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194)

72화

문 사이로 누군가 도도하게 걸어 들어왔다.

우아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느슨한 걸음걸이였다.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걸친 이는 긴 분홍 머리를 쓸어 넘겼다.

파티장을 훑는 붉은 눈에는 감흥이 전혀 없었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의 등장에 모두가 입을 딱 다물었다.

샤를리즈의 등장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이게 뭐야.”

곧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인테리어 썩었네.”

그녀의 등장에 홍해 바다 갈라지듯 사람들이 갈라졌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파티의 주최자인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보았다.

샤를리즈가 없는 망나니 모임에서 깃을 잔뜩 편 공작새처럼 대장 노릇에 취했던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까지 신나게 욕하던 상대가 보란 듯이 앞에 나타났으니까.

그러나 망나니 모임의 일원답게 움츠림은 길지 않았다.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로타리아 백작 영애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붙잡은 채 인사를 올렸다.

“…….”

샤를리즈는 팔짱을 낀 채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빤히 보았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시선에 백작 영애는 놀란 시선으로 흠칫 떨었다.

어찌하여 보지 못한 사이에 아름다움에 더욱 물이 오른 데다, 살이 빠진 것인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성숙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샤를리즈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왜 그런 시선이야? 못 볼 거라도 봤나 봐?”

“네?”

* * *

로타리아 백작 영애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나는 딱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듣기로는 내가 칩거하는 사이에 가장 신난 게 이 망나니 모임이라지?’

괜히 ‘개망’이 아니었다.

이들 사이에는 신뢰도 우정도 없다.

즐거운 루머와 가십 앞에서는 어제까지의 우정도 종잇장에 불과하다고 할까.

‘완전 SNS의 인간화…….’

스스로도 조금 웃긴 생각을 하며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응시했다.

그녀는 찔리는 게 있는 건지, 아니면 겁이라도 먹은 건지 몰라도 움찔하면서 나를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지나가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솔직히 말해 좋은 쪽의 감탄은 아니었다.

‘……와우, 금칠을 얼마나 한 거야?’

로타리아 백작가면 이름이 없는 가문은 아닌데, 파티장 내부 면면을 보니 어째서 ‘졸부’ 꼬리표를 못 벗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백작이라는 작위에 어울리는 품위는 아니었다.

그저 돈만 많은 모양새였다.

하기야 개망 모임의 영애들은 하나같이 돈만은 많은 가문의 영양들이었다.

‘그나저나…… 불쾌한 시선이 느껴지네.’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황실 연회는 이 제국에서 가장 점잖은 축에 속했다.

당연했다. 품위가 제일 중요한 자리였으니까.

그렇기에 격식을 차리던 모습들과는 다르게 이런 소규모 연회는 성질이 달랐다.

황실 연회에서 느꼈던 것과는 질이 다른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샤를리즈의 몸에서 눈을 뜬 뒤로 이런 소규모 파티에 참석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심지어 이런 파티에서 샤를리즈의 업보가 얼마나 컸는지도 익히 경험해 봤으나, 경험한다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자면, 저 느끼하게 생긴 남자.

‘시선이 더러운데?’

가까워질수록 나를 노골적으로 훑기 바빴다.

눈이 마주치자 애써 감탄으로 바꾸는 티가 났지만, 그 눈에 어린 더러운 탐욕을 숨기지는 못했다.

‘……테리. 밥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목적을 가지고 참여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저런 시선을 받고 싶었던 건 아닌데. 짜증이 일었다.

사전 계획이고 뭐고 그냥 엎어 버릴까.

“여기입니다, 공녀님.”

로타리아 백작 영애가 안내한 자리는 저 노골적인 시선을 보낸 남자가 있는 자리와 멀지 않았다.

파티의 중심과 가까이 있다는 것, 저 남자 또한 이곳의 주요한 인물이거나 신분이 높은 자라는 거다.

하지만 샤를리즈의 머릿속엔 저런 얼굴은 없었다.

당연했다.

‘샤를리즈는 잘생긴 애들, 특히나 아스킨 수준의 미남들만 머리에 집어넣고 있었을걸.’

게다가 아스킨만 한 미남은 폭군 오빠를 제외하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보다 한참 못한 미남이라고 해야 하나.

그저 그런 미남들 생각도 잠시, 잊었던 약혼자를 떠올리니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안내된 자리로 향하자, 남자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를 훑었다.

……저 XX죽일까?

“아, 공녀님. 이쪽은 제 약혼자인 아루스 자작가의 영식, 게렌 아루스예요.”

“게렌 아루스입니다. 공녀님. 세상에…… 공녀님을 제 눈에 담을 수 있어서 기쁜 마음입니다. 멀리서는 뵈었지만 가까이서는 처음 뵙는군요.”

허, 저 인간이 이 파티의 주최자 약혼자라고?

나는 아주 짧게나마 로타리아 백작 영애가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계속 훑는 것도 모자라, 자리에 앉으려 드레스를 정리하는 틈 사이로 내 다리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앉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섰다.

물론 게렌의 인사 따위는 상큼하게 씹은 채.

“덮개.”

나는 근처의 시종을 노려보며 말했다.

시종이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자리를 이동해 의자를 덮는 깔개를 새로 가져왔다.

나는 새로운 덮개를 깔고 나서야 앉았다.

사람들은 이런 내 까탈이야 당연하다는 듯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공녀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맞아요, 맞아요, 공녀님께서 보이지 않으셔서 여행을 떠나셨을 때처럼 수도가 심심했지 뭐예요.”

“세상에…… 피부 관리 숍을 바꾸신 건가요? 더욱 아름다워지셨어요.”

내가 앉기 무섭게 몰려든 영애들은 망나니 모임의 영애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을 태연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나를 열심히 칭찬하기 바쁜 한 어린 영애를 쳐다봐 주었다.

나는 씩 웃었다.

“……글쎄, 시간을 조금 들이는 대신 더 예뻐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거든.”

“네? 정말요?”

암. 그럼. 살이 빠지는 방법이기도 한데.

실연이라고.

거하게 차이고 목숨도 날아가게 생기면 볼 살이 아주 푹 파일 수 있단다.

나는 이들의 칭찬이 해쓱해진 내 얼굴을 조롱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뭐, 아무렴 어떠랴.

나는 턱을 괴며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이더처럼 발산되는 내 시선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얼른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도 꽤 많은 소문이 돌아다닌다지?’

한참 사람들을 응시하는데, 측면 시야로 내게 내밀어진 접시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니 시종이 접시를 내밀고 있었고, 그 옆에서 주최자인 로타리아 영애가 활짝 웃고 있었다.

“공녀님.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좋은 술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너무 잘 오셨어요. 제 약혼자인 아루스 영식이 해외에서 아주 귀한 와인을 제게 선물해 주었거든요.”

“…….”

나는 시종이 내민 접시를 보다 고개를 까딱했다.

내 살벌한 시선에 시종이 우물쭈물하며 접시를 뒤로 물렸다.

나는 손을 까딱했다.

“백작 영애, 돈을 아끼려면 파티를 열지 마.”

그러자 내 손짓에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호위 기사들이 내게 술병을 가져왔다.

술병의 라벨을 알아챈 이들이 작게 탄성을 토했다.

내 호위 기사가 내민 술은 엄청나게 비싼 술이었다.

‘……내용물은 바꿔치기 했지만.’

영혼이 달라졌다는 것 때문에 샤를리즈의 몸이 알코올 쓰레기가 됐는데, 예전 버릇대로 마실 수는 없지 않나?

도수가 거의 없는 걸로 바꿔 두었고, 내용물 교체는 놀랍게도 노아가 도와주었다.

‘황제의 보좌관을 이렇게 써먹다니 이 무슨 사치스러운 행동인지.’

내 기사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사람들이 근처에서 쑥덕거렸다.

참 신기하게도 그 소리를 숨기려고 들지 않아 내게도 잘 들렸다.

“……역시, 로타리아 백작가가 상행위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고는 하나, 알츠베이트 가문에 비할 바가 될 수 없죠.”

“저 술, 병에 금화를 꽉 채운 것보다 값이 더욱 나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돈만 있어서는 못 사죠. 저걸 독점한 상단이 고위 귀족에게만 판매하잖아요?”

“한 모금이라도 마셔 보고 싶은데…….”

혀로 흥한 자 혀로 망한다 했던가?

자신의 돈과 재력을 자랑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든 자, 알츠베이트 앞에서 무너지는 꼴이었다.

뭐, 딱히 통쾌하지는 않았다.

많아 봐야 할아버지 돈인데 무슨 소용이야?

‘확 죄다 잃어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나 내 느긋한 심정과는 다르게 로타리아 백작 영애의 감상은 달랐던 모양이다.

백작 영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상하며 찰랑이는 술을 꼴깍 삼켰다.

‘……도수가 낮은 걸로 바꾼다더니. 낮은 수준이 아니라 포도 주스잖아?’

나는 바꿔치기 해 둔 술의 맛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렇지. 그냥 깽판으로는 그 영감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걸? 제대로 먹여 줘야지. 들어 볼 거냐? 이 오라버니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자신만만하던 록시디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

거침없는 내 행동과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는 사람들의 쑥덕거림에 주최자인 로타리아 백작가 영애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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