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194)

62화

당연히 아니었다. 아스킨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짧지만 단호한 의사였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 참석한 것뿐.”

“그렇군요. 맞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사정이 있는 것이지요.”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아스킨의 옷차림을 슬쩍 보았다.

마치 그 사정에는 굳이 오붓한 연인처럼 보일 커플 의상을 입고 온 것도 해당되는 듯한 비아냥거림이었다.

아스킨의 얼굴이 굳었다.

“한 가지만 묻지.”

아스킨의 입이 떨어졌다.

이안의 일련의 행동이나 태도,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우리 거래에 추가 조항이 붙게 된 이유가 혹시 알츠베이트 공녀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인가?”

듣는 귀가 있었기에, ‘파혼’을 언급하지 않고 교묘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파혼을 넣은 이유가 그 여자에게 관심 있어서냐는 말은 충분히 잘 전달된 듯했다.

이안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오묘한 색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휘었다.

“관심 있는 것은 맞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관심 때문에 그러한 조항을 넣은 것은 아닙니다.”

내용 때문에 목소리를 낮췄지만 단조롭고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저는 어느 분과는 다르게 공과 사는 구분하는 편입니다. 거래와 협상에서는, 이것이 기본 아니겠습니까?”

이안은 우아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지나가는 시종의 접시 위에서 잔을 두 개 들어 올렸다.

“공작님께서 부디 제 순수한 뜻을 알아주시리라 믿어 보며, 공작님께서 뜻을 펼치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스킨의 손에 금전을 모두 넘기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이거나, 열심히 그 돈을 준비 중이거나 이동 중이란 소리였다.

어느 쪽이든 아스킨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찌푸리면서도 이안이 내민 술을 받았다.

평상시라면 절대 먹지 않을 술이었다.

그러나 아스킨은 조금 전부터 슬쩍 울렁이는 속을 느꼈다.

멀미 같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쌓여 온 혼란이 이제는 심장까지 침범한 것이 틀림없었다.

감히 록시디언 앞에서 술잔을 거부할 때는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이번 연회에서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란이 침범해 이것으로라도 가라앉히고 싶었다.

샤를리즈 알츠베이트, 너는 어떤 사람이지?

최근에 그의 심기를 어지럽힌 사람이 자꾸만 생각났다.

왜, 최근에 이상한 행동을 했지?

‘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불쌍한 꼴을 보이냔 말이다.’

과거는 잊지 않는다.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리아에게 말했듯 그의 신념은 언제나 현재를 바라보자는 주의였다.

그럼 현재를 보면, 샤를리즈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아스킨이 술잔을 털어 넣었을 때였다.

“연회에 있는 친애하는 모든 귀족들에게 알리오.”

익숙하고도 불쾌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그의 귀뿐만이 아니었다.

노회한 귀족의 목소리에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와 눈이 반응했다.

“잠시 주목해 주겠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하니, 언제 가져다 둔 것인지 황금으로 된 간이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선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짓에 연회장을 울리는 음악이 꺼졌다.

“여기서 주요한 발표를 하려 하오.”

막 샤를리즈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아스킨은, 묘하게도 불쾌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불안’에 가까운 것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씩, 고아하게 웃었다.

뱀을 연상시키는 웃음이었다.

* * *

“주요한 이야기에 앞서…… 황제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음악이 멈춘다. 모두가 두리번거리다 말고 중앙에 선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연주자들이 있는 자리에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곳은 바닥보다 약간 층이 높았고 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모를 황금으로 된 단상을 가져다 두었기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황제와 황족을 위한 저 계단 위에는 오를 수 없기에 직접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저 황금으로 떡칠된 단상은 할아버지의 탐욕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망나니 영애들은 이게 뭘 위한 자리임을 눈치챈 건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치뜨며 나와 할아버지 쪽을 흘긋대기 바빴다.

“요즘 황제 폐하 덕분에 제국에 활기가 넘치기 그지없습니다. 제국민들은 폐하의 은혜에 존경을 외치며 농업과 상업 등 생업에 즐거이 임하고 있고, 저희 귀족들 역시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 제국의 안녕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있지요.”

할아버지의 입은 버터라도 바른 듯 돌아갔다.

나는 황급히 록시디언을 찾았다.

폭군 오빠, 폭군 오빠라면 이 상황이 거슬려서라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실로 성군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멀지 않은 곳에서 폭군 오빠를 찾아냈을 때, 나는 절망을 먼저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의자에 앉아 있는 록시디언, 분명 거슬려 하며 분노할 줄 알았던 그가 재밌다는 듯이 네 맘대로 해 보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 돼, 안 돼. 저걸 선언하면……!’

심장을 부여잡았다.

당장이라도 재빨리 달려가서 말리고 싶었지만.

방금 들이켠 술이 도수 낮은 술이라 해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술이 들어간 상태였다.

‘아아……!’

술기운에 움직이는 팔과 다리는 너무나도 느렸다.

오히려 휘청거리며 어슬렁어슬렁 이동하는 꼴이었다.

누가 봐도 잔뜩 취한 내 몰골에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던 귀족들은 화들짝 놀라 나를 피하기 급급했다.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샤를리즈 경보였다.

덕분에 사람들을 헤치고 갈 일 없이 길이 뻥뻥 뚫렸지만 내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러나 할아버지도 하늘도 내 편이 아니었다.

“오늘은 제국에 아주 중요한 날이오. 여신께서 우리 제국에 축복을 내려 주며 이를 기념하는 숭고한 날. 이런 날 더 좋은 소식을 알릴 수 있게 되어 더없이 영광이외다.”

이 자리의 반절은 할아버지를 따르는 귀족파였다.

그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할아버지처럼 욕심에 차 있거나 할아버지를 존경 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망할 수는 없어! 내 코인! 내 돈! 내 진짜 삶!

“오늘로 기쁘디기쁜 소식을 선언하오!”

귀로 끔찍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끔찍이도 아끼는 나의 손녀 샤를리즈가 늠름한 약혼자인 레무트 공작과 드디어 결실을 맞이하게 되었다오. 오는 가을, 이 아름다운 연인은 결실을 맺어 성대한 혼인식을 올릴 예정이외다!”

땅땅땅. 선언이 내려진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못 막았다.’

지끈지끈, 심장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취기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참을 수 있는 단계였지만 점차 커질 것이란 공포가 앞섰다.

나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아냐, 아냐. 파혼은 바로 실행할 수 없어.

이미 타 버린 집,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남은 물이라도 챙겨야 한다!

그래, 얼른 약혼자님에게 달려가서 저건 할아버지의 독단이고 나는 절대 그런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그럼 화는 내겠지. 또 날 믿지 않을 거야. 무슨 꿍꿍이냐고 하겠지?

그럼 나는, 다시 설득하고.

‘물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왜일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힘들어야 해?’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 * *

알츠베이트 공작의 선언이 떨어지는 순간 록시디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X발. 저게 무슨 개소리야.’

어찌나 세찬 움직임이었는지, 의자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근처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황제파 귀족들이 놀라 흠칫 떨거나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들의 두려움은 찰나로 끝나지 않았다.

록시디언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폐하.”

주위를 환기하는 노아의 목소리에 록시디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다행스럽게 폭주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 그 쭉정이랑 내 동생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그 멍청한 여동생의 반려는 내가 고를 거다.

권력 욕심도 없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 돈이 많은 자.

아니, 돈 따위 많지 않아도 된다.

저 여동생의 사치는 오라비인 제가 평생 채워 줄 테니까.

알츠베이크 공작, 저 탐욕스러운 자가 레무트 공작가를 삼키기 위한 도구로 샤를리즈를 써먹는 것인 줄 모를 것 같은가.

오래전 딸을 팔아치운 자는 이제 권력을 위해 손녀마저 팔아치우려는 심산이었다.

록시디언은 당장 이 말도 안 되는 쇼를 멈추고 그 선언 또한 무효로 돌리려 했다.

그렇기에 분노로 가득한 표정으로 성큼 걸어가기 전에 소리부터 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록시디언보다도 먼저 나선 자가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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