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194)

60화

나는 참지 않고 시선을 홱 돌렸다.

내 시선을 받은 영애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하하하, 피란카 백작 영애가 아주 궁금했나 봐요.”

“그러게, 당연한 걸 왜 묻는 거람. 당연히 오늘 내엔 발표하시겠죠! 저, 공녀님 혹시 오늘 연회에 2부가 있는 걸까요?”

“어머 어머, 폐하께서도 있는 자리에서 발표되나요?”

나머지 영애들은 결혼 발표를 꺼낸 영애를 타박하면서 내게 최고로 아름답고 오늘의 주인공인 공녀님 화내지 마시라며, 예쁜 색의 술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동시에 내게 은근히 우회해서 물었다.

‘여기서 답을 안 해도 이상하고, 긍정을 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인데.’

나는 이 질문들을 어떻게 탈출할까 고민하다가 망나니들이 내미는 술을 받아 쭉 마셨다.

마시는 동안에 그녀들은 꼼짝 않고 나를 보기 바빴다.

샤를리즈가 술을 마실 때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려선 안 된다는 불문율을 알기 때문이었다.

먹을 땐 개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던가.

샤를리즈의 경우는 ‘술’로 대체했다.

술을 마실 때만큼은 친분이 있던 자라도 건드린 순간 패악질로 보답하는 술꾼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골고루 하는 악녀다 싶었다.

‘정말 가지가지 했네.’

그러나 샤를리즈의 버릇에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술을 마셨다.

다행히도 도수가 처음 마신 것보다는 높지 않았다.

영애들은 벌컥벌컥 마시기 바쁜 나를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이 망나니들을 어떡하면 계속 잠재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한 존재가 떠올랐다.

바로 ‘샤를리즈’가 기르던 괴물개의 존재였다. 이름이 ‘테리’였던가?

“……요즘, 우리 ‘테리’를 보지 못했네.”

통한 걸까. 내 살벌한 시선을 느낀 건지, 망나니 영애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도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못했다.

‘말 걸기만 해 봐라. 그 사람이 오늘 첫 타자가 될 줄 알아라.’

* * *

같은 시간.

아스킨은 속으로 한숨을 참아 넘기기 바빴다.

조금 전부터 불쾌한 생각과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작게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작은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의 주제가 패악질 가득한 자신의 약혼자라는 점에서 그의 기분은 갈수록 저조해졌다.

왜냐, 그는 아주 잠깐 그녀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한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일을 당했던가.

사람들은 그를 향해 공작의 긍지 따위는 저버린 샤를리즈의 개라고 조롱했다.

그런 조롱이 터져 나와도 마땅한 모욕과 치욕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말도 안 되는군.’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이 깊어 보이는 군. 고민이 있나?”

굵직하고 나이 든 목소리에 아스킨이 퍼뜩 정신이 차렸다.

얼굴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아스킨은 살짝 당황했다.

눈앞에는 뼈가 굵고 덩치가 큰 노인이 있었다.

풍채가 좋은 노인은 조금 전까지 아스킨의 대화 상대이자, 그가 샤를리즈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하게 된 대상이었다.

샤를리즈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단 건 핑계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눈앞 노인의 이름은 ‘웨어우드 프레보스트’.

지금은 은퇴했으나 1년 전까지 제국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대장군이었다.

“고민이 있을 때 눈썹에 티가 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리고 아스킨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가 황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직위와 상관없이 존칭을 사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껄껄, 아닐세. 버릇이라고 해 봐야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나나 알아볼 버릇 아닌가?”

프레보스트 후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장군직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가문인 프레보스트 후작가 영지로 돌아가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아리아 걱정인 게냐? 요즘 그 아이 상태는 어떻지?”

“아닙니다. 아리아는 다행히 최근에 건강합니다.”

프레보스트 후작은 황제의 부름으로 1년 만에 수도로 올라와 오늘 연회에 참석했다.

덕분에 제자인 아스킨과도 오랜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아리아의 소식을 접할 수는 없으리라.

“레무트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자작.”

프레보스트 후작의 아들이 아스킨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스킨은 함께 수학한 동기라고 할 수 있는 프레보스트 자작에게도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래서 공작은 무슨 일로 그리 고민이 깊습니까?”

“……고민은 없습니다.”

“허허, 공작의 부친이자 제 오랜 친우인 선대 공작의 유언으로 잠시 공작을 제자로 받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땐,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던 애송이였는데 말일세.”

프레보스트 후작이 아스킨의 얼굴을 훑었다.

노인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어린 시절에는 작은 일에도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던 소년이었다.

이제 장성한 레무트 공작은 오랜 스승인 그만이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뿐. 평온을 가장하는데 익숙해 보였다.

“이제는 고집을 꺾고 알츠베이트의 사람이 되기로 한 건가?”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아스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흐음, 결혼하는 건 아닌가 보지?”

프레보스트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자한 듯 호탕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아스킨의 면면을 살피는 눈이었다.

“결혼하는 순간 레무트가 알츠베이트에 잡아먹혀 영원히 이름과 역사를 잃는 걸 모르지는 않는 것 같고.”

“…….”

“그럼 왜 그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는 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느냐?”

“…….”

“왜, 힘든 처지의 너를 돕기는커녕 너도 버리고 은둔하러 간 스승이라 미워서 말하기 싫으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레보스트 후작이 아스킨과 함께했던 건 19살까지였다.

20살의 아스킨은 오늘날 위대한 육로라 일컬어지는 ‘옐로우 로드’를 개척했다.

당연히 어린 아스킨의 위상은 올라갔다.

동시에 프레보스트 후작은 10년 전부터 이미 군수 최고 사령관이었다.

두 사람의 합일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

사제는 황실에 대한 충성이 지극한 충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게다가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프레보스트 후작은 대단한 위치에 비해 가문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 자리에 올라간 것치고는 가난했다.

해 먹은 게 없다는 소리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렇게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아스킨은 프레보스트 후작을 존경했다.

그렇기에 아스킨이 재정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스승이 자신을 돕지 못한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후작께서 저를 도왔다면 퍼졌을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청렴하게 살아왔다는 건, 적이 많다는 소리다.

권력자는 올바른 소리를 할수록 적을 만든다.

프레보스트 후작이 아스킨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알츠베이트 가문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알츠베이트는 두 가문의 협력을 보고서 충분히 반역으로 몰아갈 수 있는 가문이었다.

귀족파는 대대로 프레보스트를 시기하고 미워했기에 귀족파의 수장인 알츠베이트가 이끈다면 능히 두 가문을 엮어 괴롭힐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편지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스킨은 프레보스트 후작을 원망하지 않았다.

“쯧, 나는 올곧은 놈은 안 좋아해.”

“……그렇습니까?”

“그래. 나처럼 사는 놈을 왜 좋아해? 결국 꼴이 이럴 텐데.”

프레보스트 후작이 쯧쯧, 혀를 차면서도 뿌듯한 눈으로 아스킨을 보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후작은 힘든 길을 걷되, 신념을 유지하는 제자가 기특했다.

‘……그 악독한 자들과 엮이지만 않았다면.’

아스킨은 얼마든지 정의롭지 못한 일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킨이 택한 것은, 자기 하나만 희생하면 되는 선택지였다.

제자는 신념을 지키고 여동생의 치료비를 정당히 마련하기 위해 저를 공녀에게 팔아넘겼다.

“……진지하게 물으마. 무슨 생각으로 오늘 함께 입장한 게냐?”

프레보스트 후작이 옆에 있던 아들, 프레보스트 자작에게 눈짓했다.

프레보스트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약하게 마나를 일으켰다.

자작은 마법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도움이 필요하느냐?”

“필요하다면 꼭 도움을 주실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럴 작정이다. 내가 쉽게 입을 열 인간이더냐?”

“…….”

아스킨이 살짝 놀랐다.

“내 아무리 은둔했어도 완전히 귀를 닫지는 않았어. 분명 알츠베이트 공녀가 너를 장난감처럼 다뤘다는 소식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신념 있게 이겨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프레보스트 자작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이제는 휘둘리다 못해, 궁지에 몰려 참석하게 된 거라면.”

“……스승님.”

“이 늙은이가 단 한 번은 신념을 배신한 선택을 할 수 있단 얘기다.”

“어찌 하시려 그러십니까?”

“알츠베이트 놈이랑 거래할까 싶다. 내가 대장군으로 살면서 치명적인 비리 하나 손에 안 쥐고 있었겠느냐?”

하지만 프레보스트 후작은 황제의 명 없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사사로이 이용하는 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를 드러내면 프레보스트 후작가도 위험해졌다.

아스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오늘은…… 제가 약조했기 때문에 참석한 겁니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아스킨은 돈을 갚을 길을 찾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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