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면, 미련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도 예법이 완벽하다고는 느꼈지만 걸음걸이마저 정갈했다.
이와는 별개로 황당함에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무슨 꿍꿍이지?’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나는 허탈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이렇게 말하면 내가 아스킨 그 인간과 다른 게 뭐야.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경계하고 거리를 두고.
아스킨이 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안을 보면서 아스킨의 심정을 체감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분했고, 억울했으며, 피로했다.
‘어쨌거나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코트를 확 벗어 버리고 싶었지만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일까.
갑작스럽게 오한이라도 온 건지 추위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단 코트를 걸친 채로 걸어갔다.
저 남자를 뒤따르게 된 것 또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차는 타야 하니까.’
뭐가 됐든 오늘은 돌아가서 쉬자.
* * *
샤를리즈가 비틀비틀 걸어가는 사이.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던 이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보좌관과 함께 서 있던 알츠베이트 공작이었다.
우산을 들고 지름길로 온 록시디언과는 다르게 알츠베이트 공작은 둘러 걸어가는 정식 통로를 이용했다.
게다가 승리감의 도취된 걸음은 느긋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늦게 이 길에 도착한 공작은 멀리서 어깨에 코트를 걸친 채 걸어가는 샤를리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호오라, 저 영식은…….”
“차일드가의 장자로군요.”
알츠베이트 공작은 샤를리즈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로는 뱀과 같은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차일드가의 장자가 이번에 외교적으로 대단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지?”
“예, 그렇습니다. 곧 폐하께서 불러 훈장을 내리고 치하할 예정입니다.”
“흠,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단 말이지.”
차일드 가문은 명가였다.
전통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상업에 종사해 온 가문이었지만 현재 차일드 가주는 중립을 표방한 채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끄는 귀족파와 황제 파 사이에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는 상태였다.
‘이참에 저들을 귀족파로 완전히 끌어들인다면.’
또한 알츠베이트 공작은 차일드 백작이 최근 황제파 간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끌어들인다면 거절할지 않으리라.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시야였다.
알츠베이트를 위시한 귀족파가 차일드가를 포섭할 수 있다 느끼는 것만큼, 황제파의 귀족들 역시 차일드가가 은연중 황제파를 표방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고난 장사꾼 차일드 가문이 택해 온 진정한 중립이라는 것 또한.
현재의 차일드 가문 가주와 장자가 미묘한 세력 전에서 균형 잡는 능력이 뛰어난 덕택이었다.
‘……이미 레무트 영지를 빼앗을 기회가 왔으니, 그놈의 영지를 빚 대신 몰수하고 샤를리즈는 차일드 가문으로 보내면 좋겠어.’
알츠베이트 가문이 차일드 가문의 영지와 특산물, 그들의 전문 사업을 떠올렸다.
‘좋은 거래가 되겠군.’
이러한 계획에 가장 중요한 ‘샤를리즈의 의사’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샤를리즈의 짜증이야, 돈을 좀 풀어 사치하게 해 달래면 될 노릇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껄껄 웃으며, 보좌관과 다른 길을 택해 걸었다.
그는 자신의 보좌에게 알렸다.
“내일 아침 일찍 출타하게 준비하도록 하게.”
“예, 공작님.”
비가 세차게 내리는 하늘 아래, 공작처럼 보좌의 극진한 시중을 받으며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걷는 자가 있었다면.
샤를리즈처럼 우산도 없이 타인의 코트 하나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걷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 마지막으로 샤를리즈와 마찬가지로 푹 젖은 채 걷는 이가 있었다.
아니, 막 마차에 오르려던 아스킨이었다.
“……공작님?”
한 발만 더 디디면 마차에 오를 거란 걸 잘 알았다.
영지에서 그를 모시러 온 기사와 마부가 아스킨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가.
“……연회에선 입 꾹 다물고 약혼자 역할을 할 테니 염려 말고 당장 돌아가.”
자신의 입으로 약혼자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언제는 내 얘기를 들어 준 적이라도 있니?”
그렇다면 오늘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약혼자로서 한 번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일, 아니었나?
아스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너한테 잘 보이려 빚까지 내 가며 널 도왔는데! 내가 변한 모습을 보여 줄 기회 한번 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어?”
어쩌면 들어 봐야 변명에 불과했을 말일지도 몰랐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그럴 확률이 아주 높았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
그러나 정말 들을 가치가 없었나? 기회조차 없이 무시하는 것이 옳았는가?
왜, 지금 그에게는 빗속을 뚫고 처절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맴도는가.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너 잘났어. 정말 잘났어.”
단 한 번도 빌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제 발등에 입 맞추는 이들로만 노예로 들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에게서 오늘같이 간절함이란 걸 본 적이 있었나?
……그 여자의 눈물은?
샤를리즈는 마지막까지 자존심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 떴다.
그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빗사이에서 눈물이 더 잘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비가 가려준다고 생각했지만, 아스킨은 바보가 아니었다.
“……하. 젠장.”
아스킨은 돌아섰다.
뒤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달렸다.
뒤에서 기사와 마부가 그를 불렀지만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의 말을 어긴 건 아스킨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어겼음에 후회를 느꼈다.
적어도 한마디 말이라도 들어 봐야 했다.
왜 그랬지?
‘……나답지 못했어.’
그래, 그답지 못했다.
그는 부하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반드시 입장을 대변할 시간을 주었다.
죄인 앞에서도 그렇게 처리할진데, 왜 샤를리즈에겐 그리 못 했나.
설사 과거의 샤를리즈가 그러했더라도…… 한마디 질문쯤은 했을 텐데.
왜 지금의 샤를리즈에게는 그러지 못했…….
아스킨이 멈춰 섰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지만, 이 정도 비로는 검사인 그의 시야를 막지 못했다.
눈앞에는 누군가의 커다란 코트를 걸친 채 걸어가는 샤를리즈의 모습이 보였다.
샤를리즈 옆으로 익숙한 모습의 남자가 걷고 있었다.
옆이라기보다는 앞에서 걸어가는 형국이었지만 아스킨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군.’
샤를리즈의 파리한 안색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더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니, 아닌 듯했다.
아스킨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자신의 옷을 보고 있으려니, 얼른 벗어 던져 버리고 싶어졌다.
* * *
나는 복도에 들어섰다.
마차로 가려 했던 내가 이 복도에 들어선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단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함께 있던 이안이 그럼 제 가문의 마차를 타고 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일단 저 남자에게 신세를 지기 싫었고, 두 번째로는 소문을 경계한 탓이었다.
덜덜 떨리긴 했지만, 이성이 아예 날아가진 않았다.
‘푹 자고, 좀 자고 나서 남은 생은 어떻게 살지 생각 좀 해 보자고.’
아스킨 그 인간과의 관계는 이제 쫑났다고 봐도 좋았다.
대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했다.
‘통할 것 같았으면 조금 전 그렇게 가 버리진 않았겠지.’
그 사람은 우습게도 죄인에게조차 공정한 사람이었다.
내 말을 들을 의지가 있었다면 화를 참고 한마디는 들어 봤을 사람이었다.
‘가 버린 건 끝났다는 거야.’
돌아가면 차분히 대화할 수 있을 거란 선택지는 지웠다.
‘아, 몰라. 죽을 거면 이젠 죽으라지. 젠장.’
나를 마차 앞으로 바로 데려가지 못한 시종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시종을 구제한 건 이안 차일드였다. 잠시 복도에서 비를 피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추웠던 지라 이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비를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몸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 멀리서 아직도 연회 중인지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몇 걸음 더 걷기 무섭게 나는 어깨에 놓인 코트를 벗어 던지고, 이안을 슬쩍 노려봤다.
이 인간은 왜 자기 가문 마차가 뻔히 있으면서 나를 쫓아온 거야?
“공녀님.”
나는 돌아보진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시종이 편히 기다리시라며 방으로 안내했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앉기라도 하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뺨 맞을 준비 다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봐, 당신 내가 진짜 우스워?”
피로와 겹쳐 사나운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미 샤를리즈 몸에 남은 기억과 본능 또한 저 남자가 동정을 보였단 이유만으로 적의를 발산했다.
“약혼자한테 공개적으로 차여서 우습게 보이나 봐? 내 꼴이 너 같은 놈도 까불어도 될 만큼 처량한가 보지?”
“아뇨,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궁금한 부분이 하나 있는데…… 저 같은 놈이란 어떤 놈인가요?”
절대 지지 않고 싱글 웃으며 받아치는 모습은 이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