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샤를리즈는 그마저도 감흥 없이 응시했다.
으음, 저런 얼굴 하니까 조금 무섭기는 한데. 뭐. 이젠 될 대로 되라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네게 그런 말을 하냐? 죽이겠다고?”
“아니? 그러겠어?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쓸모 있게 여기는데.”
샤를리즈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오히려 내가 일어난 걸 알게 되면 이제 이것저것 시키겠지. 아, 잔소리가 먼저인가?”
샤를리즈의 중얼거림에 록시디언과 노아, 두 남자는 한참 관찰하듯 쳐다보기만 했다.
사실 샤를리즈는 아예 아무런 생각 없이 노아에게 몸을 맡긴 건 아니었다.
록시디언을 만나 물어볼 얘기가 있었다.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제일 직설적으로 말할 사람이 오빠 같더라고.”
자신이 아픈 뒤로 어떤 일들이 있었으며, 어떤 소문이 났는가.
전담 하녀들은 모르거나 알더라도 제 몸 상태를 생각해 제대로 말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할아버지는 저 좋을 것만 알려 줄 가능성이 컸다.
“내가 아파서 칩거하는 사이에 어떻게 됐어? 내 소문이 얼마나 더 개판 났는지 궁금한데.”
“오, 개판인 건 어떻게 알았냐?”
“……폐하.”
“왜?”
샤를리즈는 아무렇지 않았다. 개판 날 거 알았는데.
그런 커다란 사건에다 깽판까지 쳤는데 아무런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일단 크게 두 가지일걸. 하나는 네가 드디어 임자를 만나서 제대로 차였다는데 통쾌하다는 인간들.”
“신나게 욕했겠네.”
“새삼스럽게.”
여동생이 욕먹었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좀 보게.
샤를리즈의 눈엔 아무리 봐도 저건 좋은 오빠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레무트 그놈이 너를 조련하다가 돈만 먹고 튀었다는 거?”
“그렇구나.”
“뭐야, 여기엔 왜 발끈 안 하냐?”
이미 연회장에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별생각 없어.”
“……허?”
물론 샤를리즈라고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떡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
그럼에도 판을 깨고 나가 버린 건 아스킨 레무트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한마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도 그 남자였다.
뜻을 알 수 없는 샤를리즈의 표정을 보며, 록시디언의 잘생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 *
‘생각해 보니 다시 열받네.’
나는 팔짱을 끼며 찡그렸다.
어쨌거나 죽는 건 확정이 났는데……. 이대로 멀거니 사형 선고만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이제부터 어쩔 거냐?”
“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의욕이라는 게 치솟았다. 그 방향이, 어떡하면 막 살아 볼까에 가까운 게 문제였지만.
굳이 저 폭군 오빠에게 말할 이유는 없는 감정이었다.
“그 욕심 많은 영감, 아니 알츠베이트 공작이 하는 짓이 너무 더럽던데. 싫지 않든?”
“싫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록시디언을 응시했다.
그 공작이 결혼 발표니 뭐니 팀 킬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 계획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고,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아버지! 손녀가 죽는 데에 최고 공로를 획득하셨어요. 와아,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선물로 앞으로 무슨 요청을 하든 깽판을 놓아 드려요!
“그래, 싫지? 황실로 들어와라.”
“싫은데?”
록시디언이 멈칫했다.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이걸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얼굴이었다.
“왜? 싫다며?”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설마 오빤 내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날 좋아한다고? 징그럽게.”
“그치? 잘 아네. 안 좋아해.”
“…….”
뭐야, 자기도 나한테 징그럽다고 해 놓고서 왜 똥 씹은 표정이야?
이 폭군 오빠도 썩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물론 알츠베이트 공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돈 좀 빌려 달랬더니 매몰찬 거절을 할 때라든가, 처음 만났을 때 위협부터 했다든가.
남이 살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치는데 복장 검열이라는 훼방을 놓는 등 날 괴롭혔던 자잘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을 생각이야. 근데,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도 싫어. 내가 왜?”
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웃었다.
“정 내 도움이 필요하면 고개 숙여 부탁하든가. 아, 그런다고 들어줄지는 모르겠고.”
“죽고 싶냐?”
“죽여 봐. 죽여 봐.”
“아오!”
록시디언이 머리를 헝클이더니 찡그리면서 툭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건데?”
“막 살 건데?”
인생 뭐 있나. 나는 이렇게 된 거 남은 시간은 막 살기로 했다.
어차피 주어진 몸은 악녀였다. 이제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악녀.
유레카! 막 살기에는 아주 최적의 조건이었다.
내 말에 록시디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날 향해 익숙하디익숙한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새로운 말썽을 떠올린 악동처럼.
“그렇단 말이지?”
“뭐야. 그 얼굴은.”
“아니, 네가 황족이 되기 싫다면서. 근데, 깽판을 친다는 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그런데?”
“도와줄까?”
“뭐?”
록시디언의 눈동자가 은근하게 휘어졌다.
“그 영감 열 받게 하는 일은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나한테 뭘 시키려고.”
“없어. 그냥 막 살아.”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야?
록시디언은 씩 웃는 그대로 재차 입을 열었다.
“넌 그냥 나와의 약조를 지키면 돼.”
“약조?”
“잊지 않았겠지?”
아. 약조. 돈을 빌리는 대신 더욱 깽판을 칠 것.
이제 와 그게 소용이 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알츠베이트 공작이 무어라 했던가.
‘조용히 지내랬지.’
그렇다면 가장 악녀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그 할아버지의 심기에 가장 거슬리는 짓이란 소리였다.
“엿 먹이는 방법, 확실해?”
“그렇지. 그냥 깽판으로는 그 영감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걸? 할걸. 제대로 먹여 줘야지. 들어 볼 거냐? 이 오라버니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한번 말해 봐.”
* * *
일주일 뒤.
제국에는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연회같이 정기적인 큰 연회 외에도 자잘한 사교 행사가 즐비했다.
본디 귀족가의 관계에 있어 가장 많은 정보와 사회적인 재화가 오가는 자리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런 사교 행사에는 자그마한 살롱이나 티타임부터 가문이 주최하는 연회까지 다양했다.
개중 로타리아 백작가에서 열리는 연회는 유독 사치스럽고 향락적이었다.
‘쯧, 역시 이런 졸부가 여는 파티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들은 졸부라 생각하는 백작가의 파티장을 천박하다 여겼지만 실제로는 보석으로 반짝거리는 장소를 보는 것이 그들의 허영심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원단으로 대박을 친 로타리아 백작가는 웬만한 귀족가보다 재화가 넘쳐났다.
그렇기에 그들이 여는 파티는 뒤에서 신나게 까이면서도 늘 손님이 넘쳤다.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작위가 높거나 고위 가문 영애도 한수 접어주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니까.
물론 알츠베이트 공녀같이 진짜 고위 가문 영양이야 눈치를 볼 이유는 없었기에 제멋대로였지만.
“그분은 아직도 칩거 중이신가 보네요.”
“뭐, 그렇지 않으시겠어요? 가엾어라…….”
“저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공녀님께서 실연에 못 이겨 얼굴을 확! 그어 버렸다는 소문이었나?”
“깔깔깔, 그 예쁜 얼굴에요? 어떡해. 안타까워라.”
웃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망나니 모임 영애들이었다.
망나니 모임뿐만 아니라 몇몇 보통 영애도 끼어 있었는데, 극소수의 불편해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제각기 샤를리즈의 소문을 맛보고 씹기 바빴다.
사람의 입방아 속에서는 고귀한 교황도, 대륙의 정령사도 심지어 황제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공녀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샤를리즈가 칩거한 지 2주가 넘어간 탓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샤를리즈가 다시 여행을 간 게 아니냐는 말마저 나왔다.
“왜, 아무래도 그날 깬 얼음 조각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잖아요?”
“세상에, 그럼 정말 그것 때문에 다시 추방을 빙자한 여행을 떠난 거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요?”
소문은 와전되고 또 와전되어, 그날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은 샤를리즈가 아직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냥…… 쪽팔리셔서가 아닐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이지 매몰차게 차이셨잖아요.”
“아아, 불쌍하신 공녀님.”
“크흠, 이제 공녀님의 새로운 약혼자는 누가 될까요?”
“이봐요, 경. 뭘 입맛을 다십니까?”
“아니 뭐……. 공녀님은 또 새로운 상대를 찾지 않겠습니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최근 모였다 하면 그녀를 입에 올렸다.
샤를리즈란 이름이 가지는 가치는 엄청났다.
위명이든, 악명이든.
‘꼴 좋다, 그 여자의 최후란.’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망나니 모임 중앙에서 깔깔 웃기 바빴다.
바로 그때였다.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