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8/194)

77화

샤를리즈는 어디까지나 알츠베이트의 공녀였지만 그녀의 피에는 황실의 피가 함께 흐른다.

원한다면 언제든 황족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자로, 그녀의 부군 또한 함께 황실의 일원이 되는 셈이었다.

“……그날 그 광경을 보아 놓고도,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것인가?”

“괜한 오해로, 큰일을 하실 분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염려했습니다. 제 기우였던 모양입니다.”

이안의 보기 좋게 탄 얼굴 위로 유들유들한 눈웃음이 떠올랐다.

“그대는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나?”

샤를리즈 알츠베이트가 제국에서, 수도에서 어떤 악명을 떨쳤는지 과거 행적을 안다면 절대 할 수 없을 소리였다.

아니지, 그런 악독한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니 멀쩡한 청년의 명복을 빌어 주어야 할 일 아닌가?

말려야 할 일이었다.

아니면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무감하게 관심을 끊든가.

……아스킨은 이 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이제부터 알아 가려고 합니다.”

이안은 잠시 아스킨의 모습을 보았다.

장신에 커다란 체구. 얼굴은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달을 사람으로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다.

북부 사람의 특징인 눈 같은 피부를 그대로 가진 남자.

‘샤를리즈 공녀님의 취향은 이런 사람인가.’

“사람들은 모두가 악녀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과거 행적쯤은 여러 경로를 통해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현재의 공녀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더군요?”

“…….”

“뭐, 이것 또한 제가 공녀님께서 악명을 떨치던 그 시기에 제국에 없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소문처럼 보이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어리석었다.

과연 지금까지 샤를리즈 곁에 ‘당신은 보이는 것만큼 악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며 접근하는 자가 없을 것 같은가?

아스킨은 샤를리즈 손에 단 한 번 억지로 끌려 간 자리에서 본 바 있었다.

제 관심에 차지 않으면 그녀가 어디까지 잔악해질 수 있는지.

……하지만 어째서, 그 말에 바로 반박할 수 없는 것인가.

“……오빠는 현재를 보지 않는 거야?”

아스킨은 스쳐 가는 기억을 곱씹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을 이안이 보기 전에 숨긴 뒤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장사에 수완이 좋다고 하더니, 세상 풍문에는 관심이 없나 보군.”

“저는 제 눈으로 본 것만 믿습니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각하.”

아스킨은 더 이상의 이안과 대화를 나눌 경우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저 남자에게 표출해 버릴 것만 같아 빠른 걸음으로 책상으로 돌아가 서류 더미를 집어 들었다.

“이런, 제가 너무 오랜 시간을 빼았았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공작님……, 다음에는 기쁜 소식으로 뵙겠습니다.”

아스킨이 보내는 축객령을 알아차린 이안은 일어나 예를 갖추고는 아스킨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안은 빠져나가기 직전 문 앞에서 몸을 돌려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미리 파혼 축하드립니다.”

* * *

“흐아암.”

웬일인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최근엔 보란 듯이 늘어져라 정오까지 자기 바빴는데 말이다.

‘목숨 줄이 얼마 안 남아서 슬슬 쫄리기 시작한 건가. 아니면 자는 시간마저 아까워진 건가.’

나는 침대에 기댄 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막상 일찍 눈을 뜨긴 했는데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생각나지도 않아서 이러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 곁에는 세 명의 전담 하녀가 각기 수틀이나 뜨개질거리를 잡고서 이것저것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짜 샤를리즈라면 감히 내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냐고 패악을 보여 줄 일이었으나, 나는 상관없었다.

내가 이렇게 시킨 것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어떤 소문이든 듣는 즉시 내게 알리거나 내 앞에서 공유하라고 시켰지.’

그 소문엔 모든 소문이 포함되었다.

내 소문, 알츠베이트에 관한 소문, 내가 모르는 이에 대한 소문, 하다못해 황제가 변기도 금으로 된 걸 쓴다 하는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일일이 각 잡고 보고받는 것도 귀찮아서 알아서 떠들라고 시켰더니, 2주가 지난 지금 어느새 내 앞에서 양껏 수다를 떠는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꼭 교실에 있는 기분이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니까, 우리 사촌 언니가 아릭타 가문에서 일하잖아? 쫙 퍼졌다니까. 세상에 어쩜 그런 개 같, 크흠 크흠. 아니, 파렴치한 변태가 있을 수 있니? 그런 놈들은 아주 그냥 썩둑 잘라 버려야 돼!”

“얘는, 공녀님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지. 뭐, 나도 동감이야. 내 친구한테 들었지만 그 자작 영식 있잖아? 손버릇이 아주아주 안 좋아서 하녀들도 엄청 건드렸대. 내 친구의 친구는 임신한 채로 쫓겨났잖아…….”

“헐, 설마 4개월 전에 쫓겨난 걔야? 나는 임신했다고 계단에 밀어 버렸다는 소릴 들었어. 게다가 홍등가도 엄청 좋아했다고……. 무섭다, 무서워. 어쩜 이런 걸 다 숨기고 약혼을 했대?”

“돈을 왕창 써서 막았대! 그때 고용인들도 엄청 잘랐구, 그래서 우리 사촌 언니가 그때 잘려서 아릭타 가문으로 간 거잖아.”

의외로 그녀들의 이야기는 꽤 쓸 만했다.

나는 하녀들의 네트워크가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아니, 내 하녀 언니들이 이런 소문들 모으는데 유능한 건지, 일부러 나를 위해 모아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어제 있었던 사건 이후에 퍼진 아루스 자작 영식, 그 개자식의 행실에 대한 소문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은 대화 도중 내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건 그놈을 향한 심한 욕설이나 수위 때문이었다. 뭐, 그대로 써도 상관없는데.

‘솔직히 저 언니들은 샤를리즈의 쌍욕을 더 많이 듣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타당한 말이다.

한편으로 대화하는 하녀들은 이때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존경이 어린 눈으로 나를 보기도 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대충 듣던 나는 곧 이 재잘거림 속에서도 감흥을 잃었다.

‘아아, 시한부 인생이 따로 없네. 아무것도 흥이 나질 않아.’

난 턱을 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잠을 자려고 해도 이제 잠도 안 오고.’

아무래도 목숨 줄이 간당간당한 걸 몸도 알아서 잠도 오지 않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침대에 기대 앉아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허락이 떨어지자, 웬 하녀가 내게 다가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지금 집무실로 오시라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안 간다고 전해.”

나는 보지도 않고 답했다.

곁눈질로 하녀의 얼굴에 난감함과 공포가 어렸다.

‘……그래, 이 언니가 무슨 죄가 있냐.’

나는 속으로 날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심부름 온 사람 들여보내.”

내가 고갯짓을 하자, 하녀가 문밖으로 나가더니 곧 누군가를 데려왔다.

공작가 전속 기사였다. 내 호위 기사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제트가 아닌 모든 기사들은 내 편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기사를 흘겼다.

기사는 감히 나를 쳐다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땅만 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공녀님을 뵙…….”

“안 간다고 전해.”

기사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다급하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저, 공녀님, 공작님께서 아주 급하게 찾고 계십니다. 그게….”

“내 말 못 들었니? 안 간다고.”

“…….”

“오호라. 표정 한번 볼 만하네? 왜. 안 되면 또 들쳐 업어서 데려가려고?”

“아…… 아닙니다!”

나는 생긋 웃었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가져다 대면, 그 손가락 다신 못 볼 거야.”

“…….”

“어서 빨리 가지 않고 뭐 하고 있어? 아…! 그 손가락 지금 어떻게 해 줘?”

나는 느릿하게 시선을 기사의 손 쪽으로 향했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란 기사는 아마도 반쯤 풀린 내 눈을 보고서 생각했을 것이다. 미친년이다 싶겠지.

뭐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 말이 허풍이 아님을 짐작했을 거다.

곧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되고 깍듯한 인사와 함께 바람까지 일으키며 내 방을 나가 버렸다.

꽁지 빠져라 나가 버리는 모습에 순간의 통쾌함이 스쳤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 댁 때문에 죽게 생겼는데, 누굴 오라 가라 하는 거야?’

할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도 잠시, 나는 스르륵 드러누웠다.

흘끗 옆을 바라보면 내 적적하고 간절한 마음도 몰라주는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얼마 가지 않아, 하녀가 다시 한번 내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 내게 방문을 알렸던 하녀였는데, 이번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내게 다가왔다.

“고, 고, 공녀님. 공작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나는 참지 않고 확 찡그렸다.

징그러운 인간 같으니. 기어이 직접 찾아오는구나.

‘이번엔 뭐 회초리라도 들고 찾아 왔으려나? 오냐, 때리기만 해 봐. 그땐 정말 이판사판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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