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2/194)

81화

……알고 보니 거울 보는 것 같이 나랑 비슷한 인간 아니야?

내가 얠 싫어하는 게 동족 혐오인가?

‘아니, 아니지.’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저 남자의 말재간을 가지고 있었다면 차라리 아스킨 그 인간을 지금쯤 잘 구슬려서 1년 계약 약혼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을까.

그래, 저 남자와 나는 다르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화가 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저 남자는 사사건건, 사소한 행동 하나마저도 내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툭툭 건드린다.

그러나 이건 이거고, 저 남자가 굴러다닐 줄은 몰랐던지 호위 기사들은 거의 넋이 탈출할 것처럼 그를 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 미친놈은 대체 뭐지?’ 하는 얼굴인데 매우 공감한다.

그러나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 주위로 피어오르는 흙먼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아리아와 제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못 볼 꼴을 저 순진한 아가씨에게 절대 보여 줄 수는 없지.’

내게 굳은 결심이 섰다.

아주 옳은 판단이다. 그렇기에 이 찰거머리 원숭이 같은 인간을 달래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잘생겼는데, 또라이라니. 로판식 못 먹는 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같이 와 준다고 하면, 얼마 만에 내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지?”

“언제요?”

“뭐?”

“언제 와 주실 겁니까?”

이안이 누운 채로 씩 웃었다. 어쩐지 정중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을 때보다 유쾌한 웃음이었다.

“날짜를 확실하게 말씀해 주셔야죠. 저 바보 아닙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헛숨을 토해 냈다.

“……이게 진짜.”

물론 샤를리즈 몸에 내제된 패악기와 본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기도 잠시.

쾅!

나는 구두굽이 푹신한 바닥에 꽂히는 걸 느꼈다.

이 굽이 이렇게 훌륭한 흉기가 될 수 있구나 감탄했다.

‘한국의 대법원 판례에서 두꺼운 법전은 흉기가 되지 않는다던데, 이런 구두는 어떨까.’

어차피 이곳에서는 내가 손에 무엇을 쥐든 내가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인 이상 내가 쥔 그 어떤 것도 흉기가 되지 않고 법은 내 편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구두 굽으로 죽기는 싫은데 말이죠.”

이안은 자신의 뺨 옆에 아슬아슬하게 박힌 구두 굽을 보면서 웃었다.

미세하지만 놀라 굳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당장 이 미친 원숭이 같은 인간을 밟아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일주일 안. 이제 됐지? 빨리 사라져.”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반듯한 신사가 되는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으로 입을 벌렸다.

머리나 옷에 붙은 흙이나 풀잎이 아니었다면 어디 굴렀다고는 믿지 못할 완벽한 자태였다.

……이 자식, 이중인격인가?

이안은 빙긋 그림같이 미소하며 슬쩍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공녀님!”

호위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나서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위협을 가하거나 개수작을 부리는 게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은 얌전히 고개를 숙여 그저 속삭였을 뿐이었다.

마치 이 이야기를 나에게만 전달하고 싶다는 듯이.

“나중에 모른 척하시면 저기 오고 계시는 아리아 레무트 공녀님께도 모두 다 알릴 겁니다.”

나는 움찔했다.

이는 속으로 쿡 찔렸을 뿐 겉으로는 곁눈질로 이 반듯한 인간을 노려볼 뿐이었다.

‘뭐야, 이 인간. 진짜 점쟁이야 뭐야?’

애초에 이 공원에서 만난 것도 범상치가 않았다.

게다가 아리아는 세간에 얼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타국에 있었다며?’

그러니 저 멀리서 오는 실루엣을 보고 바로 확신할 수 없을 텐데.

‘정보력이냐, 아니면…….’

나는 일단 시치미를 뚝 떼기로 마음을 먹고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꺼져. 너 때문에 이 호수를 볼 수가 없잖아.”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샤를리즈 공녀님.”

우와, 재수 없어. 지금 저 표정, ‘후훗, 난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할게!’ 하는 거야 뭐야?

……역시 본능에 몸을 내어 주고 뺨이라도 시원하게 후려쳐야 했나?

아냐, 그랬다가 다가오던 아리아가 보게 되면 어떡해.

심약한 예쁜 그 아가씨 눈에는 좋은 것만 보여 줘야 한다고.

‘게다가 내가 언제 이름을 허락했다고. 저 망할 또라이 같으니.’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안은 예를 갖추는 걸로 모자라 순식간에 아리아가 오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발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뛰어갔다.

좀 과장해서 저놈이 아스킨 같은 검사라고 해도 믿을 만한 속도였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네. 아…… 이 제국엔 왜 이리 미친놈들이 많은 거야.’

나는 얼굴을 짚었다.

사사건건 내 일을 훼방하려 드는 폭군 오빠 놈부터,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뜬금없이 이전과 다른 사람 같다며 툭 던지는 보좌관 노아…… 지금 사라진 저놈까지.

나는 이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지금 내 표정에 드러나 있을 똥 씹은 표정, 아니.

불쾌감을 지우는데 최대한 집중했다. 그러면서 순백의 아가씨를 만날 준비를 마쳤다.

마침 아리아는 딱 적절한 타이밍에 내 앞에 도달했다.

“고, 공녀님을 뵙습니다……!”

얼른 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새하얀 은발 위로 가지런한 정수리를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또라이 같은 놈들이야 내가 알 바인가.

알츠베이트와 아스킨의 기 싸움도 지쳤다. 샤를리즈의 업보 따위 개나 주라지.

‘어차피 뒈질 거. 기분 좋은 것만 보고 죽으련다.’

난 손을 뻗었다.

“또, 또. 친구 사이에 예를 차리면 우리가 가까워지겠어요?”

“아……! 죄송해요, 샤를리즈 언니.”

나는 돌아온 호칭에 기분 좋게 웃었다.

아리아는 내 미소에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빨리 앉아요.”

아리아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아리아는 내 말에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내 손에 활짝 웃으며 야외용 고급 의자에 함께 앉았다.

앉자마자 예쁜 테이블 위에 펼쳐진 호화롭기 짝이 없는 피크닉 도구들을 신기하게 보면서 감탄했다.

이것이 1차 감탄이었다면, 곧 호수를 보고서 멍하니 보면서 감탄을 토해 냈다. 2차 감탄이었다.

‘크으, 집토끼를 풀밭에 풀어 주고 구경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필 정말 딱 눈 토끼처럼 생긴 아가씨라, 기웃기웃 보고 있는 모습이 토끼가 킁킁 풀 내음을 열심히 맡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물론 정말 야생에서 이런 푸른 풀밭에 하얀 토끼를 내려놓았다간, 털색 때문에 잡아먹히기 십상이겠지만.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단 말이지.’

나는 턱을 괴며 주변을 곁눈질했다.

명당자리에서 내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한껏 물러났을 뿐 이 공원에서 사람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저 멀리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도 신기해서 구경했을 광경이긴 했다.

‘엄청난 미소녀와 함께 있는 악녀라니……. 그래, 재밌기도 하겠다.’

나는 그들에게서 관심을 꺼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구경은 다 했어요?”

“아……!”

아리아가 창백하리만치 하얀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면서 끄덕끄덕 흔들었다.

……어쩜 이런 귀여운 생물이 있지. 그 남자 동생이 아니라 내 동생이면 좋겠다.

‘그럼 알츠베이트의 돈을 펑펑 쓰면서 놀아 주고, 치료 방법도 찾아 주고…….’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착실히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예요? 이렇게 나와도…….”

편지를 보내면서 걱정했던 부분은 이거였다. 아리아가 과연 밖에 나올 수 있을까?

그 말에 아리아는 자신 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활짝 웃었다.

“주치의가 그랬어요, 지난 3년을 통틀어 가장 좋은 컨디션이라고요!”

아리아는 그렇지 않아도 이 정도로 컨디션이 회복되면 꼭 해 보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이렇게 수도 공원에 피크닉을 오는 거였다고.

그 외에도 의상실 가 보기, 도시의 거리를 걸어 보기, 식당에 가 보기, 티 룸에 가 보기…….

상기된 얼굴로 하나하나 말하는 것들을 나는 유심히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다가 보니까 웬 남자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언니, 괜찮아요?”

“아하. 혼자서 원숭이 흉내를 내길래 내가 쫓아 보냈어요.”

역시나. 아리아 눈에 완전히 안 보이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안 차일드 그 남자를 보긴 봤던 모양이었다.

나는 궁금해하는 아리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싱긋 예쁘게 미소했다.

그러면서 뒤에 기다리고 있던 하녀 수잔에게 손짓했다.

이안 차일드가 난동을 피우는 사이, 제 시간에 맞춰 도착했으나 차마 맡은 바 소임을 하지 못했던 알츠베이트 공작가 소속 수석 주방장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내 눈짓에 익숙하게 착착 세팅하기 시작했다.

주방장과 함께 따라온 시종들이 각가지 음식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밖에서 차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근사한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