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9/194)

68화

애정을 쌓아 가는 건 어렵지만, 미움이 쌓이는 건 순식간이다.

록시디언은 정점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는 과정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 영감의 욕심이 일을 그르친 거야.”

“…….”

이제 록시디언은 기다리면 떠내려 올 상처 입은 여동생을 건져내면 그만이었다.

“신이 안 나겠냐? 우리는 가서 연회나 지켜보자고.”

록시디언은 그리 말하며 홀가분하게 돌아섰다.

목 뒤로 깍지를 낀 모습은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건 정말 진심일까?

우산은 필요 없다며 던져 버리시고는 마차까지 쫓아가셨으면서.

왜 갑자기 이리도 샤를리즈를 황족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노아는 점점 알 수 없는 록시디언의 의중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는 샤를리즈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을 바라보다 록시디언을 쫓았다.

* * *

“공녀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비를 흠뻑 맞았다며 호들갑 떠는 시녀들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

본래는 씻고 목욕도 하고 지친 몸을 뉘일 예정이었지만.

너무 피로했다.

하지만 침대에 눕는 순간, 펑 터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라는 듯 다시 한번 마음에 무언인가 펑 터지고야 말았다.

참아 왔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빗속에서 엉엉 울면서 모두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 끝났어.’

코인, 좋다. 억울하게 잃어버린 삶을 돌려받는 것? 다 좋았다.

하지만 그 남자와 완전히 끝나서 곧 파혼을 앞둔 지금은 코인을 못 돌려받게 됐다는 억울함보다는 내가 정말 하찮게 느껴졌다.

“더 이상 네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이 상황이 너무 서러워서 펑펑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히려 잘됐군. 이제 모든 이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 진짜 파혼하면 되겠어.”

정말 끝이었다.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얇아지는 듯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창밖으로 천둥 번개마저 쳤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 그저 저 비에 쓸려 가, 나마저도 쓸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빗속에서 젖은 옷을 입은 그대로 울다 지쳐 잠이 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어제부터 내린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다.

어쩌면 홍수가 오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양이었지만, 수도는 홍수에 대비가 탄탄한 도시였다.

무엇보다도 홍수 따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알츠베이트 가문은, 비와 별개로 무척이나 분주했다.

저택의 주인,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른 아침부터 외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준비에 바쁜 와중, 알츠베이트 공작의 보좌관이 머뭇거리며 공작에게 다가갔다.

“저, 공작님. 공녀님께서…… 몸이 많이 아프시다고 합니다.”

“허어, 그 애가?”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 말을 듣더니 혀를 쯧 찼다.

오늘 일어나면 불러 꾸중을 하려 했더니, 그 일은 뒤로 미뤄질 듯했다.

“황실에 알려지기 전에 당장 의원이며 치료 마법사를 불러 치료하게 해.”

“예, 공작님.”

보좌관은 이외에도 머뭇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열이 정말 높으신데…… 이것까진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

알츠베이트 공작은 잠시 염려하는 듯했지만 이미 다른 일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샤를리즈가 많이 아프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가는 사실에 가까운 듯했다.

보좌관은 침묵을 택했다.

“출발시켜.”

“예.”

1시간 뒤, 공작이 탄 마차가 멈춰섰다.

알츠베이트 가문의 마차가 도착한 곳은 한 가문이었다.

차일드 가문.

수도 내에 위치한 차일드 가문의 저택은 때 아닌 손님을 환영하느라 바빴다.

“이, 이안 님!”

보초병들은 이 세찬 빗속을 뚫고 오는 마차의 등장에 놀랐고, 마차에 새겨진 문양에 더더욱 놀랐다.

이는 저택의 주인에게도 빠르게 알려졌다.

다만, 현재 차일드 가문의 주인 ‘로한 차일드’는 새벽 일찍 이웃 영지로 나간 상황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께서 오셨다고? 당장 모셔라.”

그렇기에 아버지를 대신 저택을 지키고 있던 장자, 이안 차일드가 서둘러 알츠베이트 공작을 환대하기 위해 급하게 나왔다.

‘이런 이른 시간에, 공작의 방문이라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와 무언가 약조한 것이 있나? 아버지와 공유한 정보에는 없었다.

가문의 후계자인 그와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 이 방문은 아버지조차 몰랐던 급작스런 방문이리라.

“알츠베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각하.”

“자네가 이안 차일드인가?”

“예, 그렇습니다.”

알츠베이트는 초상화로만 보았던 이안 차일드를 보며 흡족함을 숨기지 못했다.

레무트 가문과의 파혼이 이루어질 때, 가문의 크기와 면면만 보고 차일드 가문을 택했지만 이리 보니 샤를리즈가 퍽이나 좋아할 만한 외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방문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각하의 방문이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안은 부드러이 웃었다.

“장사꾼에게 이 시간이면 이른 시간이 아니지요.”

“그래? 부친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았군.”

이안은 속내를 숨기고 알츠베이트 공작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시중인이 두 사람이 앉기 무섭게 따뜻한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공작은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접대에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때로 작은 것을 보고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하였다.

실로 권력자를 어찌 대하는지 잘 아는 가문 아닌가?

“장사꾼에게 시간은 금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공작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는 그저 시선만 줄 뿐, 바로 입을 열었다.

이안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츠베이트 공작님께서 무려 저희 가문까지 직접 오셨으니, 단순한 일은 아닐 테고 마음의 준비는 마쳤습니다.”

그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혀가 꽤 잘 돌아가는 데다 처세가 좋은 이 청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뻣뻣하기 짝이 없는 레무트 놈과는 차원이 다른 청년이 아니던가.

쓱 훑으니 장사꾼으로서 자세며 언행.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공작은 그제야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입에 머금고 신중하게 향을 음미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느긋하게 물었다.

“제국 내 귀족은 크게 두 세력으로 갈리지, 차일드 가문은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마치 산책을 가냐 묻듯 평온한 어조였다.

“절대 황정을 지지하는 쪽? 아니면 귀족 고유의 성향을 존중하는 귀족파?”

“…….”

“편히 대답해보게.”

네 가문은 황제 파인가, 귀족파인가.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거두를 두고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안은 정중한 미소를 띈채 대답했다.

“폐하의 통치 아래 모든 귀족이 동등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그 중에서 더 고귀하고 현명하신 공작님과 같은 분이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만족감이 어린 얼굴이었다.

“내 사랑스러운 손녀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안은 아주 찰나 당황했다.

‘이 질문은…….’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당황이 드러나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미녀를 어찌 생각하냐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알츠베이트 공작이 참지 않고 껄껄껄 웃었다.

호탕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이안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가만히 웃음을 잦아들길 기다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노회한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에는 완벽한 예법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차일드 가문이 현 가주에서 그냥 정점을 찍은 상단이 아니군, 그래. 내 패를 먼저 보여야 대답을 하겠다는 건가?”

“저는 아직 심계가 미천하여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국에서 공녀님을 흠모하지 않는 남성이 있겠습니까?”

이안이 잠시 고민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부드러이 덧붙였다.

“아, 단 한 명만 빼고 말입니다.”

샤를리즈가 공식적으로 차인 상황은 제국 대부분의 귀족이 본 상황이었다.

이 말조차도 공작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청년이었다.

“내 손녀와 약혼하겠나?”

이안은 멈칫하더니 서글서글하게 미소했다.

“……저야 영광이지만, 이건 공녀님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약혼은 어디 혼자서 하는 일이던가.

이안은 속으로 샤를리즈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다.

아주 짧은 편린만으로 그녀가 겪어 온 강요 혹은 삶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었다.

“난 기억 안 나는데, 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기라도 했니? 아니면 고문? 아, 아니면 혹시 친구나 전 애인이 나한테 맞았니?”

그는 그녀를 몰랐다. 그리고 그녀도 이안 자신을 모른다.

“내가 도와주지. 내 손녀가 아직은 철이 없어서 망나니처럼 뛰어다니나, 이 할애비의 말을 무시할 순 없지.”

실질적으로 샤를리즈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소리였다.

분명 이안이 보좌이자 친구인 쇼모어가 말한 ‘귀하고 오냐오냐 자라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오만 불손한 공녀’라기엔 자유가 없지 않은가.

이안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를 천천히 마시고는 천천히 알츠베이트 공작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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