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194)

69화

“왜 자신 없나?”

“아닙니다.”

이안이 온순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녀님의 마음을 얻는 건 제가 스스로 하겠습니다. 그저…… 공작님께서 저를 높이 사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오호, 아주 사내답구만.”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안의 몸을 훑었다.

들리는 평가에 의하면 비리비리한 장사치거나 외교관 쪽인 줄 알았더니 몸이 다부졌다.

“그럼 나는 믿고 가겠네. 내 평생 손에 꼽을 만큼 아주 즐거운 아침이군.”

알츠베이트 공작이 일어나서 문을 향해 나서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치 지금 문득 떠올렸다는 듯이 느긋한 말투였다.

“레무트 공작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던데.”

이안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놀랐다는 듯 잠시 눈이 커지긴 했다.

“소문대로 공작님의 귀는 천 리 밖의 일도 듣고 계셨군요. 하지만 그건…… 제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일이기도 하고 공과 사는 구별해야겠지요.”

이안의 뜬구름 잡는 대답에 알츠베이트 공작의 미간이 찌푸렸다.

공작은 불편해진 심사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안 또한 이 모습을 보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공작님과 제 목적이 다르진 않을 테니까요.”

“……내 목적을 안다는 건가?”

이안은 온유하면서도 나긋하게 미소했다.

실로 무해하게 보이는 얼굴을 가장한 채였다.

“저야말로 여쭙고 싶습니다. 그럼 공작님께서는 허락해 주셨으니 제가 공녀님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분과 약혼을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딱히 그 애의 마음이 없어도 상관없지.”

“그렇군요. 그럼 어찌 되었든 저와 공녀님이 끝내 부부가 된다면 저와 공작님의 목표는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츠베이트 공작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대답은 따로 없었지만 긍정을 담은 침묵이었다.

사실 공작에게는 정말로 샤를리즈의 마음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의사를 감히 샤를리즈가 정말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다만, 그 마음이란 것도 저 청년이 알아서 해 준다면 징징거리는 소릴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겸사겸사 패악도 작작 부린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끝으로 하나만 여쭙습니다. 그럼 레무트 공작님과 공녀님의 약혼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영식 또한 황실 연회에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그 꼴을 보고도 내가 레무트가를 그냥 둘 것 같은가?”

감히 알츠베이트를 욕보인 레무트 공작을 응징하겠다는 말이었다.

이후 알츠베이트 공작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걸어 나갔고, 이안은 그를 배웅해서 우산까지 씌워 주며 마차까지 함께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마차에 오르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곧 영지를 빼앗길 걸세. 그 영지에는 알츠베이트의 깃발이 꽂히겠지.”

이안 차일드가 제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레무트 공작의 퇴로는 막혔다.’

아스킨 레무트는 빠른 시일 내로 알츠베이트에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반항한다면 영지를 빼앗긴 채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할 수밖에.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이 올라타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이안은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 모습은 공작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소음이 거의 없는 고급 마차 안에서 알츠베이트 공작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났다.

‘호오라, 저건 호랑이 새끼다 이건가? 아주 재밌겠어.’

그렇지 않아도 최근 샤를리즈를 두고 갑작스럽게 혈육의 정을 내세우며 황족으로 데려가려던 록시디언의 수작이 마음에 들지 않은 터였다.

빠르게 혼인시켜 버리면 더는 빼앗기지도 않겠지.

‘샤를리즈, 내 사랑스러운 손녀야. 넌 나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녀니라.’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간 공작은 보지 못했다.

마침내 허리를 편 이안의 얼굴로 그의 앞에서 보였던 것과 전혀 다른, 뜻 모를 미소가 떠올라 있던 것을.

* * *

샤를리즈의 방에는 따뜻하다 못해 덥게까지 느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온도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방의 주인은 추위를 느끼기라도 하듯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이뿐 아니라 샤를리즈는 고열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샤를리즈를 모시는 전담 하녀 셋은 그녀를 향한 걱정이 가득했지만, 어떤 것으로도 열이 내리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기절한 샤를리즈가 입을 달싹였다.

“내……. 내…….”

“공녀님? 공녀님, 괜찮으신가요?”

“공녀님께서 눈을 떴나?”

“아뇨……. 무언가 말씀을.”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샤를리즈의 입술에 집중했다.

“내…… 코……인…….”

“예? 코?”

아주 잠깐 의식이 돌아온 샤를리즈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최대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던 하녀들은 물론 방 안에 있던 누구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고 발만 더욱 동동 구를 때였다.

샤를리즈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한여름처럼 더운 방 안을 쭉 둘러본 공작은 한눈에 봐도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직도 누워 있는 것이냐? 치료 마법사들은 다 어디 갔고?”

“저, 그…… 그것이.”

공작가의 주치의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눈썹이 쓱 올라가자, 주치의가 허둥지둥했다.

“내 말이 우습더냐? 당장 가서 수도에 있는 모든 치료 마법사들을 다 불러오거라!”

샤를리즈는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일어나 저가 친 사고에 대한 반성도 해야 했으며, 시킬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게 아니옵고, 공작가 전속 치료 마법사들까지 다녀갔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누워 있는 것이냐? 설마, 몹쓸 병이라도 걸렸다더냐?”

병이라면 심각한 사안이었다.

주치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 공녀님께서 최근 너무 신경을 쓰신 데다가, 어젯밤에…… 비까지 맞으셔서 휴식이 필요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주치의가 파리한 안색의 샤를리즈를 흘끗 보았다.

아주 미약하지만 동정이 스쳤다.

……샤를리즈가 그리도 목매달던 레무트 공작에게 공개적으로 차인 사실은 이미 단 하루 만에 수도에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제 아무리 악독한 악녀라지만, 주치의는 샤를리즈가 성격에 맞지 않게 레무트 공작의 거절에는 꾹꾹 제 성격을 참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한계치까지 마력을 주입한 뒤입니다. 더 이상 마력을 주입했다간 오히려 회복이 더딜 수 있다고…….”

“그렇단 말이지.”

알츠베이트 공작이 짜증이 섞인 탄식을 뱉었다.

중요한 이 시점에 눈을 뜨지 못하다니. 이 순간만큼은 쓸모없는 손녀였다.

‘황실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황실은 샤를리즈의 병을 핑계로 간섭하려 들 것이 뻔했다.

최악의 결과로는 샤를리즈의 거처를 황실로 옮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를 부득 갈았다.

“잘 듣거라. 이 순간부로 샤를리즈가 아프다는 것을 비밀에 부쳐라.”

알츠베이트 공작의 서슬 퍼런 표정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얼어붙어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라도 입을 잘못 놀렸다간 그 입을 찢어 버릴 것이다.”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방에 있는 모든 인원에게 엄포를 놓고 그대로 샤를리즈의 방을 나가 버렸다.

샤를리즈는 그 후로도 주치의나 하녀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코인’을 몇 번 외치가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전담 하녀 셋, 수잔, 베스, 안나는 번갈아 가며 야간에도 꼬박꼬박 샤를리즈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물수건을 교체했다.

현재 시간 새벽 2시, 지금은 수잔의 차례였다.

‘공녀님 어떡해…….’

워낙 소문이 크게 퍼진 탓에 단 하루 만에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인 저마저도 듣게 될 정도였다.

샤를리즈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수잔은 샤를리즈가 자신에게 숙취 약을 받아 가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째서인지 오지랖을 부렸다가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이 공녀님을 다시 보게 된 기회가 되었다.

물론 수잔은 샤를리즈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은 실로 소문에 걸맞은 악독하고 잔인한 악녀가 틀림없었다.

다만, 수잔은 자신이 최근 보아 온 모습 또한 샤를리즈의 모습이리라 믿었다.

그녀는 샤를리즈의 하녀였고, 주인을 따를 뿐이었다.

‘어서 나으세요, 공녀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수잔이 손을 뻗어 샤를리즈의 이마를 닦아 줄 때였다.

“……마.”

“공녀님?”

샤를리즈의 눈이 사르르 열렸다.

마법등을 미약하게 켜 두었기에 그 모습이 똑똑하게 보였다.

수잔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녀님? 공녀님, 정신이 드세요? 괜찮으세요?”

“……마. ……마.”

그러나 수잔은 곧 깨달았다.

샤를리즈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꿈을 꾸듯이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

수잔은 할 말을 잃었다.

감히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될 모습을 본 기분에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신이 감히 주인을 동정하고 연민하다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수잔은 애써 예전 샤를리즈의 공포를 떠올리며 듣지 못한 척하려 했다.

샤를리즈는 그저 잠꼬대였다는 듯 눈을 스르륵 감았다.

샤를리즈의 관자놀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오빠.”

그러나 수잔은 이 말만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앞선 두 사람은 이미 돌아가셔서 뵙지 못하는 분들이나…….

한 사람은 살아 있는 가족 아니던가.

우리 공녀님, 수잔이 제 앞치마로 눈물을 훔칠 때였다.

샤를리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개새끼.”

어쨌거나 샤를리즈, 아니 윤지후는 평범한 남매였다.

수잔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 채 한참이나 샤를리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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