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194)

52화

* * *

“와…….”

수잔이 자신의 입을 가로막았다.

옆에 있던 안나도 입을 가로막았다.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하녀들도 비슷한 자세거나 표정들이었다.

“세상에, 공녀님,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베스가 수잔이 채 잇지 못한 말을 이어받았다.

나는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끝났어?”

“네, 네, 끝났습니다!”

아이고야, 연예인. 셀럽.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구나.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과정을 돌이켜보던 나는 피로함에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은 걸 꾹꾹 참았다.

‘심지어 이게 아침에 할아버지에게 불려 가고, 잠시 산책 나갔다 온 시간을 빼서 급박하게 한 거라니.’

그럼 제대로 하면 얼마나 걸린다는 거야?

듣기로는 3일 전부터 관리하는 영애도 있다던데.

샤를리즈는 전날에 술을 퍼 마시고도 다음 날 몇 시간 만에 뚝딱 치장을 마쳤다니.

이건 대단했다. 아니, 타고난 미모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나는 하녀들의 탄성 사이에서 천천히 거울을 봤다.

‘오.’

샤를리즈가 예쁜 거야 이제 입이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거울을 본 순간 왜 내 전담 하녀를 포함한 다른 하녀들이 말조차 못하고 어버버 입만 벌렸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와, 오늘은 진짜 끝내주네.’

폭군 오빠가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지금 만큼은 심히 공감했다.

황실 디자이너 ‘로나’가 마치 삶의 모든 정수를 갈아 넣어 만든 것 같은 드레스는, 그냥 보기에도 심히 아름답더니만은.

장식이 완성되고 치장이 더해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자, 그렇지 않아도 반짝반짝하던 미색이 과장해서 백배쯤 빛을 받은 듯했다.

‘내가 있던 세상엔 조명빨이 있다면 여긴 옷빨, 장신구빨일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화려한 옷이 마찬가지로 화려한 샤를리즈의 미모와 찰떡같은 조화를 이루었다.

커튼을 걷고 나서자,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나를 보는가 싶더니 얼른 얼굴을 내렸다.

얼굴을 내린 기사들은 다시는 들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목이 시뻘게진 광경을 심드렁하게 보았다.

‘……내 편도 아닌 인간들.’

아직도 나를 억지로 들어 옮기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제트였다.

“제트.”

내 부름에 늘 우직하게 고개를 들던 기사는 어쩐 일인지, 평상시와는 다르게 내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했다.

그 점이 이상해 이 기사 쪽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 옷차림을 점검했다.

‘……평소보다 가슴이 조금 많이 파여서 그런가?’

아니, 그렇다기엔 기억 속에 샤를리즈는 이보다 더한 것도 잘만 입고 소화했는데?

샤를리즈의 옷 중에서 이 정도는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제트, 고개를 들어.”

“……예, 공녀님.”

“명령이라 해야 말을 듣겠니?”

그제야, 제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우직하고 사내다운 얼굴이 새빨개지는 걸 보았다.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확실히 다르긴 한가 보네?

나는 피식 웃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떠 마주한 인간이 할아버지같이 닳고 닳은 사람이거나, 심술만 부리던 폭군 오빠거나.

혹은 열심히 꼬셔야 하지만 철옹성인 얼음 왕자이신 약혼자님인 탓에.

이런 순진하고도 직선적인 반응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 동공이 흔들려서야 날 지켜 줄 수나 있겠어?”

나는 웃음을 머금고는 그대로 제트를 지나쳤다.

뒤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놀라 돌아보면, 제트가 커다란 몸을 그대로 꿇고 앉았다.

“……제가 죽더라도 반드시 공녀님을 지킬 겁니다.”

……엥?

갑자기? 나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몹시도 당황했다.

왜 그러는 거야?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급발진’이라 표현하던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제트에게로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얼른 일어나. 그리고 딱히 죽는 걸 보고 싶진 않아.”

제트가 놀란 눈을 했다.

“……네.”

그가 일어나자 다시 나보다 훌쩍 커졌다.

올려다보면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선명한 눈동자 색이 보였다.

몇 번을 제외하면 늘 스쳐 지나가듯이 보던 색이었다.

‘……어라, 이렇게까지 선명한 색이었던가?’

내가 갸웃하는 사이 제트가 붉어진 얼굴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공녀님께서는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하지만, 저는…… 반드시 공녀님을 지키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아 바로 근처에 있던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약속?’

고개를 갸웃했지만 샤를리즈 기억에서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건 다시 차차 떠올려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돌아섰다.

“늦었으니 빨리 가자.”

* * *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거대한 마차를 하나도 아니고 둘을 맞이했다.

황당한 눈으로 두 개가 된 마차를 바라봤다.

‘……언제 한 개 더 생겼어?’

근처에 있던 시종이 말하길 폭군 오빠가 마차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그 오빠가 보내 준 마차를 꼼꼼히 훑었다.

과연, 이쪽도 휘황찬란하긴 했다.

게다가 위엄을 뽐내는 황실의 상징까지.

특징이 있다면 록시디언이 보낸 마차는 새하얀 색이었던 탓에,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마차와는 정반대의 색으로 대비되는 느낌이었다.

전혀 다른 두 마차를 보고 있으려니, 각기 마차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알츠베이트 기사들과 황실 기사들이 내게 인사했다.

시종이 내게 한참 다른 마차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마부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사람도 있었다.

보통은 무례하게 여겨질 행동이었으나, 아까 복도를 걸어가며 보아 온 모습들이라 태연하게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순간부터였다.

“고, 공녀님께서는 당연히 알츠베이트 가문의 마차를 타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무려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마차다. 황명을 거역하는 건가?”

“공녀님께서는 알츠베이트 가문의 후계이십니다. 황실에서야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까?”

뭐지. 왜 이 두 기사단이 싸우는 거지.

각자 기사들은 서로가 자신들이 받은 명을 완수해야 한다며, 자신들의 마차를 고집했다.

그것도 차마 내게는 강요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서로 싸우고 목소리를 높이기 바빴다.

그러다 저들끼리 말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느낀 듯 약속이라도 한 듯 각 마차의 대장 기사 둘이 나를 응시했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특별히 만드셨고 반드시 공녀님께서 타시길 바라실 겁니다.”

“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마차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 둘 다 시선이 ‘공녀님, 제발요. 당신이 이 마차를 타지 않으면 우리는 X됩니다.’ 하는 얼굴들인데.

각기 간곡히 간청하는 표정들이라 나는 속으로 난색을 표했다.

‘……나 참, 내게 왜 이런 선택을.’

게다가 이어서 할아버지가 내가 원하는 마차를 타도록 지시했다는 소릴 듣고 나니 더욱 난감해졌다.

‘그게 무슨 선택의 기회를 준 거야? 영감탱, 분명 자기가 준 마차를 타지 않으면 성을 낼 거면서.’

차분히 생각하자.

일단, 오늘은 할아버지와 잘 지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결혼 발표 직전에 순조롭게 대화를 해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사실…….

나는 두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예쁘긴 할아버지가 준 마차가 더 예쁘긴 해.’

비록 내 이름이 새겨져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를테면 TV 속 시상식 레드 카펫 위로 멋진 주인공들이 검정색 고급 세단에서 내려 우아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딱 걸맞은 그런 느낌이 드는 마차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황실이 그것도 폭군 오빠가 제공한 마차를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그 폭군 오빠가 무슨 행패를 부릴지.’

짧은 시간 고민하던 나는 결단을 내렸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래, 이 사람들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무슨 잘못이 있나.

나는 황실 쪽 기사를 응시했다.

황실 쪽 대장 기사는 내 시선만으로 마치 경기에서 승자가 된 것처럼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경은 마차에서 황실 문양을 모두 떼 와.”

“……네! 모시겠습, ……예?”

나는 팔짱을 꼈다.

자비롭게 딱 한 번만 반복해 준다는 듯이.

“황실 문양을 모두 떼 와.”

내가 알기로 저 마차에 붙여진 문양은 탈부착이 가능했다.

게다가 마차의 지붕 위로 장식된 저 장식 또한 떼는 것이 가능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샤를리즈가 술 먹고 깽판 치다가 저걸 다 떼서 부순 기억이 있더라고?’

참 알게 된 사유가 웃기긴 하지만.

이들에겐 내 지시가 너무나 웃기지도 않는 황당한 것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각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나마 대장 기사는 간신히 표정을 유지했지만, 몇몇 기사들은 대놓고 질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해석하자면 ‘샤를리즈가 샤를리즈 했다’ 하는 듯한 표정인데.’

하기야 이들이라고 샤를리즈의 패악을 경험하지 못했겠어.

그러나 이들을 배려해서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약혼자님을 데리러 가야 했다.

‘혹시나 내가 늦어서 마음이 변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거야말로 대참사다.

내가 재빠르게 결단을 내린 이유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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