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80/194)

79화

‘엄청나게 많은 여자를 꼬셔 본 얼굴을 하고서. 뭐 나도 네 추억의 기록에 넣어 보겠다 이거야. 뭐야.’

나라고 차일드 가문과 저 남자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2주간 알아서 떠들라고 시켰던 하녀들의 대화에서 들은 것이지만.

젊고 유능한 젊은 귀족. 왕국과의 외교에서 대한 공을 세운 사람.

그리고 나라를 불문하고 매우 인기가 많은 남자.

끝으로 샤를리즈가 건드릴 수 없게 아주 오랫동안 외국에 있던 남자.

이 때문에 샤를리즈와 연결고리가 없는 게 분명할 남자.

“하아…….”

나는 복잡해진 머리 때문에 침대 위에 철퍼덕 누워 발버둥을 쳤다.

‘아, 몰라. 저 능글맞은 인간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지. 샤를리즈랑 과거에 원한도 없으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다 필요 없어.’

어느새 방으로 돌아온 하녀들이 내 뒤틀린 심사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뒹굴거리고 나서야 세 하녀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뭐야. 언니들. 왜 거기 있어요? 쪽팔리게…….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하녀들에게 물었다.

“언제 왔니?”

“아, 방금 왔습니다. 공녀님. 저희 셋 모두요.”

“그래?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표정이 왜들 그래?”

그러자 하녀들은 자신들끼리 한번 보더니, 그중 수잔이 대표로 말했다.

마치 적국이 쳐들어왔다고 알리는 장군 같이 조심스럽고 비장한 표정이었다.

“저, 다름이 아니라…… 공녀님께 서신이 도착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서신이란 말에 가장 먼저 막 나간 이안 차일드를 떠올렸다.

뭐야, 이 자식.

‘벌써 편지를 보냈다고? 이거 아주 몹쓸 놈이네.’

그렇게 알츠베이트와 연을 맺고 싶은 건가? 아니면 샤를리즈의 얼굴 보고 정말 반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런 얼굴은 아닌데.

“무슨 서신인데? 이리 줘 봐…….”

아니꼬운 표정으로 서신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봉투 외부에 적혀 있는 문양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무트 공작가의 인장이었다.

게다가 발신처는…….

「레무트 공작가로부터」

뭐야. 뭐냐고. 그 남자한테 서신이 오다니? 온갖 불운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 상상의 끝은 모두 동일했다.

죽음.

‘……하. 이제 진짜 끝인가 보네. 내 팔자에 만수르 같은 부자는 무슨.’

어처구니없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어 버렸던 허무한 지난 삶과 내 사랑 코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상상 속에서 모두 모래성처럼 부스러졌다.

‘그래, 다 끝내자. 끝내.’

나는 봉투를 힘차게 쭈욱 찢고는 안쪽의 서신을 꺼내려다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나를 흘끔거리는 하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허, 다들 왜 기대 어린 눈이야? 설마, 이 편지에 희망찬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정든 하녀 언니들이라지만.

내가 눈을 치켜뜨자 하녀들이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고, 공녀님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하녀들이 방을 나갔다.

나는 내 손에 담겨진 봉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곧게 세웠다.

‘까짓 거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 지후야, 뭘 긴장을 하고 그래. 받아들이자.’

나는 곱게 접혀 있는 종이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차차 읽을수록 내 눈은 커졌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알츠베이트 공녀 언니께」

나는 눈을 깜빡깜빡 떴다.

‘언니’라는 글자 위로 한번 지웠다가 덧쓴 흔적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적었다가 지웠다가, 끝내는 다시 쓴 것처럼.

게다가 아주 올망졸망 귀엽고 또박또박 쓰여진 글씨였다. 마치 필적의 주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같이.

「이렇게 서신으로 인사드리는 게 어색하면서도 무언가 마음이 더 애틋해지네요.」

내용의 정갈함은 신기하게도 본인의 오빠를 닮았다.

남매니까 당연한 건가.

서신 위쪽엔 이름 하나 쓰여 있지 않은데, 아리아라는 걸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는 이런저런 일상들이 쓰여 있었다.

자신의 건강, 요즘 날씨, 하녀들과 먹었던 간식, 그리고 정원에 핀 꽃, 내가 물어봤던 꽃이 활짝 피었다는 사실까지…….

개중에 눈에 띄는 말들도 있었다.

「제 오빠지만 어떻게 언니가 절 위해 준비한 ‘빗’을 자기 마음대로 버리는지 정말 맘에 들지 않아요. 이번만큼은 언니가 잘생겼다고 했던 그 얼굴도 어찌나 밉게 보이던지!」

이 말에 나는 아스킨 손에 보냈던 ‘빗’을 떠올렸다.

‘그래, 아리아랑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연회장으로 가는 길에 건넸었지.’

연회에서 돌아와 내가 체념하고 완전히 끝났음을 받아들이는 동안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빗을 버렸다니. 참으로 그 남자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 건데, 물건이 무슨 죄라고.

「오빠가 뭐 때문에 골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를 다시 못 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제 맘이 너무나 허전해져서 이렇게 편지로 연락드렸어요.」

가슴이 허전해졌다. 동시에 서글퍼졌다.

처음으로 공녀도 무엇도 아닌 ‘나’를 보는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착한 아이네.’

샤를리즈가 괴롭혔을 텐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의 나를 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착한 건지, 세상 물정 모르는 건지, 너무 순수하고 순진한 건 아닌지.

당황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 애의 순수한 착함에 위로받았다.

「혹시 언니만 가능하시다면…… 우리 밖에서 보실까요?

친애하는 언니의 친구! 아리아로부터」

마지막 말에 이르러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기에도 ‘친구’라는 글자에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덧쓰인 글자 옆에 꾹꾹 눌러쓴 느낌표가 아리아의 마음을 알려 주는 것 같아 어찌나 귀여운지.

“정말 귀엽네.”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만에 짓는 웃음인지 모르겠다.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 당장 죽지는 않겠구나. 그나저나, 빗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니.’

나는 혀를 찼다.

“어떻게 오빠 놈들은 하나 같이 다 이런지.”

빗 하나 정도는 그냥 주지. 내가 못된 마법을 설치하거나 독을 바르지 않았다는 건 조사하면 충분히 알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곧 밖으로 나간 하녀를 불러 종이와 펜을 준비한 뒤, 간결한 문구로 이루어진 답신을 적었다.

「안녕, 아리아. 우리 지금 볼까요?」

쓰고 보니 짧았으나…… 미안하지만 SNS 세대인 나는 편지 따위와 친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승부한다. 암.

나는 곧 밖에서 호위 기사 중에서도 제트를 불러 내 편지를 아리아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혹시나 제트가 레무트 성에 들어가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몇 가지 조언도 함께 주었다.

내 명령을 받은 제트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재차 내게 검토받은 뒤 레무트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 후 나는 전담 하녀들을 포함해 모든 하녀를 모아 명령했다.

“수잔, 외출 준비해.”

“네. 공녀님! 다만, 어딜 가려 하시나요?”

“그냥. 집 안에 있어 봤자 따분하기만 하니까. 나가서 놀아야지. 인생은 즐기는 거야.”

오전 내내 무기력하게 있었기 때문일까, 내 눈빛에 생기가 돌자, 도리어 하녀들은 왜인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로 전담 하녀 세 명을 제외한 모든 하녀가 그러했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시려고 이러시는 걸까.’ 하는 시선인데 나는 그녀들의 불손한 표정을 못 본 척해 주었다.

곧 몇 시간 동안 준비를 마치고 나는 외출용 드레스를 걸친 채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에 기사들이 내가 황실 연회에 타고 갔던 마차를 가져오는 바람에 한바탕 욕을 쏘아붙여 주었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한 해프닝 없이 목적했던 곳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 공원이었다.

* * *

‘좋아. 날씨가 엄청 좋은데?’

수도에는 여러 개의 호수 공원이 있다.

그만큼 예쁜 호수들이 많다는 소리인데, 그중 가장 커다란 호수가 바로 슈타트호였다.

이 호수의 이름을 딴 슈타트 공원은수도에서 가장 크고 제일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제국 제일가는 건축가가 신경 써서 만든 산책로는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그 아래 바닥에는 고른 모양의 돌이 콕콕 박혀 있어 볼거리를 더했다.

따사로운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호수.

호수 근처의 잔디밭에는 이미 피크닉 혹은 나들이를 나온 많은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화창하고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분다.

확실히 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아이고, 좋다 좋아. 좋네. 죽기 전에 원 없이 놀아 보자고.’

나는 제국 최고의 호수가 한눈에 펼쳐 보이는 명당자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변엔 따뜻한 햇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와 내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떠나더라?

아마 저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못 볼 꼴 보느니 자리를 피하고 말지. 뭐 이런?

몇몇은 내 눈치를 살피며 내가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옆 사람에게 입 모양으로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남기고 떠났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곱씹었다.

‘그래. 제국 최고의 미친년이 나타났다. 곧 죽을 테니 너무 열받아 하지들 마세요. 예? 이렇게 사는 것도 참…… 쉽지가 않더라구요.’

이 세계에서 막 눈을 떴을 때라면 이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이제는 될 대로 되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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