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내가 향한 곳은 당연히 약혼자님이 있는 곳이었다.
줄곧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건지 내가 저 위에서 바라본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작.”
“왔나? 아…….”
아스킨은 자연스럽게 내게 팔을 내밀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약혼자처럼 내미는 모습이었다.
그도 잠시 내 옆으로 쫓아온 폭군 오빠를 보았는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록시디언의 존재를 무시한 채로 아스킨의 팔을 살짝 잡았다.
그러다 말고 손을 놓고는, 이번엔 내 쪽에서 손을 내밀었다.
내밀기 전에 고민을 살짝 하긴 했는데…… 그리 길진 않았다.
“공작, 나랑 춤출래?”
춤. 사교계에서 춤이란 친밀감의 상징이었다.
약혼자님과 춤을 추는 모습을 할아버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조금 뒤에 결혼 발표를 미뤄 달라고 말하는 데 더 수월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게다가 나와 약혼자님을 둘러싼 관계에 대한 악소문들도 완화할 수 있을 테고.
‘……물론 샤를리즈가 한 짓이 있다 보니 악소문이 그냥 뜬소문이 아니고 사실이지만.’
아스킨이 내밀어진 손을 빤히 응시했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곧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춤은 거절하겠다.”
끙, 혹시나 했지만 함께 참석하는 것이면 몰라도 춤까지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 나라에서의 춤이란 남녀가 몸을 붙이는 상당히 그렇고 그런 행위처럼 보이니까.
‘아니, 이건 전지적 현대인 시점인가.’
나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일단 저 남자랑 이 자리까지 참석해서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 게 어디야.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런데 이 자리엔…… 괜찮은 것도 괜찮지 않게 만들 인간이 하나 있었다.
“레무트 공작은 귀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인 춤도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
록시디언의 말에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얜 또 왜 이래?
왜 갑자기 시비야? 저건 KTX를 타고 가다 들어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약혼자님이 나서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발끈하려 했지만, 폭군 오빠가 이마저 알아차렸다는 듯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나만 볼 수 있게 손가락으로 슬쩍 동그라미를 만드는 게 아닌가.
이 신호를 눈치챈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XX가 이제 틈만 나면 돈을 들이미네? 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놈이……!’
분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가까스로 놈에게 예의를 갖췄다.
아, 히죽대는 눈을 쿡 찔러 버리고 싶다.
“배웠으나, 한참 부족합니다. 특히나 제 약혼자의 소양을 따라가기엔 많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약혼자님은 폭군 오빠의 비아냥을 못 들었다는 듯 정중하게 답변했다.
누구와는 다르게 아주 참된 인성이야.
……근데 저 말이 나를 비꼬는 건 아니겠지?
‘무도회에서 수없이 놀아 재낀 쟤랑 나랑 같겠냐. 이런 소리로 들리는 건, 내가 썩었기 때문인가?’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약혼자님이 이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서로를 위해 참석한 자리이니 만큼 부끄럼 없이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나에 대한 분노도 증오도 엿보이지 않는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약혼자님은 그저 정중하게 서로에 대한 예의만을 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스킨이 나를 보는 시선이 평온했기에.
‘……여기 오기 전에 스스로 최면이라도 했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열심히 해 주는 거였어?
뭐냐고, 사람 설레게.
속으로 뺨을 쫙쫙 때렸다.
와, 지금 나 완전 설렜어. 눈앞에 내 백 억짜리 코인이 ‘주인님 저예요!’ 외치는 것 같았다고.
“…….”
어째서인지 폭군 오빠는 이런 아스킨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가 싶더니 몸을 돌렸다.
마침 주변에 샴페인 잔이 담긴 접시를 들고 가는 시종이 지나가고 있었다.
록시디언의 손짓에 시종은 황송해하는 표정과 함께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폭군 오빠는 접시 위를 한번 훑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말고 더 큰 컵 없어?”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가져와. 여기에 있는 술 중 제일 센 걸로, 잔뜩 담아서.”
“네!”
곧이어 시종이 엄청나게 큰 컵에 포도주를 잔뜩 담아 내밀었다.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내미는 잔을 받은 록시디언은 나를 보더니 씩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뭐야, 쟤. 왜 불안하게 저렇게 웃는 거야?
날 갑자기 드레스 룸으로 데려갈 때라거나, 의상 검열을 하겠다는 말을 할 때 딱 저런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레무트 공작, 받게. 내 선물이야.”
이 새끼가!
폭군이 저 커다란 잔을 다름 아닌 아스킨에게 내민 것이다.
미쳤나 봐. 진짜.
“참으로 오랜만에 참석한 자리가 아닌가? 그대가 연회를 빛내 주어 아주 기뻐.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고.”
“폐하.”
“설마 싫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세상에, 지금 내가 보는 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회식 자리에서 ‘윤 사원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신다지?’ 하던 박 과장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개객끼야, 그 좋은 술 너나 마셔.’ 하고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며 록시디언을 노려보았다.
……저 오빠를 어떻게 족쳐야 잘 족쳤다고 소문이 나지?
‘깽판을 치랬나? 오냐, 누가 첫 희생양이 될지는 안 정했으니. 네가 되어도 불만은 없겠지.’
내가 샤를리즈의 기억을 뒤져 깽판의 역사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저녁에 업무가 남아 있어 죄송하지만 마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허락하시면 잔만 받겠습니다.”
“허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스킨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록시디언은 눈썹을 밀어 올렸다.
딱 봐도 ‘이놈 봐라?’ 하고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눈가에 도는 게 광기인지 초등학생만도 못한 심술기인지는 몰라도 더욱 깊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하하하하.”
폭군이 시원하게 웃었다.
“서쪽의 공작은 다시없을 대장부라 들었는데, 이 정도 와인 한 잔에 일을 못할 정도면 아무래도 일을 잘한다는 소문도 허풍이었던 것 같군그래?”
“송구합니다.”
폭군은 한 손에 잔을 든 채로 피식 웃었다.
남들 눈에는 잘난 얼굴일지 몰라도 내 눈엔, 한 대만 때려 주면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얄미운 미소였다.
“하지만 황제의 잔을 거절한 용기는 가상해. 다들 보고 있나?”
이 연회장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권력의 중심을 향했다.
따라서 폭군이 나를 쫓아온 이 자리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굵직한 인물들은 물론,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러 온 귀족들로 가득했다.
“그 만용에 건배!”
따라서 록시디언의 이 발언에 기다렸다는 듯 함께 외치고 와하하, 웃어넘기기 바빴다.
록시디언은 잔을 하나 집어 잔을 깔끔하게 비웠고, 주변의 무수한 귀족들 또한 제각기 잔을 들고 그대로 비웠다.
황제의 눈 밖에 날까 봐 빠짐없이 참여하는 속셈이 빤했다.
허겁지겁 마시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모두가 건배를 외치고 다들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록시디언이 아스킨에게 다시 한번 잔을 내밀었고 모두가 아스킨 앞에 내밀어진 술잔을 바라보았다.
마시라는, 은연중의 압박이 대단했다.
‘……어휴, 유치해서 못 봐주겠네.’
나는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행동만 우아했을 뿐이지 속은 부아가 치밀다 못해 빡친 상태였다.
“꼴 사납네. 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록시디언의 손에 든 잔을 가져와 그대로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셨다.
이제야 안 건데, 몸의 기억은 어디 가질 않는지 원 샷을 무리 없이 해치워 버렸다.
‘병나발 불던 솜씨 어디 안 갔나 보네. ……그럼 주량만 쓰레기로 만들어 준 거라고? 더 짜증 나.’
주변이 고요해졌다.
나는 손끝으로 입술을 타고 흐르는 포도주 방울을 훔쳤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사이에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사람을 왕따시키고 있어. 나이 먹고 할 짓이 그렇게 없나? 원 샷 해도 분이 안 풀리네.’
인상을 확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은 잽싸게 내 시선을 피했다.
누구 하나만 걸려 봐라, 하는 얼굴로 이해한 건지, 그새 얼굴이 창백해진 자도 있었다.
조금 전에 아스킨에게 압박을 주던 잘난 모습들을 충분히 본지라 불쌍하지도 않았다.
난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잔을 시종에게 내밀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각자 어떻게든 주변과 이야기를 나누러 돌아가거나 춤을 추러 돌아갔다.
록시디언이나 좀 뭐라 하려고 했더니, 록시디언마저 어느새 저 멀찍이서 나이 든 노귀족과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쯧, 속으로 혀를 찼다.
‘오…… 개지랄을 해 주려 했더니, 도망갔네?’
나의 기념비적인 첫 깽판을 꼭 저놈을 시작으로 하고 싶었는데.
설마 내가 무서워 도망갔나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였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으, 포도주 냄새.’
달짝지근한 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잔이 크긴 컸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아, 안 돼. 여기서 취하면 안 된다! 아직 할아버지랑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눴다고!
거울을 보고 싶었다.
설마하니, 지금 내 얼굴이 빨개진 건 아니겠지? 제발 잔뜩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아주 짧게 비틀거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설마, 아스킨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면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이안 차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