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 *
짹짹짹-.
어디선가 익숙한 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싶은데, 더 자고 싶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더 잘까…….’
몸이 너무 무거웠다. 눈꺼풀은 더욱 무거웠다.
그러나 이어지는 새 소리는 맑았지만 어쩐 일인지 귀에 거슬려 참지 못하고 반짝 눈을 떴다.
‘으윽……. 뭐야, 몸이 쑤셔.’
몸 여기저기가 심하지는 않은데 미약하게 욱신거렸다.
몸살에 함께 오는 근육통 같은 느낌이랄지.
나는 끙끙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내 손을 꼼지락 움직였다. 오른손 다섯 개. 왼손 다섯 개.
나는 한참이나 내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거울이 없지만 꽤 바보 같은 표정이지 않을까?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목에서 쉰 목소리가 나왔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죽었네?’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면서 가장 먼저 의문이 들었다.
잠들기 전의 내 모습이 생생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내가 서서히 죽어 가는 건 줄 알았다.
진짜 아프더라고.
‘약혼자에게 차였는데 왜 안 죽었지?’
아스킨이 나를 매몰차게 버리고 갈 때 심장을 강하게 강타하던 고통이 아직도 선명했다.
게다가 지금도 존재를 알리듯 심장에서 미약한 고통이 느껴지는 듯싶었다.
왜 안 죽지?
‘에이 씨, 좀 있다 죽나?’
나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비가 세차게 내리다 못해 천둥 번개마저 치는 하늘이었는데.
몹시도 맑았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아, 아직 도장은 안 찍었구나.’
아무래도 아프다가 깨어나서 머리 회전이 둔한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파혼이란 게 덜컥 진행되는 게 아니고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는 거였다.
적법한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아스킨이 파혼장에 도장을 찍으면 완전히 끝나지 않을까?
‘연회장에서 자신 있게 갚겠다고 한 걸 봐서는 돈을 갚을 방법이 확실히 생긴 모양이지.’
대체 어떻게 마련한 걸까.
아스킨에게 돈을 빌려준 가문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다가 관뒀다.
이제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대로 누워 다리를 쭉 뻗었다.
어차피 이제 파혼은 결정된 일이었다.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었다.
그래, 한 번 죽어 본 거 까짓 거 두 번은 못 죽어 보겠나.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누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아무것도 안 하기는 좀 아깝지 않나?
어차피 이제 곧 죽을 건데.
‘기왕 얼마 안 남은 삶, 막 살아도 되지 않나?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수잔과 안나가 들어왔다.
수잔은 들어오다 말고 일어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안나는 땡그랑 물통을 떨어트릴 정도였다.
“공녀님!”
“공녀님!”
나는 다가오는 그녀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괜찮으세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정말 다행이에요!”
호들갑을 떨며 걱정해 주는 그녀들에게 고맙긴 한데, 솔직하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일어나면 뭐 하나. 이제 곧 죽을 텐데.
나는 무심하게 방을 훑다가 그녀들을 다시 보았다.
곧 하녀들을 통해서 내가 무려 나흘 동안 누워 있다는 점, 내가 고열과 몸살로 얼마나 아팠는지, 주치의나 치료 마법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일 등.
끝으로.
“내가 아픈 걸 비밀에 부치라고 했다고?”
내가 아픈 걸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음을 알았다.
비밀이라……. 왜 내가 아픈 걸 숨겨야 하는 것이지?
‘아. 록시디언을 경계한 건가?’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나는 하녀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일어났다는 거 내가 허락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 명령이야.”
“……네. 공녀님.”
“네!”
나는 끄덕이고는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녀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쉬고 싶다는 내 말에 머뭇거리면서도 돌아갔다.
방에는 다시 홀로 남았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수도 전역에 샤를리즈가 차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으려나?
일단 그 소문은 당연히 퍼졌다고 봐야겠고.
파혼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알아보면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있겠지.
‘할아버지가 내가 아픈 걸 비밀에 부쳤다고는 해도 황실에서 정말 모를까?’
나는 노아가 내가 방에 혼자 남기 무섭게 나타났던 걸 떠올렸다.
황실의 첩자가 이곳에 있는 모양이니. 모르진 않겠네.
침대에서 막 일어나려 하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분명 창문은 어디에도 열리지 않았다.
“…….”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노아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익숙한 검은 공간이 보였다.
그는 아주 놀란 표정이었다.
“뭐야, 왜 놀란 얼굴이야?”
내가 혼자 남은 걸 알고 들어온 거 아닌가?
“……깨어나셨군요.”
“깨어난 걸 알고 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놀란 얼굴을 수습한 노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명을 받고 공녀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그래? 그럼 수잔이랑 안나 중에는 황실의 첩자가 없는 건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기에 폭군 오빠의 첩자가 하나가 있든 열이 있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 일어났어. 확인했으면 됐네.”
나는 손을 휘저었다. 귀찮다는 듯이.
“꺼져.”
그러자 노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안 가?”
“아, 음……. 죄송합니다, 조금 놀라서.”
노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의 얼굴로 놀람과 의아함이 섞였다.
“예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오신 듯해서…….”
“허, 웃기네.”
나는 삐딱하게 섰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하는데?”
“……죄송합니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몸의 기억이 앞서 뺨을 때렸을 때도 똑같은 표정으로 사과했던 사람이었다.
다 끝난 마당에 쟬 괴롭혀서 뭐하나.
나는 곧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가라는 듯 손가락만 까딱했다.
노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공녀님께서 깨어나시면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우습네. 난 이제 막 깨어난 환자인데, 그런 환자를 데려가겠다?”
“……간청드립니다.”
“그래. 가자.”
바로 태도가 바뀌는 모습에 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보는 표정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 봐야, 곧 할아버지 귀에도 내가 일어난 게 닿을 거고 불려가서 쓸데없는 소리나 듣겠지.
“뭐 해. 열어.”
“아, 네.”
노아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저, 옷은 갈아입지 않아도 되시겠습니까?”
“어.”
나는 흘끗 내 옷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몸살에 걸렸다 보니 긴 팔 원피스에 가까운 잠옷이었다.
“누가 보면 제국의 악녀가 이제는 미친년이 됐나 보다 하겠지. 그냥 가.”
“…….”
노아가 내게 좀 더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안고 가도 되겠냐 물었다. 나는 성의 없이 끄덕였다.
어차피 막 일어난 참이라 몸에 힘이 없던 차였다.
곧 노아가 나를 안아 들고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바로 달릴 것 같던 노아는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제 웃옷을 벗어 내 어깨에 얹고는 다시 나를 들어 올렸다.
무어라 하려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
“폐하.”
곧 사람이 없는 길을 지나, 록시디언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 * *
록시디언의 집무실은 꽤 서늘했다.
샤를리즈는 노아의 옷을 벗어 주려다 말고 꽤 추우니 그냥 걸치고 있기로 했다.
사실 눈을 뜬 이후로 귀찮음과 체념. 될 대로 되란 심정이 그녀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록시디언은 눈앞에 나타난 여동생의 모습에 보기 드물게 놀란 얼굴을 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얼굴이 핼쓱했다. 낯빛이 창백했다.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처연함마저 들어 소름 끼쳤다. 이 악녀가 처연함이라고?
“야, 안 그래도 삐쩍 마른 게…… 이젠 아주 사라지겠다?”
“얼굴 작다는 거지? 칭찬 참 고마워.”
샤를리즈가 성의 없이 대꾸한 순간, 록시디언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찡그렸다.
뭐지? 샤를리즈의 태도가 묘하게 이상했다.
아프기 전과 비교하자면 활기가 없다거나…….
아니, 쟤가 원래 활기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 그럼 무엇이 달라진 거지?
록시디언은 딱 이거다 싶은 것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샤를리즈를 응시했다.
“다 나은 거냐?”
“명령했다며. 나으면 날 데려오라고 했다고.”
보고 있으면서 왜 그래? 샤를리즈가 고갯짓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했는데?”
“……허?”
“용건 없으면 말고.”
미련 없이 돌아가려는 샤를리즈의 모습에 록시디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샤를리즈 근처에 가서 이리저리 보기 바빴다.
“뭐 하는 거야?”
“애가 왜 나사가 빠졌지? 어디다 빼고 왔냐?”
“무슨 개소릴…….”
“혀에도 나사가 빠졌냐?”
“왜, 죽이기라도 하게?”
“…….”
록시디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