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194)

64화

샤를리즈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긋지긋했다.

그저 가만히만 있었어도 잘 해결될 일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꼴을 보는 기분이란, 샤를리즈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XX. 이제 다 망한 거지 뭐.’

이대로는 망나니 영애에게 분풀이 해 봐야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패악을 멈춘 건 이대로 있어 봐야, 록시디언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배알이 꼴렸다.

게다가 더 해 봐야 알츠베이트 공작 손에 공작저로 끌려가지 않겠는가?

샤를리즈의 눈으로 눈웃음이 스쳤다.

‘다 똑같은 것들.’

마주친 남성들이 하나같이 두려움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알츠베이트 공작도 록시디언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망했다는 생각으로 돌아서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연회장 중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얼음 조각 장식이 올려져 있던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장식물이나 간단한 다과가 놓여 있었다.

쨍그랑!

샤를리즈는 뒤늦게 다시 도는 취기에 못 이겨 테이블에 부딪쳤다.

엉망진창으로 깨져 버린 얼음 조각은 현재 샤를리즈의 머릿속이자 마음 상태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샤를리즈가 짜증에 못 이겨 조각상을 무너트린 것으로 보였다.

샤를리즈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아픔도 뒤로 하고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초토화 됐던 연회장 분위기 속 누군가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크게 사고를 치지 않으시네요?’

‘어머, 모르세요? 저 얼음 조각 가격이 ……이에요!’

‘……네? 세상에. 저걸.’

‘저는 이 뒤에 공녀님 호위 기사들이 저 영애를 데려가지 않을까 싶은데.’

‘쯧, 또 한 가문이 딸을 잃겠군요.’

모두가 눈치를 보며 쑥덕거리기 바빴다.

샤를리즈가 마지막에 무너트린 얼음 조각의 가격이 알려지며,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노아는 록시디언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공녀님을 쫓아갈까요?”

노아는 보았다. 얼음 조각이 깨지기 전 샤를리즈가 고통에 순간 비틀거리던 모습을.

아픔을 참고 쾅쾅 걸어가는 모습이 정말 그 악녀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왜 전과 다르게 보일까. 이전과 다르게 신경이 쓰였다.

“아니, 놔둬.”

록시디언은 샤를리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노아는 그런 록시디언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졌다.

록시디언의 표정에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쁨이 언뜻 보이다가도 염려와 분노가 스쳤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노아, 조만간 샤를리즈를 황실로 입적시킬 것이니 준비해.”

“……네?”

갑작스럽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노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던 알츠베이트 쪽을 보았다가 다시 록시디언에게로 돌아왔다.

“…….”

당황스러웠지만, 록시디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몹시도 진지했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샤를리즈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짓궂게 웃거나 장난스럽던 얼굴과는 확연히 달랐다.

“걔가 저 꼴을 보고도 알츠베이트에 있겠냐?”

“…….”

“지금 당장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내가 저 틈을 더 벌린다면?”

록시디언의 말에 노아는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실과 알츠베이트. 두 대표 세력 중 어느 쪽도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탓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연회장 속.

록시디언과 알츠베이트 공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록시디언은 나른한 듯 오만한 시선으로 알츠베이트 공작을 응시했다.

‘쯧, 제 할아비를 향한 공경도 없는 건방진 놈 같으니…….’

알츠베이트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록시디언은 샤를리즈와 마찬가지로 제 안에 있던 아주 귀중한 도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특출하던 록시디언은 순식간에 벗어나 버렸다.

황실마저 손에 쥐려 했던 공작에게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저 젊은 황제가 공작이 가장 아끼는 손녀,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패를 탐내는 거라면 달랐다.

이미 그 순간 황제는 적이었다.

한참을 서로 노려보던 두 사람의 대치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끝났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제 부와 권력은 황실 부럽지 않거늘, 이렇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돌아간다.”

오늘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이 연회에 더 남을 이유는 없었다.

어두운 황실 복도를 걷는 동안, 알츠베이트 공작의 부관이 조심스럽게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저, 공작님.”

부관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호위를 보내 공녀님을 모셔 와야 할까요?”

샤를리즈가 멋대로 떠나 버렸다. 분명 어디든 가서 패악을 떨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둬. 무슨 사고를 치든 나중에 알아서 수습하고.”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사고를 치긴 했으나 그건 타이르면 될 일.

샤를리즈가 벌이는 사고는 추후 그녀가 가져다 줄 이득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사람이 고문당하거나 죽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펼칠 커다란 대의 앞에서 평민이나 하급 귀족 몇 죽는 게 뭐 대수겠나?

“아, 그리고…… 공녀님과 레무트 공작은 이제 파혼하는 것입니까?”

알츠베이트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로 한심함이 떠올랐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보좌라는 자가 이렇게 멍청해서 쓰겠나?”

“……죄송합니다.”

“레무트, 그놈이 뻔뻔하게 반항한 이유는 하나지.”

공작의 주름진 얼굴로 비웃음이 스쳤다.

“돈을 갚을 길을 찾았겠지.”

어둑한 복도,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이 그보다 더 어둡게 빛을 발했다.

“놈이 돈을 빌려온다는 정보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또한 어느 가문의 돈인지도 알고 있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로는 비열하면서도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혼인 공표에 놈이 반발한 건 결국 내 손녀에게 모욕을 주는 일이나 다름없지.”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손녀에게 망신을 주었단 게 무슨 뜻이겠는가.

딱히 유쾌한 사실은 아니지만 황제의 여동생을 모욕한 것이다.

레무트 공작은 더욱 우아하고 귀족적으로 대처할 줄 알아야 했다.

‘소양 부족. 애송이 따위가.’

그렇기에 그놈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곧 알츠베이트 가문 아래로 들어올 것이다.

“돈을 빌려주겠다던 가문은 중도파인 척 가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황제파 귀족이다. 한데, 감히 황제의 여동생에게 망신을 준 놈에게 돈을 빌려주겠느냐?”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 분명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빌리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놈은 이미 갚겠다고 큰소리 쳤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으로 승리감이 떠올랐다.

레무트 공작의 반항이 괘씸하나 그놈이 무슨 수로 그 돈을 갚겠나?

“내 외손녀에게 모욕을 주었으니, 이번엔 그놈의…… 영지라도 빼앗아 볼까.”

아니, 영지마저 빼앗을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 돈과 가문의 명예를 빼앗긴 자. 그 이름 레무트이니.

이제 영지마저 잃는다면…… 가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철저히 부숴버려야지.’

레무트는 옐로우 로드와 이어지는 영지.

그 자리에는 이름도 드높은 알츠베이트의 깃발을 꽂히리라.

알츠베이트 공작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쏴아아아-!

장대 같은 비였다.

나는 화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 바빴다.

비가 내리든 말든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다.

우산?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걸을수록 푹 젖은 드레스가 무거워졌지만 이따위에 져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원해서 취한 것이 아닌 몸도, 무거워지는 드레스도, 달라붙는 머리카락도 모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으려니 차라리 정신이 시원해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망했는데, 이제 어떡하지?’

한참을 걸어가는데, 저 앞에 앞서가는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아스킨 레무트였으니까.

욱하는 마음에 그냥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까 싶었지만.

마차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이대로는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나는 원하지 않았어. 결혼 따위.’

난 결국 성큼성큼 따라가서 아스킨의 팔을 붙잡았다.

탁!

붙잡는 동시에, 손이 거칠게 나를 뿌리쳤다.

세찬 빗속 내 몸이 사정없이 흔들릴 정도로 억센 힘이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남자 안에서 내가 이 정도 존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내 얘기 좀 들어 봐.”

하지만 내가 이 몸에서 눈을 뜨고, 내가 샤를리즈였던 동안에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네가 알아줘야 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들어 줘.

나는 정말로…… 노력했단 말이야.

아스킨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허탈했다.

다시 한번 잡으려 손을 뻗자, 그제야 사납게 얼굴을 돌렸다.

비로 젖은 얼굴이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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