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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6/194)

75화

그렇게 욕설도 말도 멈춘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얼라리요……?’

지켜보고 있던 샤를리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건 폭군 오빠가 부추기고, 할아버지에게 엿을 제대로 먹이기 위함이었다.

겸사겸사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막살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런 의도였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자신은 깽판을 치러 왔건만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 어이가 없어졌다.

‘아, 더 이상 있기도 싫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팔짱을 풀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잔을 깔끔하게 비우고는 근처 시종의 접시에 탁 내려놓았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기 직전, 넋을 빼고 멍하니 앉아 있는 로타리아 백작 영애를 향했다.

‘쯧, 어쩌다 저런 쓰레기를 선택해서는.’

하기야, 쓰레기가 나 쓰레기요 하지 않을 때도 있지.

전적으로 저 영애의 탓은 아닌가? 샤를리즈는 명료한 머리로 이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 일에 대한 보답이니까,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로타리아 백작 영애의 어깨가 아주 살짝 움찔했다.

하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저 커플을 지나가야 했다.

샤를리즈는 누워 있는 아루스 자작 영식을 사뿐히 지르밟고 걸어갔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누워 있는 영식을 향했다.

“내가 내 시그니처를 깜빡할 뻔했네.”

샤를리즈는 양손에 커다란 와인 병을 두 병이나 들더니 누워 있던 아루스 자작 영식 위로 시원하게 부어 버렸다.

샤를리즈가 그림처럼 우아하게 웃었다. 악독한 미소였다.

“테리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여기 흘러버린 와인 다 핥아 먹고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고는 병을 던져 버리더니 미련 없이 갈 길을 걸어가 버렸다.

멍하니 샤를리즈의 뒷모습을 보던 한 영애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멋지다.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놀라거나 경악하며 그녀를 보았지만, 사실은 마음 한구석 아주 조금은 이 영애의 중얼거림에 공감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개판은 쳤네.’

샤를리즈가 돌아가면서 본 파티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 * *

같은 시간.

아리아는 오늘도 자신의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방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가끔 건강이 허락되면 정원에 나가는 정도일까.

하지만 정원 관리 관련 서적을 쭉 보던 중,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건강을 항시 돌보는 하녀가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아리아의 앞길을 막지는 못했다.

아리아는 오빠인 아스킨의 집무실 앞, 청소를 마치고 막 나오는 하녀 하나와 마주쳤다.

“아가씨를 뵈어요.”

“응, 청소한 거야?”

“네, 아가씨.”

레무트 가문에서 아리아의 위치는 그야말로 넘어질까, 깨질까 애지중지하는 공주님이었다.

시중인들마저 그녀를 진심으로 귀애했고, 나이 많은 하녀의 얼굴에도 둥근 미소가 어렸다.

아리아는 하녀가 들고 있는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아리아의 고운 미간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아리아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는 거침없이 쓰레기통에 손을 뻗어 자신이 본 물건을 들어 올렸다.

마침 가장 위에 놓여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꺼낼 수 있었다.

하녀는 놀라 아리아를 보았다. 귀한 아가씨께서 쓰레기를 꺼내시다니!

“……이거, 오빠 방에서 나온 거야?”

“네? 네. 그렇습니다. 아이고, 아가씨, 쓰레기를 그렇게……!”

하녀는 아리아의 행동에 쩔쩔매면서도 성실하게 답했다.

“그, 안 그래도 그건 귀한 물건 같아서 공작님께도 여쭤보니…… 공작님께서는 가져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

아리아는 자신이 쥔 물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표정을 와락 찡그렸다.

그러고는 쩔쩔매는 하녀를 그대로 보내고, 아스킨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콩콩콩.

화났다는 표시를 있는 대로 했지만, 위압감을 주기에 아리아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집무를 하고 있던 아스킨은 발소리만으로 아리아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와 다르게 발소리에 지나치게 힘이 실려 있다는 것도.

“오빠!”

“응.”

아리아가 도착해 불렀음에도 아스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스킨은 아리아의 방문엔 언제나 고개를 들어 염려부터 표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이런 이상함을 그냥 넘길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스킨은 여신의 축복을 기념하는 연회 이후 쭉 이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왜인지 몰라도 아주 그냥 일벌레가 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책상 곁으로 성큼 더 다가가 자신이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물건을 내밀었다.

“이거 보여? 보이지?”

“…….”

아스킨은 분명 이 물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응 없이 일을 계속했다.

아리아는 부아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아리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에게는 싫다, 밉다 한마디 못 하는 여동생이었다.

당연했다. 자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데, 감히 오빠에게 싫단 말을 할 수 있을까?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리아는 아스킨이 어떤 노력까지 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럼에도 늘 이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거, 공녀님이 내게 주신 거지?”

아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아리아는 이것을 처음 보지만 어떤 물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한테 내가 좋아하는 보석이 박힌 빗이 있어요.”

그도 그럴 게 자신의 머리를 빗어 주던 샤를리즈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친구랑 똑같은 물건, 가지고 싶지 않아요?”

빗의 모양은 샤를리즈가 설명했던 그대로였다.

오빠의 방 쓰레기통에서 나온 빗. 샤를리즈. 그리고 샤를리즈가 직접 설명했던 것.

모든 게 합쳐지며 이건 자신에게 온 선물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왜 이게 오빠 쓰레기통에서 나와? 공녀님이 주신 것 맞지?”

“…….”

“오빠, 왜 대답이 없어. 맞잖아. 응? 그치?”

아스킨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아리아는 흠칫했다.

‘오빠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

아스킨의 얼굴은 그녀가 보았던 것보다 상해 있었다.

마치 잠을 자지 못하기라도 한 듯이.

물론 그럼에도 아스킨의 미모는 변함없이 빛이 났다.

오히려 그늘진 얼굴조차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퇴폐적인 느낌마저 느껴졌다.

동생인 아리아에게는 그저 피로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여자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오빠.”

아스킨이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 빗 이리 줘.”

“……어?”

“빗이 필요하면 내가 직접 사 줄게. 더 좋은 걸로.”

“…….”

아리아는 갈등했다. 여기서 아스킨에게 더 따져 물어야 할까?

그러기에는 아스킨의 표정이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대체 오빠, 공녀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문 사람들의 노력 덕에 아리아는 아스킨과 샤를리즈 사이에 있던 일을 전혀 몰랐다.

모든 사람이 몸이 약한 그녀를 걱정해 모든 소식을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혹시 공녀님께서 찾아오지 않으시는 것과 관계있는 거야……?’

본인은 잘 몰랐지만 아리아는 영리했다.

아리아가 할 말을 잃은 채로 오빠를 보다가 마침내 결심한 표정을 짓고 무어라 더 따지려 들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스킨이 출입을 허락하자, 부관인 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차일드 가문의 영식입니다.”

“……들라 해.”

벤의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 아리아는 아스킨의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졌다고 느꼈다.

순식간에 방 안 온도가 몇 도 내려간 듯했다.

아리아가 의아함을 느끼는데, 아스킨이 아리아를 향했다.

“돌아가서 쉬고 있어.”

아스킨이 아리아에게 손을 뻗자, 아리아는 방어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오빠의 손이 다름 아닌 자신의 손을 향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는 빗을 꽉 움켜쥐다 못해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나는 오빠를 아주아주 오래 봤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

“…….”

“때론 오빠보다 내가 오빠를 더 잘 알 때도 있다는 거야.”

똑 닮은 남매가 서로를 응시했다.

아스킨은 아리아가 자신을 노려본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오빠, 큰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 쪼잔해.”

아리아는 한 방을 던지고는 휙 돌아섰다. 그러고는 가벼운 몸무게를 그대로 담아 콩콩 뛰어가 버렸다.

탁. 문이 닫혔다.

중간에서 벤만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아스킨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어 날숨을 푹 쉬었다.

쪼잔하다니, 내가? 아리아는 모른다.

그날,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언제는 내 얘기를 들어 준 적이라도 있니?”

아스킨은 머리가 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듣기 싫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연회 이후 그의 머리를 계속 괴롭힌 목소리였다.

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괴롭힐 것인지. 참으로 지긋지긋한 음성이었다.

……이제 끝이야. 아스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이안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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