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나는 팔짱을 풀고 뻐근한 목을 풀었다.
때리기만 해 봐, 그럼 당장 물어뜯어 주고 가장 싫어하는 짓인 황족으로 신분을 갈아치워 줄 테니까.
‘록시디언, 그 폭군 오빠 좋은 꼴은 절대 못 보지만. 더 싫은 게 저 할아버지 좋아하는 꼴이지.’
나는 귀찮다는 듯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수잔과 베스가 얼른 챙겨 주는 가운에 숄까지 걸치고는 문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데, 내 방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문 너머로 보기 싫은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오, 내 사랑하는 손녀 샤를리즈! 내 아가야. 이 할애비를 꼭 직접 오게 만들었어야 했느냐? 이런 귀염둥이 숙녀님 같으니!”
……어째 이 할아버지 상태가 이상하다?
“네?”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이 영감이 미쳤나?
‘드디어 이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나? 아니면 이 영감도 록시디언의 인격을 변하게 하는 목걸이처럼 스위치라도 생겼어?’
본능적으로 목걸이를 매만졌다. 설마, 정말 록시디언처럼 변했을 리는 없고.
내가 기가 찬 표정을 짓자 알츠베이트 공작은 더욱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와, 인자한 표정 한번 더럽게 안 어울리네.
어차피 여기 온 이유야 분명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마도 한바탕 하러 온 거겠지.
물론 어째서 이런 싱글벙글한 얼굴로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 알 바겠나.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어제 일은 제가.”
“오, 아니다. 친우의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그대로 놔둔다면 그건 귀족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지.”
……뭐?
“로타리아 백작으로부터 감사 인사도 받았다. 그 약혼자라고 하지도 못할 몹쓸 놈의 민낯을 네가 낱낱이 밝혀 주었다지? 올바른 귀족의 표본이라며 찬사가 자자하더구나. 백작이 제 딸의 명예도 실추되지 않았다면서 성의를 표했단다.”
성의를 표했다. 로타리아 백작이 뭐 돈이라도 바쳤나 보지?
돈이라면 많든 적든 환장하는 게 이 공작이었으니. 그래서 기분이 좋았던 건가.
반면에 내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나는 숨기지도 않았다.
더 깽판을 쳤어야 했어.
알츠베이트 공작의 기분 좋은 낯은 절로 더 큰 깽판을 다짐케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이 알츠베이트 공작이 비단 돈을 받아서 기분 좋았던 게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소개하마, 아가. 들어오거라.”
알츠베이트 공작의 손동작에 문 밖에 서 있던 커다란 인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들어섰다.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 인간이 왜 여기서 나와?
“차일드가 장남 이안 경이다. 서로 안면은 있다고 들었으니 따로 인사를 시켜 주지 않아도 되겠지?”
난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삐뚤어진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무료하다고 해도 오전부터 보기 싫은 인물이 원 플러스 원으로 등장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뒤로 보이는 이안을 사나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껄껄걸. 부끄러운 것이더냐? 이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손녀는 네가 왔음을 전해 듣고 오지 않은 것이라고.”
……뭐야, 이 친근한 호칭은?
‘설마 저 남자, 알츠베이트 공작 쪽에 붙은 건가?’
아무래도 보아하니 이 영감이 파혼 각을 보고 정말로 다음 약혼 후보를 데려온 것 같았다.
이안 차일드를 싫어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긴 순간이었다.
내 시선 어디가 부끄럽게 보이는 거지? 더 노려봐야 알아들을 건가.
‘이 영감이 뭐라고 떠드는 건지. 갔네, 갔어.’
내가 삐딱하게 서 있었음에도, 알츠베이트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샤를리즈가 돈 좀 쥐여 주면 속을 풀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습지도 않았다.
“자, 자, 그럼 이 늙은이는 이만 빠져 주마. 젊은 사람들끼리 잘 해 보거라. 허허허허!”
알츠베이트 공작은 혼자 북에 장구에 꽹과리까지 챙챙 치고는, 멀뚱하니 서 있는 이안 차일드를 방 안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공작은 방 안에 대기하던 내 전담 하녀들까지 다 데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
남은 두 사람, 나와 이안 차일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공녀님께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꺼져.”
“공녀님 저….”
“죄송하면 나가라고.”
이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 공녀님 말씀이면 뭐든 들어 드리고 싶지만…….”
이안이 자신의 얼굴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속삭였다.
그의 오묘한 빛을 띤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문 쪽을 눈짓했다.
“아직 공작님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
이런 개 같은 일이.
샤를리즈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아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화조차도 귀찮았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 남자와 멀어지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소파에 앉았다.
내가 앉기 무섭게 이안도 천천히 다가오더니 내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앉으라고 한 적 없는데.”
“영애님들의 방은 이렇게 꾸며 놓는군요.”
뭔 엉뚱한 개소리야?
이안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듯 한편으로는 넉살 좋게 미소 지었다.
“사실 여성의 방에 들어와 본 적은 처음입니다. 물론 알츠베이트 공녀님의 방이시니 제국 그 어느 귀족 여성의 방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겠지만요.”
뭐라는 거지. 생긴 건 전 여친은 백여 명쯤 존재하고 저 남자 때문에 눈물 흘리는 여자의 수가 항시 백 미터쯤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할 바람둥이의 상인데.
내가 이런 여우상을 안 좋아하고 안 믿는 이유가 있다.
내가 있던 세상에선 관상은 과학이랬다. 알았니?
“내 말 안 들려? 앉으라고 한 적 없으니까, 아까 저 자리로 가서 서 있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면 그대로 너도 꺼져.”
더 이상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었던 내가 사납게 말하자, 이안이 더욱 예쁘게 웃었다.
“햇살이 너무 좋군요. 아무 말 하지 않고 여기 앉아 햇살만 쬐다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지, 방 안에 산세베리아를 하나쯤 두었다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이따위로 생긴 산세베리아 안 키워.”
“……이런 돌아가 아버지께 항의해 보겠습니다. 더 식물답게 낳아 줄 수는 없었는지 말입니다.”
“난 너와 개소리로 농담 따먹기나 할 기분이 아니야. 마지막 경고야. 꺼지,”
“옆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으십니까?”
이 소리에 아주 잠깐 멈칫한 건.
순간이지만 아스킨 그 남자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해서였다.
더욱 불쾌해졌다.
하지만 당장 꺼지라고 말하려 해도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하고 있는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하철 1호선의 ‘도를 믿으세요’가 떠올랐어.’
저건, 안다. 내가 잘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을 얼굴!
어째서 이따위 것에서 전생의 향수를 느껴야 하는 건지.
순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가 그냥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건 고역인지라 옆으로 보이는 커다란 창문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 것 같더니, 예상외로 말을 걸어 오지는 않았다.
곁눈질로 보면, 정말이지 미동조차 없이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한 ‘식물이 되겠다’는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하필 녹색 눈동자를 가진 인간이라 퍽 어울려서 우스웠다.
아마 진짜 샤를리즈였다면 관상용으로 어장에 넣어 주긴 했으려나?
그때였다. 창문 밖으로 알츠베이트 공작이 어디론가 가는 건지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마차가 출발하는 동시에 이안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삐딱하게 쳐다보는 내 앞에서 실로 반듯하고 점잖게 인사를 올렸다.
흠 하나 잡을 데 없는 저 모습이 거슬렸다.
“비록 제 뜻은 아니었으나, 오늘 공녀님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
“다음번엔 꼭 미리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헛수고하지 마.”
사나운 한마디는 진심이었다.
어차피 다음이란 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네가 외치는 다음은 아마도 내가 관짝에 들어간 뒤가 될지도 모를걸?
“괜찮습니다. 공녀님께서 허락해 주실 때까지 편지 보내겠습니다.”
이안은 또 한 번 과하지는 않지만 예의범절의 교과서 같은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내 방을 빠져나갔다.
탁.
그의 퇴장만큼이나 고요한 문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연히 생각에 빠졌다.
‘허락해 줄 때까지 편지를 보낸다…….’
나는 확 찡그렸다.
기분 나빠.
‘네가 뭔데, 그 인간에게 구애할 때 내 행동을 그대로 하고 난리야.’
이안 차일드가 남긴 마지막 말이 뇌리 속에서 복잡한 실타래를 엮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정확히는 굳이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진심이든 아니든.
저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아스킨에게 했던 것과 비슷했고, 그 덕에 나는 저 남자의 행동에 어느 정도 간절함이 있음을 알았다.
그 점이 기분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