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움찔할 정도로 거대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놀랍군. 지금까지 모든 일들을 꾸민 이유가 이러고자 함이었나?”
“아냐, 잠시만, 정말 정말로 잠시라도 좋아. 한마디만 들어 봐!”
“더 이상 네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귀를 마구 때렸다.
나는 허탈하게,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는 내 얘기를 들어 준 적이라도 있니?”
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의무는 없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제발 들어 줘. 나는, 정말로 노력했어.
비가 오는 것에 감사했다.
뺨을 때리는 빗줄기가 끝내 흐르고 만 따뜻한 물줄기를 가려 줄 테니까.
“할아버지가…… 이렇게 일을 처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믿을 수 없이 가냘픈 음성이 흘러나갔다. 아스킨이 짧은 순간 멈칫했다.
“……네 집안은 항상 내 상상력을 뛰어 넘는 행동만 했기에 오늘 일이 그리 놀랍지도 않다.”
거짓말, 화났잖아. 놀랍지 않은데 어떻게 화를 내?
나는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스킨은 내가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군. 이제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 진짜 파혼하면 되겠어.”
비 때문일까.
저 남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서릿발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욱신욱신.
저 남자가 진심이라는 건 고통스러운 심장의 아픔이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나도 억울해, 네게 이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는 것 알기에 하지 않을 거지만.
나는 정말로, 정말……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내가 여전히 악독하게 보였어?
“나는 너한테 잘 보이려 빚까지 내 가며 널 도왔는데! 내가 변한 모습을 보여 줄 기회 한번 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어?”
내 목소리가 비를 뚫고 처절하게 퍼져 나갔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너 잘났어. 정말 잘났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이제 저 남자가 무슨 표정을 하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 뭐, 언제나처럼 내가 개소리를 한다는 듯 차갑게 쳐다보고 있겠지.
나는 울면서도 억지로 웃었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미안하게 됐어.”
나는 샤를리즈가 아니야.
그래도 짧은 시간 당신의 신념은 멋지다고 생각했어.
‘샤를리즈’의 피해자이면서도 이 정도로 상대해주는 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힘들어서 안 되겠어.
네 마음대로 해.
“너 혼자 잘 먹고 잘살아. 이 망할 개자식아.”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웃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등을 돌렸다.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이제 신경 쓸 눈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지? 참을 필요 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들어도 참 한심한…… 어린 아이 같은 울음이었다.
* * *
정말이지,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물에 푹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엉엉 우는 게 이 나라의 황족이자 공녀라니.
록시디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쟤 왜 저렇게 꼴사납게 우냐? 쯧쯧, 혀도 찼다.
‘저런 못난 놈과 끝냈으면 속 시원하게 웃어야지. 울 건 뭐야. 울 건.’
록시디언이 팔짱을 끼고 혀를 차는 사이, 옆에서 노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폐하. 그 우산은 공녀님 씌워 드리려고 가져오신 것 아닙니까?”
“…….”
현재 록시디언이 서 있는 곳은 지붕이 있는 복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필요도 없는 우산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록시디언은 노아의 말에 우산을 휙 던져 버렸다.
“공녀님께 안 씌워 드리는 겁니까?”
“씌우긴 뭘 씌워.”
록시디언이 엉엉 울고 있는 샤를리즈 쪽을 고갯짓했다.
“쟤 꼴 안 보이냐? 쟤 성격에 저런 꼴을 남에게 보이고 싶겠냐?”
“…….”
노아는 샤를리즈 자존심에 죽어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 아닐까 짐작했다.
“괜히 나섰다가 뼈도 못 추리기 전에 이만 들어가자고.”
노아가 망설였지만, 록시디언의 부름에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록시디언은 휘파람을 불며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는 주인을 잃은 우산만이 덩그러니 굴러다녔다.
이윽고 록시디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누군가 그 우산을 들어 올렸다.
* * *
비는 정말 세차게, 정신없이도 내렸다.
‘덕분에 내 울음소리도 묻혀서 오히려 좋네.’
얼마나 울었을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길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누군가 보기라도 했다면 샤를리즈가 진짜 미쳐버렸다 같은 소문이나 돌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아니다. 어차피 이제 다 망했는데 뭐.’
나는 뺨을 열심히 닦으며 돌아서서 갔다.
아니, 돌아서서 가려 했다.
바로 앞에 커다란 벽 같은 거랑 부딪쳤다. 윽, 뭐야.
여기 벽이 있었어? 아니, 길 한복판인데 무슨 벽이야.
그렇지 않아도 취기에다 비까지 맞아서 드레스는 장난 아니게 무거웠다.
샤를리즈는 가냘픈 체형이었으니 내 몸이 무슨 종이 인형처럼 팔랑 흔들리는 것도 당연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신기하게도 나를 둘러싼 거대한 벽이 날 감싸 안아 주었다.
고개를 들면, 더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감기 걸리세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 좋지 않은데.’
이런 상황에서 다정한 목소리라니.
취약해지기 딱 좋았다.
우산을 씌워 준 남자는 이안 차일드였다.
어쩌다 적절하게 우산까지 가진 채 나를 발견한 건지는 몰라도, 좋지 않았다.
정신 차리자.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내 사랑 코인을 돌려받고 말겠다 싶었으니까.
난 재빨리 자세를 고쳐 서서는 이안 차일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허리에 감은 손 떼.”
당장, 이어서 말한 것에 이안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웃던 미소조차 지운 채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마치 내 얼굴을 이제야 발견한 사람처럼.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내 눈을 끝까지 바라보며 천천히 허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더니, 자신은 그런 표정을 지은 적 없다는 듯 늘 보이던 부드럽고 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비가 참 많이 내리네요. 우산도 없이 고생 많으셨겠어요.”
나는 그 순간 이 남자의 눈에 스쳤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짝!
능글맞게 느껴지는 표정을 본 순간 나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내가 아니었다. 몸에 남은 기억이 멋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샤를리즈, 동정받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구나.’
이 남자에게서 얼핏 보였던 감정은 동정이었다.
거북함이 드는 순간 손이 움직였던 것이다.
“내가 우스워 보여?”
어차피 내가 살 길은 모두 막혀 버렸다.
이제 곧 죽을 거 막 나가겠단 생각뿐이었다.
신기하게도 패악을 부릴 생각이 없었음에도 입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안 차일드는 놀랍게도 돌아간 뺨을 그대로 돌리더니, 뺨을 맞았음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오히려 전과 다를 바 없이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그가 내게 우산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여성에게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는 법인데. 급해서 그만 실수했습니다.”
내가 잡지 않자, 조심스러운 손으로 우산을 내게 주었고 기어이 들게 만들었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내겐 지금 이런 우산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 망했어. 죽을 거야.’
망했단 생각이 드는데 게임이라 치면 재시작도 할 수 없는 상황.
복잡한 절망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이 남자가 샤를리즈의 기억에 없는 무고한 피해자인 건지,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접근한 건지.
혹은 정말로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다가와 준 건지 모른다만.
이미 상황이 너무 버거웠다.
차라리 가까워지지 않는 게 나았다.
할아버지가 정말 파혼 뒤에 이 남자를 새로운 약혼자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아니다, 상관없나? 새 약혼 하기도 전에 뒈질 건데. 무슨.’
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우산을 던져 버린 채로 등을 돌려 갈 길 갔다.
얼른 마차를 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피곤해.’
저택으로 돌아가면 일단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자.
하고 나서 푹 자고 난 뒤에, 혹은 자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어차피 곧 죽을 거 막 살까.’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눈을 가늘게 찌푸리면 그래도 앞이 보였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 때였다.
어깨로 따뜻한 감촉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깨에 놓인 화사한 웃옷이 보였다.
셔츠와 조끼만을 걸친 이안이 싱긋 웃었다.
그 눈이 지금까지 여우같이 느꼈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한없이 선하게 보였다.
“비 맞는 거 좋아하십니까?”
“……쓸,”
“저도 좋아합니다.”
내가 노려보며 코트를 벗으려 하자, 이안이 슬쩍 내 어깨를 잡으며 코트를 벗지 못하게 했다.
내가 더욱 사납게 노려보자, 이번엔 움찔하는 척했다.
분명 척이었다.
겁먹지도 않은 주제에 겁먹은 체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어깨에 또 손을 올렸네요. 조금 있다가 뺨 두 대든 세 대든 맞겠습니다. 맞을 터이니, 이건 입고 가세요. 공녀님.”
그가 내 어깨를 꼬옥 잡더니 이번에는 나를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