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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74/194)

73화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를 띠며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그러자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벌떡 일어나 화난 표정을 숨기지 않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바로 근처에 있는 자신의 약혼자를 향해 가더니 그 옆에 앉았다.

“……영식이 선물해 주신 술도 아주 귀한 술이었는데, 조금 속상하네요. 영식도 그렇게 생각하죠?”

“오, 내 피앙세. 서운했어요?”

나 속땽해쪄. 웅, 우리 애기 그래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풍경에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영식, 저희 약혼식을 기억하나요? 저는 영식이 청혼해 주신 순간을 아직도 기억해요. 정말 좋았어요.”

“영애, 나야말로. 그날은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지. 그때 영애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어. 세상 어떤 남자라도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로타리아 백작 영애가 여기서 흘끗 내 안색을 살폈다.

뭐랄까, 옆에 있는 가물치를 열심히 지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잠자코 보았다.

“정말이지, 진심 어린 청혼이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잖아요.”

“하하, 나야말로 혹시나 내 피앙세께서 거절이라도 할까 떨던 게 아직도 선명하군.”

“제가 그런 멋진 자리에서 영식의 청혼을 거절할 리가 있겠어요? 이렇게 사랑하는데.”

……오, 이건 정말 나 들으란 저격이네?

굳이 이렇게 느끼지 않아도 이미 로타리아 백작 영애의 시선이 알려 주고 있었다.

나 참. 아까 전에 한 이야기 취소.

끼리끼리 만났네.

예비 남편과 함께 억지로 더 다정하게 보이려는 노력이 꼴사납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뭐 어쩌라고다. 이 언니야.

내가 아스킨 그 남자를 사랑이라도 했으면 여기서 속이 쓰리겠지만, 사실 나는 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한 거랑, 내 사랑스러운 코인을 놓친 것에 대한 쓰라림이 제일 커서 말이지.

“어머나, 그러고 보니. 공녀님…… 제가 공녀님께 청혼 선물을 드리기로 하였는데 감히 잊고 말았어요. 죄송해서 어떡하죠……?”

그래서 다음 순간 선물 운운하며 다시 한번 아스킨에게 공식적으로 차였던 이야기를 은연중에 꺼낼 때도, 나는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아, 물론 화가 나지 않는다거나 이대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깽판을 치지?’

생에 대한 의지를 반쯤 체념하고 막살아 보자는 마음이 가득했던 내게 열정의 불씨를 지펴 주는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나게 깽판 한번 치겠다고 온 마당에, 멍석을 제대로 깔아 주는구나.

나는 화사하게 웃었다.

지루한 상황을 타파하고 행동을 개시하고자 꼬았던 다리를 풀고 반대 다리를 들어 올리던 찰나였다.

‘허?’

이 미친 새끼가?

나는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꼬옥 안고 있던 게렌이 나를 슬쩍슬쩍 쳐다보는 모습을 포착했다.

‘……아무리 XX라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XX짓을 한다고?’

대놓고 쓰레기 짓을 한다고? 그것도 공녀를 상대로?

반신반의 하면서도 시험 삼아 다시 다리를 꼬아 보았다.

그리고 게렌의 눈빛이 정확하게 내 다리를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니, 무슨 저런 쓰레기를.’

조금 전까지 저 백작 영애에게 불타오르던 전투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대신에 새로운 경멸이 활활 타올랐다.

한 쌍의 바퀴 선생이 잘 만났다 싶었더니, 알고 보니 한쪽은 핵폐기물 쪽인 듯했다.

나는 순간 고민했다.

여기서 저 남자의 뺨을 냅다 갈기더라도, 내 명성과 명예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은 내 새로운 희생양이 저 남자가 되었구나 생각할 뿐.

고민하며 술(을 가장한 포도 주스)을 홀짝이는데, 눈이 마주친 로타리아 백작 영애는 나를 의식한 듯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약혼자에게 안겼다.

……웩. 안 부럽다고. 하나도 안 부럽다고.

백작 영애는 나를 은근하게 보며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어디로 보나 시비를 거는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네. 그게 행복이냐? 내가 괜히 저놈 뺨을 때려 봤자, 저 영애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거 아닌가?’

내 덕분에 쓰레기인 걸 알게 되는 거잖아?

솔직히 저 영애가 앞으로 어떤 쓰레기랑 결혼하든 그게 내 알 바인가 싶다만.

‘얼마 안 가 죽을 건데.’

아량을 발휘해서 좋은 일 한 번만 해 볼까?

“…….”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미 내 주변에는 내 관심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된 망나니 모임 영애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나는 샤를리즈의 기억과 이들을 직접 본 기억들을 합쳐, 이 모임 멤버 중 제일 눈치가 빠르다고 판단되는 영애들을 속으로 추렸다.

마침 옆에 앉아 있기도 했다.

“혼자 먹는 술은 재미가 없네.”

나는 잔을 찰랑 흔들며, 영애들을 훑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추려 놓은 영애들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신호를 알아차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였다.

“그럼요, 혼자 마시는 술은 조금 적적할 때가 있죠?”

“제게도 잔이 있답니다, 공녀님!”

“저도요!”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의 말을 시작으로 옆에 있던 갈색 머리카락 영애가 끄덕이고, 그 옆의 영애가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뒤에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는 병을 하나 더 가져와 시종에게 내밀었다.

내가 마시던 것과 똑같은 병을 보고서 영애들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보며 희열 어린 표정을 보이는 영애도 있었다.

“세상에, 제가 이 와인을 마셔 볼 날이 오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공녀님!”

“어머나, 병부터가 너무 고급스러워요.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영애님!”

나는 시종이 뚜껑을 연 뒤 병을 가져오자, 손짓해 내가 직접 붙잡았다.

이와 동시에 내가 추린 눈치 빠른 영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고급 와인을 직접 따라 주면서 그녀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상체를 숙이는 순간 티 나지 않게 아루스 자작 영식의 눈빛을 봐.”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이 가벼운 행동인 것처럼.

내 속삭임을 들은 망나니 영애들은 내 어이없는 명령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재빠르게 얼굴들을 수습했다.

역시 괜히 깽판 동지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수긍한 얼굴들이었다.

“와, 이건 정말……. 향긋하네요!”

“풍미가 느껴져요. 세상에…… 세상에 몇 병 없는 와인의 풍미는 이러하군요.”

“공녀님께서는 이 와인의 34년산을 좋아하시나요?”

“딱히?”

그녀들은 선택받지 못한 다른 망나니 영애들의 시선을 만끽하며 내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나는 이들과 이야기하는 척하며 은근하게 상체를 숙였다. 마치 지루하다는 듯 느릿하고 천천히.

동시에 다시 다리를 꼬자, 기다렸다는 듯 게렌 아수스의 시선이 내 다리로 향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더해 이제는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대범해진 건지 입맛마저 다셨다.

나와, 내 지령을 받은 망나니 영애들은 정확하게 포착하고 말았다.

‘역시, 더럽네. 그냥 한 대 때릴까?’

추측이 들어맞아 통쾌했지만 역시나 불쾌했다.

그리고 영애들은 ‘맙소사’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따지자면 지나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맡았다면 저런 표정일까 싶었다.

‘좋아. 워밍업은 해 뒀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음, 아예 포도 주스로 바꿔버리니 속이 편하네?’

진짜 술이라도 마셔서 취하면 곤란했는데, 어지럽지도 않아서 아주 좋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뚜벅뚜벅 게렌 아루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내가 자리에서 멈춰 섰을 때, 아루스 자작 영식은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내가 다가오는 걸 알았으면서도 직전까지 모른 체하며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척 여념이 없었다.

내가 어깨를 툭 두드리자 쳐다본 것이었다.

“너, 일어나 봐.”

내가 까딱 고갯짓하자, 게렌 아루스 표정으로 당혹이 스쳤다.

안 들켰다고 생각해서인지, 알츠베이트 공녀인 내가 직접 다가와 줄 줄 몰랐다는 건진 몰라도 당황과 황공함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아니, 나에 대한 두려움인가? 이제 와 두려워한다고?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녀님? 외람되지만 저는 왜…….”

“날 두 번씩이나 말하게 하겠다?”

주춤주춤. 내 살벌한 시선에 못 이겨 이 남자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보려면 가까이서 제대로 봐야지.”

나는 게렌 아루스의 정강이를 차 버렸다.

그러자 게렌 아루스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며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였다.

남자의 얼굴과 내 가슴팍이 더욱 가까워졌다.

우습게도 이런 순간마저 놓치지 않고 더러운 시선을 뿌리는 모습에 내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어때, 이제 좀 실감이 돼?”

짝. 내 손이 게렌 아루스의 뺨을 날렸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발로 밀어 넘어트려 버렸다.

형편없이 넘어진 꼴이, 매우 꼴사나웠다.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가리거나 숨을 삼켰다. 혹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던 로타리아 백작 영애가 정신을 차리고 발끈했다.

꺄악, 소리를 지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기까지 했다.

“공녀님! 이건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백작 영애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씩씩 숨이 찬 표정으로 외쳤다.

“잘난 공녀님께서 몇 년이나 공들여 졸졸 쫓아다니셨던 공작님께 공개적으로 차이시더니, 이제는 남의 행복한 연애사는 못 보시겠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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