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뭐?”
“계속 쳐다보길래 감상 중인 줄로 알았다만.”
“…….”
“뚫어지는 줄 알았군.”
……시선을 다 느꼈단 말이야? 그런데도 모른 척했고?
어휴, 머쓱해라.
하기야 제국 최고의 검사니 나 같은 사람의 시선을 못 알아차리는 게 이상하겠지.
나는 금방 태연하게 넘겼다.
“그래, 뭐. 잘 어울려서 봤어. 당신 감상은 어때? 마음에 들지?”
“……아리아의 성화에 못 이겨 입게 된 거다.”
나는 싱긋 웃었다.
어이쿠, 그러셨쎄요? 내가 알기로 댁은 싫은 일은 때려죽여도 안 하실 텐데요? 특히나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은 더욱이?
“……날 인형 취급하지 마라.”
아직도 내가 돕는 건 연회에 약혼자로서 참석하는 것뿐이다 하고 못을 박던 아스킨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건수를 문 전문직처럼 어떻게든 눈앞의 이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표정을 한 채로.
“마음에 드는 거지? 그래서 입어 준 거지?”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셈이지?”
“그래, 알아. 예쁜아.”
아스킨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부터 그 호칭은 대체.”
“하지만 당신이 나보다 더 예쁘잖아? 그래서 예쁜이.”
“…….”
“오, 인정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나도 눈은,”
“있다고? 그럼 내가 더 예뻐?”
“…….”
오, 그렇게 경멸하는 표정을 할 건 없잖아요?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어차피 이 남자는 오늘 하루는 연회 내내 내 옆에 있을 거라는,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런 남자니까.
“화제를 바꾸지 마라. 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사람의 내실이 더 중요한 거니까.”
와, 이렇게 내 인성을 욕한다고?
아, 물론 과거 샤를리즈의 인성 파탄 인정합니다.
‘억울하게도 제가 그 사람이 아니어서요.’
난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예쁜 옷이 좋지.”
“내면이 참된 사람이 그에 걸맞게 반듯한 옷을 걸치면 태가 난다고는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대쪽 같은 선비였을 양반이구만.”
“뭐?”
“헛소리야.”
생각해 보니 한복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긴 하다.
그렇지 않아도 정갈한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
나는 속으로 그만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기껏 야심차게 의상을 준비했는데, 단 한마디의 말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내 눈이 몹시 즐거웠던 걸로 퉁 쳐야 하나.’
그래야겠지, 뭐.
휙휙 지나가는 창문을 보고 있으려니, 옆얼굴로 아주 잠시 시선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잠시뿐이었다.
곧 곁눈질에 잡힌 시야로 아스킨 또한 창문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그 후로 얼마나 달렸을까.
툭. 투둑.
“……어.”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우비처럼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제법 거친 소낙비가 되었다.
아까까진 하늘이 그렇게 맑았는데……. 나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킨 또한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홍수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오네.”
그러고는 눈을 들며 명료하게 말했다.
“필요하면 지난번처럼 일꾼을 보낼게. 편히 써. 언제든지 말해.”
“……지난 일도 충분히 감사했으니, 됐다.”
차갑게 느껴질 법한 인사였지만, 그 목소리와 뉘앙스는 그렇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조금 낯설게 느껴질 법한 정중함이 느껴졌다.
“과한 폐는 끼치고 싶지 않군.”
그렇구나.
당신은 평범하게 대화를 할 때 이 정도의 정중함을 두고 대화하는구나.
말없이 느낀 감상은 속으로 삼켰다.
대신 생긋, 웃어 보였다.
마치 새로운 안이 떠오른 사람처럼 손에 든 부채를 입에 툭 가져다 대면서.
“그럼 폐가 되는 일 없게 다른 의견이 있는데, 어때?”
“…….”
“우리가 가족이 되면 폐가 될 일도 없지.”
“…….”
오, 먹금하네. 너무한걸.
나는 부채로 슬쩍 가리며 입을 비죽였다.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이 차가운 얼음 토끼 같으니.
속으로는 분위기가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왜 하필 지금 순간에 비가 오는 거냐며 투덜거리기 바빴다.
빗속에서도 열심히 달린 마차는 이윽고 황성에 도착했다.
수도에 들어서 황성에 도착했을 즈음엔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인지, 아니면 폭우의 조짐인지 몰라도.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멈춰 선 마차 안에서 마차의 문이 열리기 전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이 남자가 이 빗속에서 에스코트를 해 줄까?’
남녀의 입장에서 남성의 에스코트는 기본 사항이었다.
특히나 약혼 관계일 때는 당연한 예의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리가 보통의 약혼 관계와는 다르게 지금까지 이런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이였단 게 문제였지만.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약혼자 노릇하겠다, 지금은 아니다 선언하고 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조금 전에 평소랑은 다른 정중하거나 살짝 누그러진 모습을 보면 오늘은 그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스킨은 빗속으로 먼저 내려서 휙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나는 벙찐 상태로 사라진 뒷모습을 멀거니 보았다.
밖은 세차게 비가 내리고, 빗소리가 귀를 때렸다.
‘……뭐야, 진짜 혼자 갔어?!’
난 경악했다.
아니,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이럴 줄이야! 어이가 없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여기엔 뭐 보는 눈이 없겠냐고…….”
마차 안에 나만 남았겠다 작게 꿍얼거리기 바빴다.
너, 이 씨, 아스킨 네놈. 그래도 좋게 봤는데. 이건 진짜 인간 대 인간으로 나빴다. 이놈아!
나는 30초도 되지 않아 말끔히 포기하고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괬다.
‘그래, 누군가는 우산을 씌워 주러 오겠지.’
어차피 이 드레스 차림으로는 뛰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비를 다 맞으면서 내릴 수도 없지 않나.
아스킨이 사라졌으니, 뒤따라올 기사들이라도 달려와 우산을 가져와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사를 부르지 뭐.’
소리라도 칠 요량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내가 한 발 내딛기 무섭게 비가 그쳤다.
아니, 누군가 내게 우산을 씌워 준 것이다.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뚝. 물이 떨어지는 얼굴이 보였다.
“……아스킨?”
“오랜만에 네 입에서 내 이름을 듣는군.”
평온하게, 하지만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듯 조소하는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남자는 어느새 장갑을 벗은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한 손을 뻗으려다 푹 젖은 장갑을 보고는 이내 입으로 가져와 장갑을 물고 벗었다.
“안 내리나?”
그 말에 나는 홀린 듯이 내밀어진 손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푹신, 바닥에 밟히는 바닥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져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행히 우산을 쓰고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걸을수록 길지 않은 이 길을 걷기 위해 이 남자가 손수 뛰어 우산을 가져왔단 사실이 더욱 부각 되는 기분이었다.
“……난 솔직히.”
쏴아아아. 여전히 폭우의 시작인지, 지나갈 소나기인지 모를 시원한 빗소리 사이에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네가 혼자 가 버린 줄 알았어.”
“뭐, 평소의 너와 내 모습이라면 그럴 수 있겠군.”
생략된 말끝에, 네가 했던 일을 기억하느냐는 뉘앙스가 담겨 있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언급하지 않을 뿐 과거의 샤를리즈가 한 일들은 지나치게 악독했다.
“하지만 난,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켜.”
빗소리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와 같은 분노는 어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상대가 악마든, 나를 늪으로 빠트린 상대든. 내 여동생을 위기에서 구해 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
“오늘은 얌전히 약혼자 노릇 해 줄 테니 너도 걱정하지 마.”
말투만 평온했을 뿐 여전히 서늘함이 더욱 느껴지는 말이었다.
거리를 벌리고 경계가 묻어나오는 말임에도 나는 지금 들려온 목소리가 썩 싫지 않았다.
‘이건 내가 당신이 정말 싫은 건 죽어도 하지 않는 대쪽 같은 인간이란 걸 알기 때문이겠지.’
입술을 달싹였다.
‘……후, 기왕 이러는 거 1년만 이렇게 지내자고 질척거리고 싶다.’
아냐, 아냐. 정신 차리자. 지후야.
질척대지 말자!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릴 순 없지. 이 남자가 정말로 토끼라면 더욱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지. 암. 그렇고말고.
“알츠베이트 공녀님과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우리는 건물 입구에서 우산을 시종에게 맡기고 다른 시종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 입구에 도착했다.
‘오, 이 문 기억난다.’
샤를리즈의 기억에도 있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앞에서 명부를 확인하던 황실 시종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크흠, 크흠, 죄송합니다. 두 분의 입장을 알리겠습니다.”
황실 내 모든 연회장에는 문이 총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황족이 입장하는 문.
다른 하나는 일반 귀족들이 입장하는 문.
마지막으로 황족에 준하는 최고위 귀족이 입장하는 문.
공녀인 나와 약혼자님이 입장하는 문이 바로 이 문이었다.
곧 눈앞으로 거대한 문이 열렸다.
시야를 방해하는 눈부신 빛에 살짝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