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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2/194)

51화

“……황실에서 온 것이냐?”

“예. 저희는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 저 마차 안에 그 괘씸한 황제가 타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알츠베이트 공작은 확인 차 질문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신 것이냐?”

“아닙니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기사가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녀님을 위해 저희와 마차를 직접 보내셨습니다.”

저 마차의 정체가 다름 아닌 황제가 보낸 것이란 말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웃으면서도 연신 황제가 내민 마차를 훑어보기 바빴다.

‘흥, 조악하기 짝이 없구나!’

아무리 봐도 볼품없는 형태였다.

황실이 돈과 재물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어찌 자신의 손녀에게 이따위 것을 내민단 말인가?

딴에는 신경 쓴 것일지도 모르나, 자신이 직접 지시해 만들게 한 특별한 마차에 비해서는 품격도 품위도 한참이나 뒤떨어진 형태였다.

“허, 우습구나. 그토록 여동생을 아끼는 체 하더니, 감히 내 사랑스러운 외손녀를 위해 겨우 이 정도밖에 못 해 준단 말이더냐.”

“…….”

황제가 보낸 기사들은 혼잣말을 가장한 알츠베이트 공작의 비아냥거림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채 떨어지지 못한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마차를 비교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전에 없이 관대해졌다.

“그래, 내 사랑스러운 손녀라면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하겠지. 마차는 내 손녀가 선택하도록 두어라.”

알츠베이트 공작이 또 한 번 조소를 숨기지 못했다.

“누가 봐도 뻔한 선택이겠지만.”

공작이 껄껄 웃으며 황실로 출발하였다.

* * *

같은 시각.

아스킨은 집무실에서 한창 업무를 보느라 바빴다.

오늘이 자신의 약혼자와 약속한 여신의 축복 기념 연회였으나, 이와 별개로 아스킨에게는 할 일이 항상 많았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여동생을 위한 일에 바쳤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작으로서 일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이는 작위를 물려준 아버지와 선조들을 외면하는 길이자, 그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여러 일을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를 따르는 부관 벤이나 기사들은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들이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주인이 피로로 쓰러지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아, 네. 지금…….”

아스킨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물었다.

벤이 얼른 대답하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 성에서 공작의 집무실에 허락 없이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인 아리아였다.

“오빠.”

아리아의 부름에 아스킨이 약속이라도 한 듯 펜을 놓았다.

놓는 것으로 모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이지? 몸은?”

“괜찮아. 음, 그리고 궁금한 것도 있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벤은 남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아리아의 머뭇거리는 시선에 얼른 방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부터 무리하셨는데, 마침 잘됐군.’

벤은 아리아의 등장이 아스킨에게 적절한 휴식이 되리라 여겼다.

한편으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오늘 이렇게 바빴던 것은 아스킨이 돌연 황실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 공녀의 은혜를 갚고자 제의한 것임은 알고 있지만.

공작님께서 다 뜻이 있으시겠지. 벤은 가볍게 넘기며 복도 끝으로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아스킨이 아리아를 소파에 앉혔다.

아리아는 얌전히 앉으며 오빠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여동생의 목이 아프기라도 할까 싶어 아스킨이 옆자리에 앉았다.

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목을 쭉 내밀었다.

“왜 아직 집무실에 있어? 왜 일하고 있는 거야?”

“……뭐?”

“아니……. 오늘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를 가는 날인데,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야?”

그제야 의문이 풀린 아스킨이 표정을 살짝 풀었다.

일단 아리아가 심각한 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안심이 된 탓이다.

“……난 준비를 이미 끝냈어, 아리아.”

그러자 아리아가 보기 드물게도 눈을 뾰족하게 좁혔다.

문제는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는 이렇게 봐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단 점이었다.

아스킨은 그런 사실을 입꼬리에 힘을 꾹 주는 걸로 꾹꾹 참아 냈다.

아리아는 이를 모른 채 열심히 오빠의 옷차림과 행색을 훑었다.

“거짓말, 옷차림이 이게 뭐야, 연회에 가는 복장이 아니잖아?”

비록 병으로 인해 사교계에 참석한 경험이 없지만, 그럼에도 기본 옷차림과 예의 정도는 잘 알았다.

아스킨의 의상은 깔끔했지만 어디로 보나 평상시에 입는 옷에 불과했다!

“……설마, 설마 오빠 이걸 입고 가는 건 아니지?”

“…….”

아스킨은 이 대화가 길어질 것이란 예감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아리아는 마치 줄에 메인 토끼처럼 쫄쫄쫄 오빠를 쫓아갔다.

“난 거기 참석하는 데 의의가 있는 거야.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

“……싫어.”

그제야 아스킨이 서류에서 고개를 돌렸다.

싫어?

좀처럼 정말 듣기 힘든 거절이 여동생에게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아스킨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됐건 아리아가 아픈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었고, 서류는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런 오빠를 보며 아리아가 볼을 살짝 부풀렸다.

아리아는 성큼 걸어가 아스킨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옷, 옷 얼른 갈아입어. 시간 그렇게 많이 안 남았잖아. 응?”

“황실로 가기엔 아직 충분해.”

“나도 오빠가 멋진 옷 입는 거 보고 싶어.”

“내겐 이 옷이 제일 멋진 못이야.”

“거짓말. 공녀님이 선물해 주신 옷, 안 입었잖아.”

아스킨이 멈칫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벤한테 다 들었어. 공녀님이 오빠한테 멋진 옷을 선물해 줬다고.”

아리아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제 오빠가 효율을 중시하느라 말이 집무실이지 이곳에서만 생활하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필요한 것들은 부관인 벤이 이 방에 가져다 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는 옷장을 열어젖힌 동시에 원하던 것을 바로 찾아냈다.

놀랍게도 옷장에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샤를리즈가 선물한 옷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봐. 관심 없는 척하더니 딱 준비해 놨네.”

“그건 내가 아니라 벤이…….”

“거짓말. 벤은 오빠가 싫어하는 거 절대 안 해. 내가 그걸 몰라?”

“…….”

남매는 서로에게 애틋한 만큼 성격을 잘 알았다.

아스킨은 어쩐지 진퇴양난, 함정에 빠진 기분이 되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돌려주려고 제일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두게 한 거다.”

아주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아리아는 아스킨이 머쓱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오빠는 이따금 머쓱해지거나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싶을 때 더욱 차가운 얼굴을 하곤 했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아리아는 아스킨을 더 추궁하는 대신 옷장에 걸려 있는 옷을 한참 바라보았다.

흰색과 붉은색이 적절하게 섞인 멋진 의상이었다.

신경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무트 공작가의 문양에는 붉은색이 들어갔다.

간간이 남색과 푸른 계열이 섞인 무늬는 아마도 아스킨의 머리색과 눈색을 고려한 디자인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디자인을 잘 모르지만, 문외한인 그녀가 보아도 이건…….

‘오빠만을 생각하고 만든 옷 같아.’

최고급 천을 사용한 지라 촉감마저 몹시도 부드러웠다.

아리아는 옷에 달린 장식을 만져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전엔 오빠도 이렇게 멋진 옷들을 많이 입었었는데.”

레무트 공작가가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문이 파산까지 갈 뻔한 정황이나 정확한 부채 금액까지는 잘 모르지만 아리아는 가문이 멸문 위기까지 간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리아가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진 순간, 눈앞에서 옷이 휙 사라졌다.

아스킨이 옷을 뒤로 숨긴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옷 따위 난 필요 없다.”

아스킨의 덩치에 가려 더는 저 예쁜 옷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오빠, 가져가지 마.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그렇지 않아도 언제 또 아플까 솜털처럼 아끼고 또 보호하는 여동생이 울상을 짓자, 아스킨은 끙 한숨을 쉬며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가 활짝 웃으며 옷을 끌어안았다.

“이거, 오빠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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