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194)

59화

취기가 이성의 틈으로 밀물처럼 차오르는 사이에도 저 부드러운 얼굴은 잘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잊기가 힘든 잘생긴 여우상의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비틀거리는 걸 붙잡는 의도로만 잡았다는 것을 몸소 해명하기라도 하듯 손을 금방 놓았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공녀님을 다시 뵙습니다.”

부드러운 얼굴과 잘 어울리는 정중하고 다감한 목소리를 듣자니, 조금 울컥했다.

……아니, 엉뚱한 사람의 몸에서 눈을 떴으면 저런 다정한 남자랑 좀 붙여 주지.

왜 나 싫다는 사람 꼬셔야 하는 목표나 주어져서는…….

차라리 이안 차일드 같은 남자였다면 나도 즐겁게 임했을 텐데.

아무래도 취기가 오르긴 하는 모양이었다.

이안 차일드가 내 앞에서 무어라 말했지만, 생각에 빠지느라 반은 흘려들었다.

결국 알아들은 건 마지막에 남은 핵심에 가까운 말뿐이었다.

“……해서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나는 취기도 살짝 잊고 눈을 찡그렸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이 샤를리즈에게 먼저 춤 신청을 하는 남자도 있다고?’

이 악녀의 패악 때문에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건 샤를리즈의 기억이 증명했다.

샤를리즈 또한 오만한 여자라 누군가 자기 앞에서 나대는 꼴을 보질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여기 약혼자님이라는 엄연한 파트너와 참석한 상태였다.

그걸 알고도 내게 춤을 신청한다고?

“이런 오해를 살까 미리 말씀드리자면, 조금 전부터 두 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파트너이신 레무트 공작님과는 춤을 추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이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두 분께서 약혼하신 건 세상이 다 아는데, 어찌 제가 흑심을 품겠습니까.”

“…….”

“단지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의 춤을 보지 못하고 간다면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 여우같이 가는 눈웃음과 우아한 미가 있는 잘생긴 얼굴. 거기다 덩치까지 받쳐 주는 남자의 이런 달콤한 말이라니.

웬만해선 웃으며 넘어가거나 넘어가는 척할 만한 애티튜드였다.

상대가 샤를리즈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

목소리가 무슨 심야 라디오에 나오는 DJ의 목소리처럼 설탕을 뿌린 듯 달콤한 알겠는데, 어쩌라는 거지.

나는 팔짱을 꼈다.

어째, 취기로 이성이 내려갈수록 몸의 본능과 기억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느슨하게 풀리며 절로 거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게. 이렇게 아름다운 내가 당신 같은 남자와 춤을 춰서는 모양 빠질 것 같은데?”

“……네?”

“꺼지라고.”

나는 귀를 만지며 찡그렸다.

“혀가 좀 돌아가는 모양인데 우아한 척하지 말고 저리 꺼져.”

음,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속으로 당황하긴 했지만 잘된 일이겠거니 했다.

‘어차피 춤을 출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안 차일드는 어떤 의미로 강적이었다.

쌍욕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매몰찬 거절에도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부드러이 웃으며 정중히 인사를 올렸던 것이다.

심지어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보다, 죄송하다.’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대단한 인간이네.

‘뭐 하던 사람이지?’

내 관심사는 오로지 약혼자님이었던 지라 차일드 가문이 뭐 하는 가문인지, 저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다만, 처음으로 관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게 포도주를 선물할 때 외국에서 가져온 거 운운하던 걸 보면 해외 유학파 뭐 그런 건가 싶기는 했지만.

‘외국에 있다가 온 사람이면 샤를리즈에 대한 소문을 모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긴 한데.’

……모른다기엔 좀 애매한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내 유일한 관심사인 약혼자님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원래 취한 사람은 대중이 없다더니, 생각이 무슨 탄산 거품처럼 이리저리 톡톡 튀어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옆으로 다가온 아스킨의 모습이 보였다.

“…….”

어째서인지 단정하게 꽉 묶여 있던 목장식이 다소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마치 잡아 끈 것처럼.

살짝 짜증이 인 것 같긴 했지만 시선은 사람들을 향해 있었으므로,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한다고 했나?

그 외에는 평소와는 다름없는 표정,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약혼자 역할을 해 준다고 해 놓고! 웬 놈이 나한테 껄떡대는 모습에 빈말이라도 대거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예의상이라도 어? 손을 딱! 잡고, 이 여자는 내 약혼녀입니다. 어? 좋잖아!’

젠장, 내가 바랄 걸 바라야지.

속으로 억울해하면서도 한껏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스킨과 눈이 마주친 순간 원망을 담아 노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봐…… 너.”

“공녀님!”

아스킨이 무어라 했나?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하이 톤의 목소리가 나를 잡아 끌었다.

반쯤 불쾌함을 담아 시선을 돌리면, 이쪽으로 우르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면면들이 익숙했고,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더욱 익숙한 영애였다.

‘개망나니 클럽이잖아?’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폭군에 할아버지가 내정한 다음 약혼자 후보에, 이번엔 개망나니 무리까지?

내가 사납게 노려보자, 이들이 다가오다 말고 주춤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주춤주춤 다가오다가 결국은 내 앞에 인사를 올렸다.

“공녀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이에요.”

“…….”

“너어무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저도요!”

“…….”

그녀들이 무어라 하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망나니 무리들이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아직 아스킨은 결혼 발표 소식을 모르지?

‘이 여자들이 헛소리라도 한다면……!’

난 창백해졌다. 이 자리는 당장 파투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이리 생각할수록 내 얼굴은 더욱 굳어만 가고 싸늘해졌다.

망나니 모임 영애들의 얼굴 위로 잘못 걸렸다는 표정이 스쳤다.

오냐, 댁들 입 잘못 놀리면 오늘 첫 희생양이 될 거야. 혀 간수 잘해.

이제 숫제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내 시선에 개중 기가 약한 영애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이렇게 표정을 굳히면서도 연신 아스킨 쪽을 바라보기 바빴다.

만에 하나 이 망나니 영애들이 혹시라도 헛소리를 하면 얼른 반응을 확인 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스킨은 이런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쳐다볼수록 점차 표정이 굳었다.

짜증? 아니, 아니었다.

놀랍게도 미묘한 난감함이었다.

‘난감?’

그는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쪽에 오랜만에 보는 스승격의 노장군이 계시더군. 그쪽에 인사를 드리고 오겠다.”

안면이 있는 귀족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아예 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나는 황당했다. 방금 표정은 뭐였지?

보통의 약혼 관계라면 내가 친구들이랑 편히 놀라고 자리를 비워 준 걸 테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고.

‘설마, 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아니야, 알아차렸으면 이런 반응일 리 없지.

‘당장 박차고 나갔으면 모를까.’

그럼 왜 떠난 건데? 다른 놈이 춤 신청하는 데도 가만히 있었다고 뭐라 하지도 않았잖아?

설마 좀 노려봤다고 떠난 건 아니겠지? 끙, 아니지. 지후야, 이건 네 실책 아니냐?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 주변을 가득 메운 망나니 모임 영애들은 어째서인지 나를 보며 찔끔 겁을 내면서도 떠나질 않았다.

가뜩이나 취기가 오르는 중이었다.

본디 취기가 오르면 감각이 둔해져야 할 텐데, 마치 두통이 올 것같이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 덕에 이들의 말이 겹쳐 들리는 동시에 더욱 잘 들렸다.

“세상에, 공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이 말은 꼭 드리고 싶었어요.”

“입장하신 순간에 정말, 여신께서 강림하셨나 싶었다니까요.”

그녀들은 순진을 가장해 재잘재잘 떠들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 중에서 붉은색 계열이나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계열의 옷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저택을 방문했던 인물들 중에서 핵심 멤버 몇몇이 빠졌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나랑 약간이라도 비슷한 색을 걸쳐서 도망간 건가?’

잘된 일이었다.

지금 없는 사람 중에 꽤 성가신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옷 색으로 시비 걸 생각은 없었지만, 록시디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없는 패악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이들 중에서 선을 넘는 이가 있으면 오늘만큼은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무트 공작님께서 걸친 옷도 보았는데, 맞죠?”

“그러니까요! 저도 너무 궁금했어요.”

뭐가 맞다는 거야?

“두 분께서 의상을 맞추신 거요! 정말이지 너무나도 잘 어울리세요.”

“맞아 맞아, 의상의 색과 상징, 원단까지 맞추셨던데……. 혹시 원단은 어디 걸까요?”

“사파이어는 어느 지역의 것을 사용하셨는지도, 여쭤봐도 될까요?”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는 아직까지는 내 신경 줄을 긁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고, 이는 곧바로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결혼 발표는 언제 하시는 건가요?”

누군가가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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