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194)

49화

……자, 문제.

과연 나랑 함께 있다 저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은 우리 약혼자님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요?

1번, 나를 죽인다. 2번, 나를 많이 아프게 죽인다. 3번, 약혼자님이 파혼을 외쳐서 꽥 심장 마비로 죽는다.

‘와아, 환상적인 선택지예요, 정말. 환장하겠네!’

나는 새침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약혼자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발표는 무슨 발표예요?”

내가 입술을 삐죽였다.

마치 할아버지가 말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양. 하지만 심기엔 거슬린다는 듯이.

“꼭 나 혼자서는 어떻게 못 하니까 꼬리를 말고 발표하는 것 같잖아요. 절 공개적으로 바보로 만들 셈이세요?”

물론 약혼을 1년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보가 되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결혼 발표는 사망 엔딩만 가까워진다!’

“그냥 저 좀 놔두세요. 제가 정말 그 남자 하나 어찌 못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제대로 한 것이 없지 않느냐.”

“제게 계획이 있어요. 그러니 결혼 발표는 제가 완벽하게 그 남자를 넘어오게 한 뒤 스스로 하게 해 주세요.”

“됐다.”

“할아버지!”

“지금까지도 못한 일을 겨우 지금에 와서 하겠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게냐?”

“…….”

“쯧, 그러게, 이 할애비가 기회를 줄 때나 제대로 해 보지 그랬느냐.”

아니, 이 영감탱이?

그나마 알맹이가 나라서 가능성이라도 있는 거라고!

그대로 과거 샤를리즈였으면 천년이 지나도 그 남자의 마음은커녕 둘이 멀리 쥐어 뜯고 안 싸우면 다행이다!

“됐고, 넌 가만히만 있거라. 가만히만 있으면…… 이 할애비가 알아서 할 테니.”

와, 저 웃음 봐.

아무리 봐도 저건 악당의 웃음인데, 사실 이 할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악당이 맞긴 한데 오늘따라 더 꼴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여기서 억지로 우기기만 하다간 지난번과 같은 호위 기사 연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저 영감을 설득할 논리다.

“할아버지, 레무트 공작 성격에 분명 그 소릴 들으면, 알츠베이트 가문 망신만 당할 일을 저지를 게 틀림없어요.”

“쯧, 내 손녀야. 내가 이래서 네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다고 하는 거란다.”

할아버지가 가소롭다는 듯 수염을 쓸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야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남자의 대쪽 같은 성정은 결코 황금이나 돈 따위로 움직일 수 없다.

답답해졌다.

“내 어여쁜 손녀는 이 할애비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얼핏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웃지 않는 눈에서 느껴졌다.

너는 그저 시키는 대로 내 말을 따르라는 강력한 경고와 의지가.

이를 따르지 않을 시에, 아마도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연행이 되든 혹은 연회가 시작할 때까지 감금이라도 당할지 모르지.

여기서 눈을 뜨고 단 한 번도 감금당한 적은 없지만, 호위 기사들 손에 억지로 들려가던 충격이 이 이상 더 나갈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또한 다시 한번 느꼈다.

저 할아버지가 말하는 ‘애정’이 예쁜 인형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형에게는 판단을 맡기지 않는다.

“이 할애비는 언제나처럼 손녀가 날 잘 따르리라 믿으마.”

이게 대체 협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싱긋 웃었다.

웃음과 함께 숨긴 손을 꾸욱 쥐었다.

* * *

할아버지는 오늘 저녁에 있을 연회에 본인이 먼저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오라고 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나를 위한 마차를 새로 만들었다며 밖에 있으니 구경해도 좋다고 했다.

당연히 구경할 기분은 아니라 분을 삭이며 집무실에서 나왔다.

‘……망할 영감탱이. 뭐가 어쩌고 어째?’

샤를리즈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만약 샤를리즈가 그토록 삐딱하게 자라는 데 일조한 게 있다면 분명 저 할아범의 핀트가 어긋난, 망할 육아 때문일 거다.

확신한다.

‘이래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야, 교육이.’

그러나 이제 와 내가 샤를리즈의 교육을 원망해 봐야 무엇 하나.

내가 할 일은 앞으로를 계획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다.

‘분명 약혼자님은…… 그 소식을 들으면 가만 안 있을 거야. 이것만은 분명해.’

제일 최악은 결혼 발표를 듣고 거기에 너무나 빡친 나머지 당장 파혼부터 외치는 거다.

물론 파혼이 구두로 되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타격을 받을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가엾은 내 심장!

나는 잃어버린 내 사랑스러운 코인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숨을 진정시켰다.

내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방은 내가 준비하던 그대로 멈춰 있었다.

하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반겼다.

“다들 1시간만 나가 있을래?”

대뜸 이어진 내 명령에 하녀들은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다들 고개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만, 내 전담 하녀인 베스, 수잔, 안나만이 머뭇거리며 내 안색을 살폈다.

“……공녀님, 감히 외람되지만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니시지요?”

“혹시 아프신 거라면 얼른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걱정 가득한 표정들에 잠깐이지만 연회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나가 있으렴.”

내 미소에 그제야 세 하녀가 안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어떡한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이대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연회에 참석할 수는 없다.

이제야 그 남자와 대화다운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남자가 무려 먼저 파트너 신청을 말하게 된 이 시점에서는 더욱이.

‘이대로 망칠 수는 없지.’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선 채로 여러 방법을 떠올리고 지워 나갔다.

대충 이런 저런 방법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냥 확, 도망가 버려?”

그 순간이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낯선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방 한쪽에 익숙한 검은 공간이 생기고 있었다.

‘저건…… 노아가 이동할 때 만들어지던 구멍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찢어진 검은 공간 사이에서 물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중얼거리시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노아가 내 방으로 넘어왔다.

그러자 검은 공간이 일시에 사라졌다.

나는 막 나타난 푸른 머리의 잘생긴 미남을 반쯤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지금 내 방에…….”

어처구니없음 반, 살짝 분노한 것을 반쯤 담아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노아가 나타났다? 자연히 폭군 오빠가 떠올랐던 탓이다.

“……오빠가 또 폭주했니?”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뭐야. 록시디언이 폭주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타난 거야.

“설마 또 이런 식으로 날 데리러 온 거니?”

“……공녀님을 황성으로 모시고자 온 것도 아닙니다.”

“허? 그럼 뭔데?”

의문이 솟구쳤다.

“그럼 지금 아무 이유도 없는데, 내 방에 멋대로 나타난 거야?”

“……죄송합니다.”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네?”

“내가 옷 갈아입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멋대로 나타난 거냐고.”

하필 할아버지를 만나고 온 뒤라 내 기분은 저조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내 의문은 매우 타당했다.

타당한 것이었으나, 노아가 보인 반응은 그 이상으로 놀라고 당혹한 표정이었다.

이내 발긋 귀가 달아오른 모습에다 그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당연히 아니란 확신을 갖고서…… 그런, 그런 확신이 있을 때만 움직입니다!”

노아의 말에 바로 알아차렸다.

‘황실의 스파이가 실시간 상황 보고를 올리고 있다? 이거네.’

“그럼 그 빨개진 귀는 뭔데?”

“……황제 폐하의 모든 명예를 걸고서 저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허, 왜 들어온 건 넌데, 네 명예도 아니고 오빠의 명예를 걸어?”

“그야, 폐하께서 제게 공녀님께 가 보란 명을 내리셨으니까요.”

노아는 당황한 듯한 모습으로 명확하게 말했다. 난 찌푸린 표정을 더욱 심하게 찌푸렸다.

불안했다.

‘폭군 그놈이 보냈다니, 다른 의미로 불안한데…….’

이미 오늘 있을 연회에다 복장 규제라는 미친 규칙을 내걸어 버린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또 무슨 미친 소리를 전하려고 노아씩이나 보낸 거야?

노아가 품속에서 무언갈 꺼냈다.

네모난 상자였다.

한눈에 보석 상자임을 알아본 나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폐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노아가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노아의 손에서 열린 상자 속 그곳에 담긴 물건은 다름 아닌 목걸이였다.

‘목걸이?’

목걸이라니.

‘이미 폭군 오빠가 드레스랑 같이 세트로 하나 줬잖아?’

찬찬히 살펴보니, 지난번에 준 목걸이보다 화려함이 떨어진 심플한 형태였다.

그렇다고 볼품없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은백색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형태가 은은한 매력이 있었다.

꽃에 비유하자면 안개꽃 같은 매력이 있달까.

하지만 보통 안개꽃은 장미와 같은 화사한 꽃의 매력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쓰이지 않던가.

이 목걸이 또한 그렇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이건 그 샤를리즈의 취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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