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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57/194)

56화

“이야, 왔구나.”

조금 전 연주자가 실수로 샤를리즈를 가리킨 이후로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침묵에 휩싸인 연회장이었다.

인파가 갈리고 누군가 저벅저벅 거침없이 걸어왔다.

익숙한 실루엣에 샤를리즈는 찡그리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록시디언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잘난 면상에 길쭉한 다리로 걸어오는 폭군 오빠를 보며 경악했다.

‘저 인간이 왜 반갑게 걸어와?’

꺼져, 꺼지라고. 그녀가 속으로 열심히 외치며 주변을 훑었다.

록시디언이 걸어온 방향 쪽, 멀지 않은 곳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보였다.

더욱 난감해지는 기분이었다.

‘오지 말라고!’

그러나 결국 샤를리즈 앞에 다다른 록시디언이 제 여동생을 응시하며 씩 웃었다.

“안녕, 동생아.”

왜인지, 눈만은 서늘하게 가라앉아서는 록시디언은 그대로 옆으로 눈을 굴려 연주자 쪽을 응시했다.

“흠, 네가 오자마자 딱히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샤를리즈를 가리켰던 연주자는 순간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깊은 공포를 느꼈다.

그가 덜덜덜 어깨를 떨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신체의 일부로 여기던 소중한 악기를 바닥에 떨어트릴 정도로.

그는 거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시선을 다시 돌린 록시디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스레 웃었다.

“내 여동생의 미모를 처음 봤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샤를리즈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와 같은 반응에 록시디언은 더욱 즐거워졌다.

그러다 샤를리즈의 옆을 응시한 순간, 록시디언의 눈으로 냉기가 서렸다.

아스킨은 록시디언이 나타난 순간 바로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지만, 록시디언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아스킨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표정의 동요조차 없었다.

‘……쯧 뻣뻣하기는, 맘에 안 드는 놈.’

록시디언은 그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 입구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더니, 어디서 난 건지 몰라도 딱 알맞은 옷을 걸치고 들어와 애써 내건 의상 검토 조건은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아마 저 정도면 문을 지키고 있던 시종장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를 시켰을 터다.

흠잡을 곳이 없는 의상이었으니까.

샤를리즈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인사가 늦었네. 황제 폐하. 강녕하셨니?”

웃고 있던 록시디언의 눈썹이 치솟았다.

“허어, 여동생아, 안 하느니만 못한 인사는 왜 한대? 나 열받으라고?”

샤를리즈는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럼 네가 이 나라의 황제인데 의례상으로 인사라도 안 하리?

록시디언이 사납게 생긴 얼굴에 넉살 좋은 미소를 띠며 은근하게 아스킨을 옆으로 밀어내고 샤를리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샤를리즈는 어처구니가 없어 록시디언에게 눈으로 욕했다.

심하게 욕했다.

‘뒤질래?’

‘싫은데?’

‘목걸이 써?’

‘오호, 둘이 같이 죽어 보자고?’

남매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샤를리즈는 이를 부득 갈며 물러났지만, 원망은 아스킨에게도 향했다.

‘아니, 약혼자님. 거 댁은 왜 밀려나고 그러는 건데.’

이 여자가 내 약혼녀다! 내 자리는 여기다! 날 향해 소유권을 주장해 보란 말이야.

책 속 주인공은 자신을 향한 집착으로 몸살을 앓는데, 저는 하필 악독한 악녀의 몸에 눈을 뜨는 바람에! 사랑스러운 코인과 목숨을 향한 집착으로 앓아 누울 지경이셨다.

샤를리즈는 어쨌거나 이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자, 저쪽으로 가자고. 내가 특별히 좋은 자리를 만들었지.”

“……자리?”

록시디언은 자신의 등에 꽂힌 따가운 시선을 알아차렸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저를 죽일 듯한 마음을 품고 쳐다보고 있으리라.

그는 욕망 어린 돼지 손에 여동생을 쥐여 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아직은 황족이 되진 않았다지만, 시간문제다.

사람들은 황제가 이전에 없이 애정을 표출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금세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서로 닮은꼴의 남매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그들 눈에도 흐뭇하게 보였을뿐더러, 누군가 샤를리즈의 패악 상대가 되기 전에 황제가 데려가 주는 듯해 많은 이들이 안심하기도 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좋은 구경을 놓쳤다며 아쉬워했지만.

“자자, 가자고.”

록시디언은 싱글 웃는 채로 샤를리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아프지 않게 살살 밀었다.

샤를리즈는 속으로 ‘이놈이 왜 이래?’ 하고 생각하면서도 쏟아지는 시선에 못 이겨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얌전히 물러나지만은 않았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록시디언은 제 손을 붙잡는 손을 느꼈다.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의 손을 내려놓고는 도도한 얼굴로 갔던 길을 돌아섰다.

“왜 이쪽엔 인사 안 해, 오빠?”

“흐응?”

샤를리즈가 아스킨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어차피 여기서 죽일 듯이 노려봐야 내 손해다, 그러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자 내 약혼자야. 빨리 챙겨 줘.”

“…….”

“아니면, 안 가.”

샤를리즈가 새초롬하게 삐죽이자,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보았다.

……세상에 패악에서 벗어나고 이런 구경까지?

“나 이 사람 사랑해.”

샤를리즈의 발언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남몰래 잔을 부딪치며 포도 알을 입에 삼키는 이도 있었다.

“…….”

남매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웃는 그대로 지켜보는가 싶던 록시디언의 눈이 그대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웃는 그대로 돌아왔다.

“아아, 정무에 너무 지친 나머지. 가끔 눈이 침침할 때가 있지. 실례했어, 레무트 공작.”

“……아닙니다.”

아스킨은 현재 조금 놀란 상태였다.

샤를리즈가 전에 없이 황제와 살갑게 구는 것도 그러했지만.

“이거? 내 거야.”

소유욕이 아닌…….

내 약혼자. 존중해야 할 사람.

그리고 사랑이라니.

아스킨은 일렁이는 혼란을 참느라 록시디언이 성의 없이 사과 비슷한 말을 건네는 것도 그대로 넘어갔다.

처음부터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록시디언은 아스킨이 당연히 섬겨야 할 황제였고 주군이었다.

주군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수하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샤를리즈가 대쪽 같다 평가하던 올바른 심성은 이곳에서도 발휘되고 있었다.

각자가 혼란과 불쾌함을 삼킨 채로 샤를리즈는 기어이 아스킨을 붙잡고 록시디언의 뒤를 쫓았다.

샤를리즈가 걷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서 이동했다.

록시디언은 이를 눈치채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이지, 제 여동생은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데 탁월한 가히 악마의 재능을 가졌다.

‘어딜 더러운 시선 따위를.’

종종 느껴지는 불쾌한 시선은 록시디언이 눈을 부라린 순간 사라졌다.

록시디언은 아스킨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아스킨을 보면서 서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뭘 봐. 쭉정아.

근처에 있던 노아가 그 모습을 보면서 ‘저 폐하는 왜 레무트 공작 앞에서만 유치해지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삼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로.

“……세상에 정말로 함께 계시네요.”

“이제 화해하신 걸까요?”

“참으로 이상하네요. 저분이 행한 일을 용서하시다니…….”

“쉿!”

한편 샤를리즈는 이동 중에 쑥덕거림을 들었다.

몇몇 문장은 정확하게 들렸으나 또 어떤 단어나 문장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등장만으로 흥미를 느끼고 있단 것만은 살갗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샤를리즈는 이동 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저 남자는…….’

이안 차일드. 할아버지가 아스킨을 버리고 새로 맺어 주려 했던 약혼자 후보였다.

잘생기긴 했지만 영 여우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남자.

시선이 마주친 찰나, 그의 부드러운 눈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휘어졌다.

샤를리즈는 이안이 자신과 아스킨을 보는 얼굴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찝찝하네.’

아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묘한 미소였다.

잠시 후, 록시디언이 걸음을 멈췄다.

마침내 록시디언이 안내한 곳은…….

‘미친 XX!’

다름 아닌 황제의 옥좌, 즉 이 연회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샤를리즈는 옥좌 옆에 놓인 의자를 보고서 욕을 참지 못했다.

나를 저기에 앉히겠다고? 할아버지도 있는 자리에서?

미친 거 아니야?

‘……사실 깽판은 내가 아니라 저놈이 치는 게 조건이었나?’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었다.

샤를리즈는 아무래도 저 폭군 오빠가 오늘 단단히 돌아 있는 게 분명하거나 광증 초기 증상이 나타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저기 데려가려 들면 단칼에 거절할 준비를 했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노아가 인사를 했고, 다음 순간 그가 단호히 말을 할 때까지는 이런 생각이었다.

“레무트 공작께서는 계단 위로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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