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1/194)

80화

“햇살 진짜 좋네. 수잔, 내가 말한 건 다 준비되어 가니?”

“예, 공녀님. 곧 공작가 수석 주방장이 직접 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내가 미리 명령했던 지시 사항을 확인하자, 하녀들은 혹시라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조금 늦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는데 말이지.’

바닥에는 시종들이 준비해둔 야외용 고급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여기에 편안하게 앉았다.

이 자리는 반쯤 나무 그림자가 시원하게 펼쳐진 자리라, 눈부심 없이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햇살만큼이나 반짝이는 호숫가를 감상했다.

아, 정말 평화롭네.

한참 푸른빛 호수를 멍하니 감상하는데, 주변에서 작은 실랑이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니 실랑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단호한 목소리와 질문하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째 한쪽이 지극히 익숙한 목소리인데?’

단호한 목소리 쪽은 나와 함께 나온 호위 기사들의 목소리였다.

제트 말고는 영 못 미더운 인사들이긴 하지만 돌아온 내 성질머리를 겪은 뒤로는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일단 참고는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다른 쪽은…….

“이곳은 귀한 분이 계시는 곳입니다. 저쪽으로 돌아가 주십사 합니다.”

“문양을 보아하니, 알츠베이트 가문인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내 가문을 들먹이는 저 익숙한 목소리의 출현에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알츠베이트 공녀님 아니십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은체하는 목소리에 내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기분 좋은 볕 아래 보이는 매우 잘생긴 미남. 회갈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색 눈동자.

날 보며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까지. 내 미간은 더욱 찡그려졌다.

“너 나 따라다니니?”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스토커는 딱 질색인데.

참고로 이건 내가 아스킨에게 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하는 말이다.

내가 그 남자에게 했던 행동이 떠올라서 기분이 매우 별로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녀님께서 싫어하실 행동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걸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이 뭔지 알기나 알고?”

“귀찮게 하는 것. 성가시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안 차일드가 나를 바라보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는 자세였다.

“그저 공녀님 방에서 본 햇살이 너무 좋아 운동할 겸 근처에 나왔을 뿐인데, 이런 행운이 따르다니요. 그저 운이라 생각합니다.”

유들유들한 목소리였다.

다정함마저 담긴 음성.

마치 헤어진 연인이라도 발견한 듯한 애틋하기까지 한 저 남자의 시선에 나는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봐도 저건 선수야, 선수.’

……차라리 내가 아스킨에게 한창 들이댈 때 저 남자에게 한 수배우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은 미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공녀님,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호위 기사들부터 물러 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왜?”

“저희 사이가 아직 멀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호위를 가운데 두고 대화를 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넉살맞고 서글서글한 모습 속에서 나는 내가 아스킨에게 행했던 내 태도가 절로 떠올랐다.

그때는 아스킨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정작 방패가 되어 보니…….

‘X같은 기분이구나.’

내가 왜 새삼 아스킨 그 인간의 기분을 느껴 봐야 하지?

‘아니, 저 인간은 어떻게 된 게, 내가 그 망할 약혼자한테 당한 대로 그대로 따라 하는 거지? 이 자식, 이거 진짜 뭐야.’

얼마 안 가 죽을 거, 굳이 분노에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로 복잡해하는 사이, 호위 기사들 틈으로 거리를 좁히려는 행동까지 하는 이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저건 무슨 또라이인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켜.”

호위 기사들이 내 눈치를 보며 옆으로 물러났다.

자리에 쪼그려 앉았던 이안이 탁탁 바지를 털면서 일어났다.

빙긋 웃는 얼굴은 확실히 이 볕 가득한 풍경과 어울렸지만 내겐 딱히 감흥을 주지 못했다.

“공녀님의 호의에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냄새 나니까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내 단호한 말에도 이안은 미소 한 점 흩트리지 않았다.

“이런 제가 무례한 짓을 할 뻔했군요. 혹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가서 씻고 다시 올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대로 꺼지면 되니까.”

이 남자에게선 냄새 하나 나지 않았고 오히려 향기마저 나는 듯했으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이런 행운이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제 손으로 날려 보내기엔 너무 아쉽습니다.”

나는 간드러지는 척 이죽거리는 저 인간의 면상을 당장 한 대 쳐서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번 모습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녀석은 뺨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이를 핑계로 오히려 더 끈덕지게 달라붙을 게 뻔한 놈이었다.

‘……호위 기사들에게 냅다 들어다가 저 호수에 빠트리라고 할까?’

이런 때만 가장 꿈틀거리는 샤를리즈의 본능과 몸에 남은 기억들이 온갖 나쁜 고문을 속살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공녀님께서는 이곳에 자주 와 보셨습니까? 제국을 떠났을 때 가장 그리웠던 장소가 바로 이곳인데 역시 이곳은 저랑 많은 게 통하나 봅니다. 저랑 같이 걸으실래요? 제가 이곳에서 숨은 명소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좀 닥쳐.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어 댈 거지? 장사꾼의 시간은 귀하다더니 역시나 허풍들이었군.”

“공녀님께 투자하는 시간이라면 그 어떤 황금보다 귀한 시간이니 저야말로 최고의 장사꾼 아닌가요?”

나는 속으로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 정말 어떻게 한마디도 지지를 않네.’

저걸 그냥 지옥의 조동아리라고 부를까? 불구덩이에 던져 놔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저 호수에 빠트리면 입만 동동 뜨는 거 아니야?

나는 짜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 멀리서 걸어오는 제트를 발견했다.

눈을 조금 가늘게 떠서 자세히 보니, 제트의 옆으로 하늘하늘한 소녀의 형체가 보이는 걸로 봐서…… 내가 여기서 애타게 기다린 인물도 함께였다.

분명 아리아였다.

내 얼굴로 기쁜 표정이 스쳤다.

이것저것 신경 쓸 때야 웃는 것도 하나하나 조심했다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었다.

“…….”

유들유들하게 말하던 이안 차일드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고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이 또한 상관없었다.

이제 이 원숭이 같은 놈을 보내 버려야 할 시간이 되었단 뜻이었으니까.

“야, 너 이제 꺼져.”

“아쉬워서 안 됩니다.”

“……너, 진짜 내 테리의 밥이 한번 되어 볼래?”

“테리라면…… 소문 속 무시무시한 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럼, 개밥이 되면 공녀님을 매일 볼 수 있는 건가요?”

……이 또라이를 어떡하면 좋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꺼져.”

“지금 가면 다음번엔 저와 함께 이곳에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어? 내가 너랑 여길 왜 와?”

“그럼 저도 못 갑니다. 공녀님께서 가실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이거 말로는 못 알아먹는 인간이네?

내가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호위 기사들에게 눈짓하자,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이안 차일드를 에워쌌다.

이안은 호위들의 험악한 인상에도 전혀 위축됨 없이 그대로…… 바닥에 앉아 버렸다.

……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공녀님 앞에서 미천한 제 무예 실력을 보여 드릴 수도 없으니, 전 그냥 여기 앉아 있겠습니다.”

“뭣들 하는 거야? 저거 어서 빨리 치워.”

꼴 보기 싫으니까. 갈수록 찌푸려지는 내 미간에 호위 기사들이 이안 차일드를 일으키기 위해 팔과 다리를 잡고 들어 올리려 노력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는 못 갑니다. 이런 행운을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이젠 아예 드러누워 깽판을 피우는 이안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허어, 이 자식 뭐야? 뭔 학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줄만 알았더니, 이거 완전 초딩 수준이잖아?’

게다가 이 장정들이 들어 올리는데 꿈쩍하지 않는 건 무엇인지.

의문과 어처구니없음이 공존했다.

“어, 어? 방금 웃으신 겁니까? 미소하시니 미모가 더욱 환해지시는군요.”

내 미소를 본 이안은 이제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체통도 잃고 구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 한번 이 또라이는 뭐지 싶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간 저 인간이 예법을 보통 잘 지켰던가.

게다가 생긴 것도 여자깨나 울렸을 것 같은 귀공자풍 바람돌이처럼 생겼다.

여기에 더해 가문은 대대로 큰 상단을 운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외교 사절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개인이 지닌 말재주 또한 상당하다는 소리였다.

이거야말로 지금 대화하면서 느끼고 있지 않나?

그래, 어딜 봐도 엘리트 길만 걸어온 것 같던 인간이…….

‘대체 저게 무슨 짓이야?’

하필 저런 짓이 내가 약혼자인 아스킨을 보겠답시고 그놈의 성에서 철퍼덕 주저앉았던 행동과 너무나도 똑 닮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