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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7/194)

76화

이안은 언제나처럼 한 치의 빈틈없는 자세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곧 시중이 차를 내어 오고,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로 자리에 앉았다.

부관인 벤마저도 물린 자리. 방에는 오직 두 남자뿐이었다.

차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지난번 일은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이안이 앉은 채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스킨의 표정은 차가운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돈 준비가 늦어진 걸 사죄하는 거라면 상관없다. 적은 돈이 아니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아스킨은 이안의 말뜻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돈 이야기로 받아 넘겨 버렸다.

이안은 가는 눈꼬리로 아스킨을 한참 응시했다.

이도 잠시 곧 반듯한 미소를 띠었다.

“……예. 거래하던 곳의 자금이 막히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공작님께 실례를 범했다며 꼭 사죄의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안의 부친 로한 차일드는 현 차일드가의 가주이자 아스킨에게 거래를 제안한 장본인이었다.

이안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나이보다 젊은 외모를 가진 로한 차일드는 돈과 관련된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데다 처세를 보는 감각 또한 뛰어났다.

이안이 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스킨 레무트란 공작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로한 차일드가 스스로보다 더 뛰어나다 평가하는 것이 바로 아들인 이안이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아버지가 알아본 아스킨 레무트란 사람에 대한 가치를 바로 알아보았다.

아니, 아버지가 알지 못한 더한 깊은 내면까지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요청은 내 쪽에서 한 것이니 개의치 말게.”

아스킨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방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잔잔한 바다 같은 모습이었다.

이안은 공작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목을 살짝 울렸다.

이안이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저어했다.

아스킨은 그런 이안을 재촉하는 대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스킨은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안을 보기가 거북했다.

이는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려니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요청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빚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던가?

알츠베이트와의 부당한 거래보다야 훨씬 정당하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 자체가 끔찍하게도 거북스러웠다.

그래,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이안이 아스킨의 착각을 깨 주었다.

“공작님, 제가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안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랐다.

이를 느낀 아스킨이 눈을 살짝 좁히면서도 대꾸했다.

“하게.”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만, 혹 공작님께서는…… 과거 ‘옐로우 로드’를 싼값에 파신 걸 한 번도 후회하신 적 없으십니까?”

옐로우 로드. 아스킨 레무트라는 젊은 공작이 고작 약관의 나이로 세운 어마어마한 업적이자, 현재는 황실의 소유가 된 무역로.

당시, 아스킨이 이걸 터무니없는 값에 넘겼다는 건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정작 아스킨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아리아의 상태는 너무나 나빴고 그에게는 황실이 쥐고 있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약초가 필요했다.

“저는 협상과 외교를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늘 궁금했습니다.”

이안의 말에 좀처럼 타인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아스킨의 얼굴에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이안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주제넘은 질문을 드렸다면 사죄드립니다.”

“황제 폐하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지. 게다가 당시 난 응당한 대가를 받았다 생각한다.”

이안은 아스킨의 대답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감각으로 아스킨이 거짓 없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이안은 미소를 머금고 입술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는 소문대로 이 시대에 두 번 다시 없을 충신이시군요.”

“제국 귀족 중에 그렇지 않은 이도 있나?”

“물론 그렇지 않지요. 단지 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 몇 가지 있어서 말입니다.”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킨이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폐하의 명을 따르는 데 이해가 필요한가?”

“그럼 황제 폐하의 명 때문에 알츠베이트 공녀님을 거부하신 겁니까?”

“뭐?”

“들었습니다. 공공연하게 황제 폐하의 반대가 극심했다는….”

“그만하지.”

아스킨이 서늘하게 딱 잘라 말했다.

더 말했다간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표정이었다.

“그건 내 개인적인 판단이 있었을 뿐이다.”

“……제가 공작님께 여러 번 실수를 하게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이안 또한 검을 쓸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의 대륙 제일의 검사만 할 리가 없었다.

몸의 본능이 당장 도망치라 외치는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이안은 속으로 놀란 동시에 정중한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청했다.

융숭하고 반듯한 모습. 게다가 이자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상대 또한 웃게 할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킨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사죄를 청하는 이에게 자신의 화를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불필요했다.

그는 화조차도 감출 수 있어야 하는 능력은 공작이라는 작위에 얹어진 기본 수양이라 생각했다.

이는 높은 작위와 대단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을 위해 고개 숙일 일이 많았던 자의 깨달음이었다.

단 하나, 그가 예외로 두었던 인물이 있다면 오랫동안 미워하고 증오했던 자신의 약혼자뿐이었다.

아름답지만 참으로 악독하던 그 여자.

아스킨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럼 나도 질문을 하지.”

“얼마든지 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안의 답변이 이어지기 무섭게 질문이 돌아왔다.

“돈의 대가가 무엇인가?”

이안이 잠시 침묵했다.

“……공작님 같이 훌륭한 분께서 알츠베이트의 탐욕 때문에 고생하시는 걸 지켜본다는 것이 편치 않다는 아버님의 뜻을 지난번에도 전해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작님.”

“이안 차일드.”

아스킨의 입에서 이안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동시에 분위기 속으로 따가운 무언가가 스민 듯했다.

“허울뿐인 대답을 묻는 게 아니란 걸 잘 알 텐데.”

알츠베이트 공작이 차일드 가문을 직접 찾았다는 사실은 그때 자리를 비웠던 부친에게도 돌아온 즉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차일드 가문은 아스킨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을 철회하지 않았다.

차일드가에서 아스킨을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지원하려는지, 내밀한 속내까지 알릴 이유는 없다. 없지만.

“저는 아버지의 심부름만 하는 하수인일 뿐입니다. ……다만,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본 바로는 아버지께서는 공작님께서 장차 이 제국을 위해서 좀 더 큰일을 해 주시길 바라고 있다는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역시 무언가 있었군. 이런 겉핥기 답변에도 거절할 수 없는 내 사정도 계산에 있었다, 이건가?”

“네? 공작님, 무슨 큰 오해가 있으신 듯하온데, 저희 가문은 제국의 번영을 위해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나라와 황제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공작님과 다르겠습니까?”

이안의 목소리는 진실되었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진지했다.

“저희 또한 충심을 다해 폐하를 모시는 가문입니다. 다만, 제가 부족하여 전달드리는 중에 불쾌하게 해 드린 것이 있다면 모두 사죄드리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이안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걱정하지 말도록. 나 또한 나와 가문에 맹세코 공짜로 빌려 달라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더 할 말 없으면 일어나지.”

아스킨은 그런 이안의 인사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뚜벅. 긴 다리로 책상으로 향해 돌아가던 발길을 잡은 것은 이안의 한마디였다.

“이제 알츠베이트 공녀님과 파혼은 확실해지신 겁니까?”

아스킨이 돌아보았다.

“약속된 금액만 준비된다면, 당장이라도 파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생각이다.”

어째서일까, 아스킨에게서는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사나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주체할 수 없었다.

무엇에 화가 나고 초초한 거지? 자신답지 않았다.

“음, 그렇군요.”

이안이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조차 우아하며 태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럼 제가 샤를리즈 공녀님에게 관심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

이안의 눈이 휘어지고, 샤를리즈가 여우 같은 웃음이라 세련된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과 파혼이 조건인 것은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애초에 파혼은 차후 황족이 되실지도 모르는 이와 금전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는 아버님의 의향이셨으니까요.”

명료한 저 말에 그간 품었던 의문이 곧바로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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