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미소를 지우고 빤히 쳐다보자, 움찔한 황실 기사들이 마지못해 황실 마차에서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과 장식을 모두 가져왔다.
“일단 가장 큰 문양은 저기 문에 붙여.”
“네? 공녀님 하지만 저건, 알츠베이트의 마차…….”
“내가 두 번 말해야 해?”
“…….”
저 문양을 어디에 붙일까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내 이름을 새긴 곳에 붙이려니 딱 맞아 떨어졌다.
오, 유일한 단점이 저 이름을 새긴 거였는데.
아주 잘된 일이었다.
곧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마차에 황실 문양이 모두 붙여졌고. 마지막으로 장식이 남았다.
나는 그걸 알츠베이트 쪽 마차 지붕에 달라고 명령했다.
“와…….”
지켜보던 하녀들 중 수잔이 감탄했다.
“공녀님, 너무 멋진 것 같애.”
“……그러게, 저 난감한 선택을 어쩜 이렇게 헤쳐 나가시지?”
쑥덕이는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지만, 나는 슬쩍 모른 척해 주었다.
저들이 편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증거니까.
편해졌다고 무례하거나 함부로 굴 인물들도 아니고.
나는 마침내 완성된 마차를 보았다.
속으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제국 최강의 마차네.’
현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의 문양을 장식한 마차라니.
게다가 황실의 문양이 마차의 색에 비해 튀지 않아서 더욱 잘 어우러졌다.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게 탄생한 제국 최상의 마차를 타고 얼음 왕자님, 아니 내 약혼자님을 데리러 갔다.
‘날씨가 엄청 좋네.’
어느새 저녁이 된 날은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물론 이런 옷차림인지라 나가면 춥기야 하겠지만.
별이 뜨기 시작한 하늘이 제법 어여뻤다.
레무트 영지에 도착했을 때, 막 성문을 지나자 길거리에 서 있던 영지민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의 마차래!”
“뭐, 진짜?”
누군가 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황실 문양 때문에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내가 창문을 슬쩍 열자, 한 영주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그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니야, 알츠베이트 공녀님이셔!”
“헉, 어디, 어디, 진짜잖아?”
고개를 조아렸던 이들이 삽시간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엔 묵직한 조아림이 만세와 환호로 바뀌었다.
모두가 ‘공녀님!’, ‘어서 오세요!’, ‘또 놀러 오세요!’ 하는 식의 환대를 높여 외쳤던 지라 조금 얼떨떨했다.
환호성은 내가 레무트 성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쫓아왔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는 늘 보던 기사 대신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약혼자님과 아리아였다.
‘아리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리아가 밖에 나와도 되는 거야?
물론 약혼자님도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한 건지, 아리아는 이전에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꽁꽁 싸맨 차림이었다.
하필 예쁜 은빛 머리 색과 잘 어울리는 하얀 털 망토에 하얀 털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오늘따라 더욱더 눈 토끼 같았지만.
문이 열리고 입구를 사이에 둔 채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나가려 하자, 놀랍게도 약혼자님이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 앞으로 내밀어진 검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을 보다, 나도 모르게 표가 날만큼 멈칫했다.
“…….”
그런 나를 보는 약혼자님의 표정 또한 묘해졌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가 미약하게나마 움찔했다.
나 또한 생각 이상으로 단단한 손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생각해 보니 노아에게 앉긴 적도 있는데, 이거랑 그게 다른 게 뭐라고.’
속으로 숨을 삼키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미묘하게 나를 스쳐 지나간 긴장감을 애써 지워 내려 노력했다.
“고마워.”
내 새침한 인사에 아스킨은 날 빤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곧 ‘네가 그런 인사도 할 줄 아는군.’ 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이 이어졌지만, 목소리나 억양이 미묘하게 달랐다.
아니면, 내 희망 사항이었던 걸까.
‘……뭐야.’
밖으로 나와 아스킨을 꼼꼼하게 보게 된 나는 곧 실망했다.
‘……내가 선물한 옷을 입지 않았잖아?’
그는 외출할 때 늘 걸치던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모로 보아도 내가 선물한 옷과는 수천 미터 떨어진 옷이었다.
‘어휴, 내 이럴 줄 알았다.’
무슨 희망을 가진 거람.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한편으로 머리는 앞으로 있을 일에 관해 빠르게 대비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이대로라면 황실엔 어떻게 들어간담.’
폭군 오빠가 내세운 복장 검토가 꼼꼼하게 이루어질 연회였다.
다시 생각해도 그 무슨 고약한 심술인가 싶지만. 어쨌거나 대비책은 있어야 할 터.
고민해 봐야겠다.
“공녀님!”
아스킨의 옷차림 덕에 모든 긴장감을 날린 동시에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막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모두 사라졌다.
“아리아.”
“네!”
아리아가 달려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놀라는 대신 웃으며 아리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귀여워라. 손에도 흰 장갑을 꼈네.’
누군지 몰라도 아리아의 살갗 하나 추위에 노출 시키지 않겠다는 집요한 의지가 느껴졌다.
좋아, 아주 기특한 사람이야.
“아리아, 꽁꽁 싸맸네요. 춥지 않겠어요.”
“네, 오늘은 영지가 조금 춥다고 해서요. 오빠가 이렇게 권해 줬지 뭐예요.”
……약혼자님이었어? 좋아, 칭찬해.
나는 끄덕였다.
“좋은 오빠네요.”
이 말을 하면서 굳이 아스킨의 표정을 보진 않았다.
어차피 봐 봤자, 언제나처럼 ‘넌 또 무슨 꿍꿍이냐’ 하는 표정이나 짓고 있겠지.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리아는 내가 굳이 보지 않은 아스킨 쪽을 한번 보더니, 곧 나를 보면서 알겠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금방 가 봐야 하죠? 그보다 공녀님 세상에, 안 추우세요? 제가 이제 봤어요!”
“네? 아, 아니에요. 금방 마차에 탈 건데요.”
“하지만, 오늘 영지는 추운데……. 안 되겠어요! 이, 이거라도!”
“아뇨, 아뇨! 벗지 말아요!”
나는 서둘러 망토를 벗으려는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내 드레스가 밖에 나오기는 추워 보여도 그렇지, 내가 벼룩의 간을 빼먹냐! 아리아의 옷을 뺐게?!
곧 내게 붙잡힌 아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유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툭 어깨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걸 걸치도록. 내 여동생 옷을 빼앗지 말고.”
“…….”
어깨에 익숙한 색의 코트가 보였다. 아스킨의 코트였다.
그리고 아스킨을 본 순간, 나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옷…….’
코트 아래 걸친 옷, 아스킨이 안쪽에 내가 보내 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겉옷은 미처 따로 만들어 보내지 않았단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뺏을 생각도 없었어. 안 보여? 보전해 주려는 거.”
“빨리 가지.”
내가 아리아에게서 손을 떼자, 아스킨에게서 잘못 들은 건가 싶은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착각이 아니라면 희미한 웃음기마저 스며 있었다.
‘……뭐야. 뭔데. 이 시그널. 그린 라이트? 그린 라이트지, 이거?’
속으로 주접을 꾹꾹 인내하느라 바빴다.
어깨에 걸친 코트에서 시원한 눈의 향기가 느껴졌다.
어쩌다 이 남자랑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때 희미하게 느껴졌던 향기였다.
‘이게 이런 향기였구나.’
내게 있는 샤를리즈의 상식으로, 연회에 갈 땐 겉옷 따위 필요 없었다.
샤를리즈는 황성과 아주 가까운 수도에 사니까.
나는 곧 아리아의 풀어진 망토 리본을 제대로 매 주었다.
아스킨은 찌푸리긴 했지만 별말 없이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리아야 신이 나서는 상기된 얼굴로, 연회에 가서 즐거운 일이 있다면 꼭 알려 달라고 했다.
“공녀님 잘 다녀오세요! 또 봐요!”
“응. 또 봐요.”
“꼭이에요. 오빠도 잘 다녀와.”
“그래. 너도 얼른 들어가.”
그렇게 아리아와 헤어져 우리는 마차로 들어섰다.
마차에 탈 때도 저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낯선 기분을 또 한 번 느꼈지만.
보통의 마차와 다르게 할아버지가 특별 주문한 마차는 바퀴 소리마저도 거의 나지 않았다.
덕분에 마차 내에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어쩐 일인지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내 안에서는 타닥타닥 회로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좋은 신호다.’
바로 희망 회로가!
나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흘끗, 나는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 어깨 위에는 저 남자의 코트가 놓여 있었다.
나는 조금 거친 듯한 면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약혼자님의 의상을 점검했다.
‘이야, 누가 만든 건지 몰라도 정말 때깔이 좋다 좋아.’
사실 붉은색이 들어간지라 저 남자의 머리색과는 어울리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나 보다.
하기야 평소의 깔끔한 차림도 세상 그 어떤 옷보다 고급지게 만들던 사람이었지.
게다가 비어 있던 자리에 가문 문양의 훈장을 달아 둔 모습은 마치 이 남자를 위해 만든 옷처럼 꼭 잘 어울렸다.
‘물론 저 남자 하나만을 위해 만든 옷이긴 하지만.’
혹시 약혼자님은 우리가 커플 옷을 걸친 걸 알고 있을까?
하기야 저 사람도 눈이 있는데 금방 알아보지 않았을까.
몇 번이고 눈이 마주쳤으니 말이다.
‘여기에 대해 의견은 말 안 해 주려나?’
뭐, 예쁘다거나 이런 말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눈치는 채 주면 좋겠는데.
아니다, 오늘만큼은 약혼자로서 동행한다고 했으니 이미 알고서도 그러려니 하는 걸까?
혹시 몰라 드레스를 뽐내고자 슬쩍 어깨에 얹은 코트를 벗고 자세를 취했지만, 약혼자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봐도 나 오늘은 진짜 예쁘던데. 혹시 이 남자는 미의 기준이 좀 다른가.’
기사들이나, 시종들. 심지어 무뚝뚝하던 제트마저도 동공이 흔들렸는데!
‘……과연 이 얼음 왕자 같으니.’
나는 속으로 꿍얼거리며 이 어색함을 풀고자 입을 열었다.
“옷은 마음에 들어?”
그제야 창문만을 향했던 아스킨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는 싸늘하진 않지만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감상은 다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