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여동생을 바라보고 있던 제 얼굴로 미소가 스미는 것을 모른 채로.
그리고 그 미소가 여동생의 웃음이 전염된 것만이 아니라…… 저기 유쾌하리만치 끙끙대면서도 돌부리에 화를 내는 공녀 때문이라는 것도.
전혀 모른 채로 아스킨은 그만 아리아와 함께 웃어 버렸다.
* * *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연회 날 아침,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할아버지가 나를 호출했다.
“……할아버지가?”
“예, 공녀님.”
도대체 아침부터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짐작이 가서 가기 싫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신고 느릿하게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소문을 퍼트린 영애는 아주 잘 조져 주었지.’
약혼자님이 소문을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 후, 나는 그날로 망나니 모임을 소집해 진짜 샤를리즈처럼 그녀들에게 경고했다.
“요즘 제국에 재미없는 소문이 들리던데. 누가 초를 쳤을까?”
샤를리즈를 향한 눈치는 MAX 능력치를 가진 그녀들은 잽싸게 꼬리를 내리고, 눈짓으로 내부 고발자를 자처했고.
나는 그녀들 모두에게 경고를 할 수 있었다.
이 이상 소문이 퍼지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할아버지가 알면 과연 좋아할까?
이미 퍼진 소문은 니들이 수습해라?
우아하게 오간 대화 속에서 잽싸게 알아들은 망나니 모임은 자신의 잘못을 아주 잘 수습했다.
‘수습이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그 수습이란 게 웃겼다.
나에 대한 악독한 소문을 퍼트리는 거였는데,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 샤를리즈가 이런이런 일도 저질렀더라. 하는 아주 자극적인 사건들.
내가 들어도 놀랍기는 했다.
‘술 취해서 아무 영식이나 붙잡아 기르는 개한테 던져 준 건 너무했다.’
덕분에 나는 샤를리즈가 길렀던 개를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렸다.
샤를리즈가 키우는 개는 돌연변이로, 괴물 개라고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개였다.
이름은…… 테리.
‘어울리지 않게 이름은 왜 이리 부드러운 건데?’
아무튼 간에 이 외에도 망나니 모임들이 저들이 아는 여러 귀족 계층의 각종 자극적인 루머나 이슈는 다 퍼트렸다.
이 탓에 수도의 온도가 최근 사이에 3도쯤 오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러 소문으로 인해 뜨거워졌다.
‘과연, 어그로 끌던 솜씨들이 녹슬지 않았다는 건지.’
나무는 숲에 숨겨라.
내가 그녀들을 만날 때 힌트를 주긴 했지만 이렇게 잘해 줄 줄은 몰랐다.
덕분에 각종 소문이 퍼진 수도는 내 결혼 소식쯤은 재미나고 자극적인 루머로 취급해 금방 묻힌 모양이었다.
하기야, 과거 샤를리즈와 아스킨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떠들썩하게 알려진 일이었으니까.
‘샤를리즈가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괴롭힌 걸로 말이지.’
나는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할아버지의 방 앞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소파에 앉기 무섭게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졌다.
“알고 있겠지? 오늘이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표정이었다.
“오늘 너와 레무트 공작의 결혼을 발표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