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194)

63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마법을 건 알츠베이트 공작의 목소리만큼이나 이토록 쩌렁쩌렁 울릴 수 있었던 건, 그가 자신이 가진 ‘오러’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검에 통달한 자는 세 손가락에 꼽았다.

그중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

아스킨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이뿐 아니라 성큼성큼 알츠베이트 공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분노에 찬 것인지,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남녀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아스킨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 혼인에 동의하지 않았다. 분명 거절한 제안이다.”

“이런……. 레무트 공작?”

마침내 알츠베이트 공작 앞에 다다른 아스킨이 고요한 분노를 토해 냈다.

공기를 할퀴듯이 사나운 기색에 검을 배운 자조차 움츠릴 정도였다.

그러나 알츠베이트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노회한 미소였다.

“이렇게 말이 달라지면 안 되지. 약혼이란 무엇인가. 결혼을 상정한 계약. 그러니 그대는 이미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지. 아니면 그대가 손수 동의한 약혼이 아니라고 할 셈인가?”

“난, 결혼에 동의한 적 없다.”

“그럼 그대 여동생을 위해 손을 벌렸던 그날, 약혼을 약조했던 말들은 거짓이었나? 약속을 지키기 싫어 이런 깽판을 치는 건 곤란한데.”

“…….”

“그대가 최고로 치는 정의와 신념이란 것이 참 아무것도 아닌가 보군.”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조롱이었다. 비아냥거림이었다.

아스킨은 조롱도 비아냥도 괜찮았다.

이미 익숙한 일이다.

아리아를 살리기 위해서 아스킨은 도덕에 어긋나지 않는 선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자기 자신을 팔아 치울 때부터 이런 조롱은 각오했다.

“그대가 결혼 외에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나?”

“…….”

우스웠다. 왜?

그는 이 순간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가.

누구에게?

아스킨은 돌아볼 수 있었다.

돌아서서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가 찾는 여자는 신이 과분한 사랑을 주다 못해 퍼부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지독한 악취가 나는 악독함을 아름다움으로 가려 버리곤 하던 여자였다.

찾아내는 게 무엇이 어려울까.

그러나 아스킨은 그러지 않았다.

“그건, 알츠베이트 공녀도 동의한 일인가?”

“물론이네. 내가 손녀의 동의도 없이 일을 처리할 것 같은가?”

아스킨은 돌아보지 않기로 생각했다.

내가 틀린 거야.

그는 비록 자신을 알츠베이트에 팔았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자신이 선택한 모든 길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자신의 정의와 신념은 지켜 왔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달라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새빨간 거짓인 줄도 모르고.

“나는, 동의한 적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알트베이트에게 주는 배려이며, 어디 그렇게 결혼을 외쳐 보도록 하게.”

“…….”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스킨의 망토 자락이 펄럭였다.

그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아스킨이 내뿜는 기세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이대로 결혼은 하지 않겠다?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군. 내 돈은 어쩔 생각이지?”

“갚겠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어떻게? 대놓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비웃음이었다.

아스킨은 그런 비웃음과 비아냥 가득한 태도에도 태연했다.

아니, 그를 둘러싼 기운만은 더욱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아스킨은 바닥을 쩍 갈라놓는 발자욱을 남긴 채 몸을 돌려 그대로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엄청난 퇴장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다가설 때처럼, 퇴장하는 걸음걸음마다 꾹 참은 분노를 알리듯 바닥이 움푹 파였다.

‘……실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았다. 아니, 새삼 깨달았다.

방금 사라진 자가 제국 최강의 검사라는 것을.

그러나 아픈 가족으로 인해 본인과 가문의 운명이 함께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이 순간 지옥에 빠진 불행한 사내가 되었단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흐음.’

록시디언은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아스킨이 빠져나간 연회장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이제 록시디언이 다음으로 참았던 화를 토해 내든, 아니면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황제로서 다스려야 할 때였다.

그의 붉은색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마치 먹이를 찾는 짐승과도 같은 시선이었다.

‘……화를 낼 필요가 없어졌나?’

오히려 잘된 일이네.

록시디언은 샤를리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사태를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동생아, 네가 내린 결정이 궁금하구나.

록시디언이 차가운 조소를 띠었다.

* * *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주저앉아 앞만 바라보는 동안, 누군가 내 근처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안색을 살피거나 괜찮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곁눈질에 보이는 사람들은 망나니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이 눈치를 보며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한 건지, 이런 상황에도 취하다니 대단하다는 식의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시선을 돌리면 누가 말한 건지 알 수 없어도 내가 바라본 쪽이 고요해지긴 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공녀님, 취하신 것 같죠?”

“이러다 주무시지 않을까요?”

“쉿. 조용히 하세요.”

샤를리즈의 술버릇은 다양했지만, 가끔 이렇게 먼저 주저앉아 곧 잠이 드는 적도 있었다.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수군거림이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세상에, 결국엔 공작이 팔려 가네요?”

“뭐. 도리가 있겠소. 망한 집안인데.”

“저 같으면 얼굴 예쁘겠다, 나한테 매달리기까지? 당장 결혼하고도 남았습니다. 솔직히 공녀님께서 얼굴이나 크흠, 여러모로…….”

“어휴, 경은 그 성격을 감당하시겠다고요?”

“저렇게 예쁘고 돈 많으면, 기는 게 문제겠습니까? 애초에 레무트 공작이 뻣뻣할 이유가 뭐가 있어.”

기이하게도 감각이 극대화되기라도 하는지,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잘 들렸다.

속으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만 알던 남자니까 쓰임을 다한 공녀님을 버리려는 거죠.”

“어머나, 공녀님 가엾어라…….”

그 남자와 내가 결혼한다는데, 모든 욕은…… 그 남자가 먹고 있었다.

“내기하자고요?”

“좋아요, 좋아요. 어디에 걸 건데요?”

“저는 레무트 공작에게 여자가 있다로요.”

유희라도 되는 듯 내기마저 거는 자들.

그를 주동하는 건 다름 아닌 망나니 영애들 무리였다.

“아니면…… 저는 반대로 레무트 공작이 긴긴 시간 끝에, 공녀님을 조련하다가 결국 돈만 먹고 팽하려 드는 것이, 꺄악!”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돈만 먹고 팽하려던 거 아니냐고 쑥덕거리던 망나니 중 하나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쳤다.

영애가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손맛이 익숙하네.’

그저 잡아야겠다 생각했을 뿐인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몸에 새겨진 기억이었다.

“일어나.”

“……고, 공녀님?”

“일어나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망나니 영애의 뺨을 갈겨 버렸다.

이 또한 몸의 기억이 수월하게 해결해 주었다.

난 손을 쥐었다가 폈다.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더 해 봐.”

이상하게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도 몸이 이렇게 움직여졌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멈춰 서 있던 시종의 접시 위에서 잔을 휘휘 돌리며 입에 살짝 머금었다.

“더 해 보라니까? 재밌던데.”

포도주를 망나니 영애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다.

다음엔 뭘 할까. 머릿속에 기억이 넘쳐흘렀다.

“네 머리카락 참 예쁘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잘못했어요. 자, 잘못.”

“응?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니. 네 머리카락 예쁘다니까?”

나는 입을 가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네 손으로 잘라 봐.”

* * *

간드러진 샤를리즈의 목소리에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다들 놀란 동시에 안도감을 표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드디어 저 악녀가 돌아와 본색을 드러냈다.

첫 희생자가 나왔고 그것이 자신이 아니란 점에 안도할 뿐이었다.

샤를리즈의 패악은 논리가 없었기에 다들 이유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 해? 무시해? 멋대로 떠들 때처럼 말하면 되잖니?”

“고, 공녀님.”

“대답하라고.”

샤를리즈가 사르르 웃었다. 그녀의 가냘픈 손이 휙 움직이며 잔을 던졌다.

정확히 쓰러진 망나니 영애 옆에서 깨졌다.

그사이 황실 기사들이 샤를리즈를 말리고자 록시디언 쪽을 보았다.

록시디언은 느릿하게 응시하며 기사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꺄악!”

샤를리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뭔데 내 약혼자를 판단해.”

샤를리즈의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이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했다.

시선을 받은 자들이 흠칫했다.

신이 만든 걸작이라 표현해도 무색할 만큼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자,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위압마저 느껴졌다.

“너네가 뭔데 내 약혼자를 판단하느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