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욕설을 지껄이지 않은 건 빡치지 않아서가 아니다.
비를 맞아서 힘이 빠졌을 뿐이지.
“그리고 약혼자한테 차이셨으면 이제 다시 싱글이신 것 아니십니까? 제게도 기회가 생긴 건지요.”
“꺼져.”
“아, 제가 그걸 참 잘하긴 합니다. 밑바닥부터 험하게 구르면서 자랐거든요.”
“…….”
웃기지도 않았다. 이건 수작이 아니다.
웃는 얼굴을 빙자한 비아냥거림이었다.
이걸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저 얼굴은 뺀질뺀질하다.
날 때부터 금수저를 잡았을 태가 나는 얼굴이었다.
완벽한 예법까지. 험하게 구르긴 누가 굴렀단 건지.
차라리 아스킨 그 남자가 더 험하게 굴렀을 거다.
“난 기억 안 나는데, 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했니? 아니면 고문? 아, 아니면 혹시 친구나 전 애인이 나한테 맞았니?”
“어느 쪽도 아니지만, 궁금하긴 하네요.”
이안이 표정을 지우더니, 그 위로 진지한 표정을 덧씌웠다.
이도 잠시, 다시 예의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잔상이 남을 만큼 진지한 시선이었다.
“공녀님은 정말, 그런 사람이십니까?”
당연히 내가 한 짓이 아니지만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샤를리즈’의 피해자라는 거야, 아니란 거야?
‘일단 이건 분명하네. 이 인간 보통이 아니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피로해 그냥 뒤돌아서 목적도 없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은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아, 공녀님. 뺨은 다음번으로 미뤄 두겠습니다.”
외치는 소리조차 가증스러웠다.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복도에 덩그러니 놓여진 웃옷뿐.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가 도착했다며 시종이 우산을 가지고 달려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마부는 내 꼴을 보고 몹시도 놀란 기색이었다.
호위 기사들 사이에는 제트도 있었는데, 그가 가장 경악한 얼굴이었다.
‘……제대로 염려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네.’
유일하게 제트만 염려하는 얼굴이었던지라, 그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피로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계속 긴장하고 있다가 드디어 안심해도 되는 장소를 찾은 기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축 처졌다.
‘그럼 뭐 하냐……. 이미 모든 게 망했는데.’
마차에 막 늘어지려는데,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빗소리가 들려왔다.
“야.”
툭툭 튀는 빗방울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참 의아한 인물이 서 있었다.
록시디언이었다.
이 인간이 왜 여기 나타난 거야?
그저 피곤한 기분이었다. 좀 꺼져 줬으면…….
“왜 벌써 가냐?”
몰라서 묻는 건가. 그럼 아까 그 꼴을 보고도 연회장에 있으리?
진짜 샤를리즈면 어땠을까…….
기억을 뒤져 보던 나는 판단했다.
‘X같다고 더욱더 거기 안 있었겠네. 깽판은 더 쳤겠지만.’
그러고 보니 록시디언과 큰 깽판을 치기로 약속했는데, 그것도 까먹고 있었다.
아니, 그 상황에서 약속까지 기억하고 계획해서 움직일 수 있었겠냐고.
“……왜 온 거야? 깽판 때문에 왔냐?”
“아, 그거.”
이 인간이 뭐라 하려나 싶었는데, 웬일인지 씩 웃었다.
“아주 잘했던데?”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피로함도 잠시 잊고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부숴 버린 그 얼음 석상, 레인타 왕국에서 선물한 거거든? 아마 그게 비용으로는 20억 골드쯤 하던가…….”
“뭐야?!”
난 벌떡 일어났다. 그 얼음 덩어리가 뭐가 그렇게 비싸?
어처구니가 없었다.
폭군 오빠는 몹시도 즐겁다는 얼굴로 마차 안으로 들어와서 설명했다.
그 얼음 조각으로 할 것 같으면 3년 전까지 적대 관계였던 왕국에서 평화 협정을 기념하여 보낸 것으로, 왕국의 북부에서만 나는 새파란 얼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연회가 끝나면 마법으로 보존해 영구 보관할 예정이었다고.
‘아니, 미친 그런 중요한 걸 왜 막 전시해 두는 건데!’
열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열을 낼 기운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차피 곧 죽을 거, 죄목 하나 추가되는 게 뭐가 중요하냐.’
그 덕에 겉으로는 내 놀람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알겠냐? 결국 이대로라면 왕국이랑 외교 문제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란 말이지.”
“왜 신나 보이는 건데?”
“아, 재밌으니까?”
“미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폭군 오빠는 싱글거리며 박수까지 쳤다.
아주 멋진 깽판이었다면서.
깽판이 아니라 비틀거리다가 부딪친 건데…….
무슨 나라 간의 중대한 조각이란 게 툭 쳤다고 넘어지냐고.
“몰랐던 건 너뿐일 거다? 애초에 그런 게 왜 연회 중앙에 있겠냐.”
“……좀 조용히 해 줄래.”
결국 나는 의도치 않게 이번에 폭군 오빠의 니즈를 충족시켜 줬다는 소리였다.
나쁜 일은 아니었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내 일은 엉망진창인데, 이쪽은 좋아서 싱글싱글한 얼굴이라니.
“야, 그나저나 웬 비 맞은 생쥐 꼴이 됐냐?”
이상하게도 폭군 오빠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마차 밖에서 우산을 들고 대기하던 노아가 묘한 얼굴로 록시디언 쪽을 보았다.
저 사람은 또 왜 저래?
나는 가볍게 신경을 끄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살고 싶으면 신경 꺼. 내가 생쥐 꼴을 하든 고양이 꼴을 하든.”
“그건 웃기라고 한 말이냐?”
비아냥거림에 내가 노려보자, 폭군 오빠도 미간을 찌푸렸다.
“쭉정이한테 차이고, 왜 나한테 성질이야?”
“너나 할아버지나 똑같아.”
“너? 너라고 했냐? 아무리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 욕심만 터지게 많은 너구리 공작이랑 나랑 똑같다고? 빨리 사과해라.”
“아……. 진짜 꼴도 보기 싫다.”
나는 목을 더듬었다.
전과 다르게 정말 사나운 내 얼굴을 보고서 그제야 록시디언이 움찔했다.
“야, 너 잠깐.”
“내가 정말 최후의 수단까지 쓸까?”
“쓰기만 해 봐. 해보자는 거냐?”
“미안한데, 나 오늘 힘도 없고 정말 돌아가고 싶거든?”
“…….”
“엄마가 보고 싶다고.”
록시디언이 경악했다.
아, 이건 나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온 건데. 정말 실수였다.
‘……진짜 엄마가 보고 싶었다고.’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어느새 온순해진 시선을 한 록시디언이 싱긋,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상큼하게 웃었다.
“우리 보석 같은 샤를!”
와, 사납게 생긴 아이돌이 청순 교복 콘셉트를 억지로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언밸러스함에 나는 피로도 잠시 잊고 작게 감탄했다.
“내 여동생, 어머니가 보고 싶었구나. 많이 힘들지? 아까 오빠가 우산을 씌워 줬어야 하는데…….”
“우산?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야,”
“아니, 안 들을래. 그냥 이 마차에서 내려 줘.”
록시디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온순하게 끄덕이며 문을 열고 알아서 나갔다.
인격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몰라도 저런 상태의 폭군 오빠는 뭐든 들어줘서 정말 좋았다.
‘매번 외치고 싶네.’
이번은 실수이긴 했지만 매우 편하긴 했다.
그리고 폭군 오빠가 땅에 발을 디딘 순간,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야, 너!”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실수였어. 실수.”
“그걸 말이라고.”
“이번엔 실수 아니라 진짜로 부를 것 같은데.”
“……협박하냐?”
그러나 나는 이제 만사가 귀찮아졌으므로 인상을 찡그리며, 기사를 불렀다.
“꼴도 보기 싫다고 했지?”
달려온 호위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마차에 달린 황실 문양이고, 알츠베이트 문양이고 다 떼어 버려.”
“예?”
“버려. 당장.”
우물쭈물하던 기사들이 폭군 오빠의 눈치를 보다가, 내 윽박지름에 얼른 문양을 모두 떼어 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문양을 속 시원하게 보다가 문을 닫게 했다.
‘지긋지긋한 것들.’
여기와 나를 괴롭힌 것들.
하나 더, 레무트 공작가의 문양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없어서 참으로 아쉬웠다.
폭군 오빠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출발했다.
* * *
샤를리즈가 탄 마차가 멀어졌다.
신기하게도 빗줄기가 조금씩 얇아지고 있었다.
록시디언과 노아는 우산 아래서 장대비가 줄어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록시디언은 샤를리즈의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노아는 우산을 든 채로 록시디언의 표정을 보았다.
록시디언은 어쩐 일인지 매우 기분 좋아 보였다.
싱글벙글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고민하던 노아가 입을 열었다.
“폐하, 공녀님께서 오늘 쉽지 않은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뭐? 약혼자에게 차인 거?”
“예, 비도 저렇게 맞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폐하께서는 몹시도 신나 보이셔서요.”
“이야, 보좌야, 넌 진짜 막 묻네?”
이리 말하는 록시디언은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야, 내 동생이 망가트린 얼음 조각, 만약 왕국이 문제를 제기하면 누구한테 하겠냐?”
“네? 그거야…… 공녀님께.”
“내 여동생이 현재 어디 소속이지?”
“그거야 알츠베이트…… 아.”
노아가 록시디언을 보았다.
“그래, 과연 외교 문제에서 레인타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 영감이 내 여동생을 가문 입장에서 감쌀까? 아니면, 쳐낼까.”
“그거야…….”
“감싸도 상관없어.”
록시디언의 얼굴에서 미소가 차차 가라앉았다.
“욕심 많은 노인네 덕분에 쭉정이도 쳐내고, 쟤 성격에 그 영감이랑 다시 사이가 좋아지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