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194)

57화

* * *

나는 멈칫했다.

‘아니, 저기 올라갈 생각도 없었는데…….’

노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노아를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노아가 살짝 굳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번복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긴 황족만이 올라갈 수 있는 곳입니다.”

아니, 애초에 나는 저기 갈 생각도 없었다니까?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거지.

게다가 이제 간만 보는 것도 끝이었다.

샤를리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지금 살갗으로 충분히 느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더욱 부아가 치미는 건 깔끔하게 대답하는 아스킨의 태도였다.

그를 보자니, 어째 내가 싫어서 후련하다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정중하고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 이 인간 대단한 충신이었지.’

나는 그대로 찡그렸다.

이런 대쪽 같은 모습이 싫진 않은데,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째 이 사람은 상사가 갑질해도 그대로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것 같다고.

실제로 조금 전에 그런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하. 싫은데?”

나는 그대로 한 손은 아스킨에게 팔짱을 낀 채 나도 팔짱을 꼈다.

아스킨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거 조금만 참아 봐. 약혼자님.

“웃기지도 않네.”

내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동시에 내 시선이 폭군 오빠에게로 옮겨갔다.

“나 황족 아니야.”

록시디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술궂게 웃었다.

“너와 내 피가 다르더냐?”

“오늘부터 다른 걸로 해도 좋겠다.”

“애석하게도 어쩌냐. 거울을 보듯이 이렇게 닮은걸.”

“웩.”

“……죽을래?”

록시디언이 주변에 들리지 않게 협박했다.

세상에, 황제가 이래도 돼?

이래도 되겠지. 그래서 폭군이겠지.

“난 여기 있을게.”

얌전히 한발 물러났다.

애초에 이건 약혼자님과 함께하는 천금과 같은 기회였다.

겨우 여기서 놓칠 수는…….

“정말 싫어?”

그 순간 록시디언이 나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동그라미를 만드는 행태에 나는 그대로 찡그렸다.

‘하, 여차하면 할아버지에게 채무 사실을 불겠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알았어. 정히 원한다면야.”

그렇지만 그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10분.”

“……연회 끝날 때까지.”

“집에 갈게. 그대로 모두 반납해?”

“……1시간.”

“10분.”

“20분.”

“좋아.”

내가 씩 웃었다.

록시디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돌려 아스킨을 향했다.

“아스킨, 다 들었지? 저 오빠가 나를 얼굴 장식으로 세우려 드네.”

“야, 너 무슨 말을 그 따위로.”

“우리 오빠가 쑥스럼이 많아서 말이 좀 거칠어. 당신을 아끼는데 수줍어서 말도 못 거는 것 좀 봐.”

“외람되지만 정말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부관인 노아 경도 동의한다네.”

아스킨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마치 ‘이 개판은 뭐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의 혼란을 충분히 이해했다.

맞아, 나도 저 유치한 폭군 오빠를 보면서 내가 잘못 빙의했나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20분만 기다려 줘. 금방 올게.”

아스킨은 나를 빤히 보더니,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고요히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군.”

“응. 예쁜이에게만 한정이야. 놀랍지?”

“무슨…….”

“농담.”

나는 아스킨의 팔에서 팔을 빼냈다.

그러고는 살짝 그의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사실 아리아의 선물을 가져왔었는데, 아깐 미처 주지 못했어. 있다 당신이 받아서 전해 줘. 부탁할게.”

이건 정말이었다.

아리아에게 주기 위한 빗을 가져왔는데,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주지 못했다.

“……빗?”

“응. 아리아가 벌써 말했어? 그거야.”

“…….”

이렇게 말하면 20분 동안 어디 도망가진 않겠지.

좋아, 완벽한 설계다.

아스킨의 표정을 모두 보지 못한 채 나는 어쩔 수 없이 록시디언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연회는 폭군 오빠의 축사를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허, 의외로 말 잘하네?’

앞으로 나가서 할 말 하는 모습을 의자에 앉아서 보게 되었다.

황제의 자리는 계단 위쪽에 마련되어 있다 보니, 연회장이 잘 내려다보였다.

넓기도 정말 넓네.

아스킨의 팔을 잡고 걸어갈 때도 느꼈지만 정말 넓었다.

게다가 록시디언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록시디언에게만 쏟아지는 시선이란…….

책 속에 광증만 제외하면 멀쩡하다 못해 대단한 황제라는 서술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는 귀족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내 자리가 황제의 바로 옆에 준비된 자리다 보니 더욱 잘 보였다.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각 귀족들이 돌아가며 인사를 하러 왔다.

대부분이 황제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내 눈치를 보면서 내 쪽에도 인사를 올렸다.

내가 여기 앉기는 했지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를 난감한 얼굴들이라, 나는 무시하거나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특히나, 록시디언에게 극도로 충성하는 일명 ‘황제파’ 귀족일수록 나를 향해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록시디언 몰래 보냈고,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이고, 나도 이 자리 싫거든요? 나는 오빠가 없어요. 없었으면 좋겠어요. 예?’

오히려 도를 넘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럼 알아서 화들짝 놀라면서 시선을 피하더라.

천하의 패악질 악녀가 꼴 보기 싫어도 자기가 첫 번째 희생양이 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던 귀족에게 보란 듯이 사납게 웃어 주었다.

그러자 나를 불쾌하게 쳐다보던 귀족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야, 이거. 더럽게 기네…….’

그렇게 몇 번 비슷한 일을 반복할 즈음, 지루해져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야, 내가 이 자리 앉자마자 누가 따갑게 쳐다보길래 고갤 돌리자마자 바로 발견하게 됐는데.

아주 이쪽을 강렬하게 쳐다보시더라.

자리가 자리인지라 노려보진 않으셨는데, 눈으로 쌍욕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래 싸움에 내 등만 안 터지면 좋겠는데 말이지.’

할아버지의 생각을 지우며 시선을 옮겼다.

‘약혼자님은 잘 있나.’

황제에게 인사하러 온 또 다른 이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아스킨을 찾았다.

놀랍게도 아스킨은 우리가 헤어졌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서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살짝 멀어지고 벽 쪽으로 갔는데, 얼굴에는 언제나 보았듯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와글와글한 귀족들이 어쩐 일인지 약혼자님 쪽으로는 발길도 하지 않았다.

몇몇 영애 혹은 귀부인들이 꽤 많이 약혼자님 쪽을 흘끗거리며 보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저건 샤를리즈가 내 거 건드리지 말라고 깽판을 쳐 둬서인가? 속된 말로 내 깔이다, 뭐 이런?’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아니면 굳이 샤를리즈가 아니어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건가?’

귀족들의 반응을 봐서는 아무래도 전자가 압도적일 것 같은데.

그때였다.

연회장 안을 은은하게 채우는 음악의 종류가 바뀌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덧 한없이 길게 서 있던 줄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서 있던 귀족이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아, 어쩐지. 그래서 춤곡으로 바뀐 건가?’

이제 인사의 시간은 끝나고 춤추는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줄곧 앞쪽에 서 있던 록시디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찡그리자 아주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씩 짓궂게 웃었다.

언제나 짓던 그 얼굴이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가 볼게.”

“어딜 가?”

“춤.”

나는 연회장 중앙 쪽을 까딱했다.

본래 춤의 시작을 알리는 건 이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자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록시디언은 현재 황후도 그렇다고 약혼자도 없는 상태.

본래 내가 황족이었다면 내게로 순위가 넘어왔겠지만 나는 황족이 아니라 공녀다.

록시디언은 자연스럽게 제가 시작하지 않아도 춤을 추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은 빠르게 행동했다.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기 시작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이 시간까지 됐는데, 내가 더는 여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앉아 있을 만큼 앉아 있었어.”

더 앉아 있으라고 하기만 해 봐라. 약속이고 뭐고 물어뜯어 버릴 테다.

이런 시선으로 삐딱하게 보자, 록시디언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능글능글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따지는 대신 계단을 내려갔고, 짜증 나게도 폭군 오빠는 나를 쫓아 내려왔다.

“왜 쫓아와?”

“쫓다니? 내 동생은 자의식 과잉이냐? 나도 내려가는 건데?”

“그럼 저리로 가.”

“쟤리로 걔.”

“……미쳤나.”

와, 지금 내 말투 따라한 거야?

어쩜 세상 오빠들은 다 똑같냐?

윤지훈이 나를 놀려먹을 때 쓰던 말투랑 방식 그대로 똑같을 수가 있지.

“야, 레무트 공작이 네가 입은 옷이랑 비슷한 걸 입고 온 것 같던데.”

“그게 뭐?”

“네 작품이지?”

“글쎄다.”

그럼 내 작품이지.

‘그것도 아주 걸작.’

내가 폭군 오빠의 의상 검열이라는 심술에 당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속으로 소름 돋는다며 중얼거리고는 무시한 채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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