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3/194)

82화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샤를리즈라면 코웃음을 칠 소소한 규모였다.

그 악녀는 제 사치를 위해 야외에 무려 식당을 새로 짓도록 시켰던 적도 있는 것 같으니까.

‘티브이에 나오는 재벌들 야외 결혼식 보면서 신기했는데. 이런 느낌인가.’

굳이 내 머릿속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으면 이것일 것 같아 열심히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나와 비슷하게 감탄한 건지 아리아는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차린 건 많이 없지만 먹어 봐요.”

“헉, 언니……. 이게 차린 게 별로 없는 거라구요? 제 생일상보다…….”

“음식 식겠다.”

“핫, 잘 먹겠습니다!”

나는 아리아가 부담스러워할 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던졌고, 아리아는 말하던 것도 잊고 얼른 인사를 보냈다.

‘제트를 보내길 잘했던 것 같네.’

사실 정말 아리아를 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반 정도, 아니 그보다 높은 확률로 보지 못할 거라 생각도 했던 참이었는데.

제트는 행동이 빠를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한 점심 식사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기까지 했다.

‘……유능한데?’

사실 전담 하녀들과 별개로 지금 제트의 이런 행동처럼 내 손발처럼 움직여 줄 사람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본래 샤를리즈 정도의 신분이라면 놀이 친구이자 시중을 들되 귀족 신분인 시녀가 있는 것이 마땅했으나, 샤를리즈의 성격이 이따위다 보니.

‘다 도망갔네.’

나는 떠오르는 샤를리즈의 기억을 바라보며 입 안에 얌전히 음식을 넣었다.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아하게 씹었다.

폭군 오빠에게도 노아라는 유능한 보좌가 있잖아? 알츠베이트 공작에게도 보좌가 있고, 아스킨에게도 벤이란 보좌가 있었지.

알츠베이트 공작의 보좌관은 얍삽한 공작에 능했고, 뒷수습의 대가였다.

샤를리즈의 패악 1차 수습은 언제나 그 사람이 했으니까.

물론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가 계속 살 수 있을 때나 바라던 것이었다.

곧 죽을 마당에 이제 와 유능한 손발을 찾으면 뭐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맛있었나 보다.’

볼에 잔뜩 넣고 우물거리던 아리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씩 웃으며 시종에게 눈짓했다.

“천천히 먹어요. 이것도 좀 먹어 보고.”

아리아는 시종이 내미는 음료가 든 잔을 받아 수줍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언니, 이거 너무 맛있어요.”

“나도 좋아해요.”

아리아가 한참 재잘재잘 떠들다가, 문득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는…… 이렇게 맛있는 걸 드시는데 어떻게 살이 안 찌죠?”

순진한 눈동자는 정말 궁금해하는 눈인지라, 나는 참지 못하고 푸핫 소리 내어 웃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진작 밖에서도 만날 걸 그랬네요.”

물론 아리아의 몸 상태가 따라 줘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 아스킨 그 남자 없이 둘만 마주하는 시간이 이렇게 평화로울 줄은 몰랐는걸.

‘피톤치드가 이런 걸까…….’

나는 눈앞의 토끼 아가씨 얼굴에 ‘힐링’ 두 글자가 새겨진 건 아닐까 유심히 보았다.

아리아는 무엇이 즐거운지 나와 눈을 마주치는 족족 먹다 말고 헤헤 웃었지만.

그렇게 열심히 먹던 아리아는 몸이 허약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먹는 속도가 점점 떨어졌다.

이내 얼마 먹지 못해 포크를 놓았다.

“언니…… 저 배가 너무 불러요.”

“벌써요? 아직 디저트도 남았는데.”

아리아가 아쉬움을 담아 나를 보았다.

……어쩐지 집을 잃은 토끼처럼 보여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아쉬운 건가?

“저, 지, 진짜 못 먹을 거 같아요. 음식이 여기, 여기. 목까지 꽉 찼어요. 흑.”

아리아가 자신의 가냘프고 새하얀 목을 꾹 누르며 울상을 지었다.

진심으로 서글픈 얼굴이라 나는 흡, 배에 힘을 주고 웃음을 참았다.

참자. 참자. 아리아는 진짜 서럽다잖아. 크흡.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도도하게 말했다.

“그럴 땐 잠시 일어났다가 앉아 봐요. 그럼 공간이 생길 테니.”

이건 내 회식 스킬이다.

특히나 사장이 1년에 한 번 한우를 살 때는 동기들끼리 공유하던 꿀팁이라고나 할까.

허리띠 풀고 먹는 날엔 어떻게든 회사 돈으로 많이 먹어야 했다.

이런 횡령(?)이라도 해야 한다며 동기들과 함께 결사적이었다.

“네? 아하하하하, 언니 너무 웃겨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아가 곧 맑은 소리를 내며 꺄르르 웃었다.

어쩜 이 순수한 아가씨는 웃음소리마저 쟁반 위의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 같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에 나마저도 포크를 놓고 턱을 괜 채 씩 웃었다.

아리아는 한참 웃다가 고개를 돌려 호숫가를 바라봤다.

호수가 가장 잘 보이도록 테이블을 놓았기에, 고개만 돌리면 근사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예전에 티브이에서 뷰가 끝내주는 풀 빌라들은 이런 식으로 야외 배경을 보면서 먹을 수 있게 만들었던데, 가격이 사악했지?

새삼 참 예쁜 풍경이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침묵 속에서 호수를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아리아가 말했다.

“언니, 여기 진짜 예뻐요. 꼭…… 와 보고 싶었는데, 감사해요.”

순간 ‘죽기 전에’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나는 멈칫하는 대신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넘겨주었다.

“여길 처음 온다구요? 왜요?”

분명 아리아가 아픈 건 맞았지만, 지금처럼 컨디션이 아주 좋았던 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땐 오빠랑 같이…… 놀아 본 적이 없는 걸까?

“…….”

아리아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어쩐지 아리아도 자신의 성에 있는 것보다 편해 보인다고 느끼면…… 이건 나만의 착각일까?

내가 아리아랑 있는 이 시간이 즐거워 이렇게 보이는 건가.

“여긴 정말, 너무 좋아요.”

아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예쁜 얼굴에 차차 웃음을 지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시는 대로 몸이 약해서 오빠가 나가지를 못하게……. 정말 못된 오빠죠?”

그렇게 말하는 아리아의 얼굴에서는 원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외로움이 엿보였다.

내가 감히 무어라 위로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아리아는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아리아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니가 보내 주신 빗을 멋대로 버리기나 하구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리아가 가슴 앞에 빗을 꼬옥 쥔 채로 고개를 푸욱 숙였다.

‘빗을 버렸댔지.’

편지에서도 알려줬던 사실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물론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다.

내가 아리아의 선물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 선물이 아리의 손에 못 갈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별스러울 것도 없어서 신경 쓰이지는 않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순수한 아가씨 손에 못 갔을 거라 생각하니 서운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저 아가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오늘은 잘난 오빠 이야기는 빼기로 할까요?”

그 남자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리아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끄덕였다.

“네, 좋아요. 언니…… 혹시 부탁이 하나…….”

“그런 말 없이 바로 부탁해도 좋아요.”

나는 싱긋 웃으며 손을 까딱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나한테 아리아란 친구는 그런 존재니까요.”

“……그럼, 저 머리 또 빗겨 주실래요?”

나는 흔쾌히 끄덕였다.

우리는 의자를 옮겨 나란히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아리아는 자신의 품에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곱게 쌓인 빗을 꺼냈고, 나는 아리아가 내밀고 나서야 빗이 끝만 뾰족하게 튀어나왔을 뿐 곱게 포장되어 있음을 알았다.

아주 곱고 예쁜 천이었다.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나는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빗을 뭘 그렇게 꽁꽁 싸매서 다녀요?”

“그, 그게…… 끙, 너무 예뻐서 혹시라도 제가 떨어트려서 깨지기라도 할까 봐요.”

나는 빗을 받아들며, 물끄러미 이 물건을 응시했다.

곰곰이 고민하는 내 기색에 아리아의 얼굴로 의문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저 빗일 뿐인데.”

“네?”

“깨지면 또 줄 테니 그냥 편안하게 쓰라는 말.”

나는 빗을 장난스럽게 휙휙 흔들며 말했다.

“이리로 돌아앉아 봐요.”

“네!”

아리아가 신나서 돌아앉았다.

아직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또 또래보다 가냘픈 탓에 우리는 앉은키 차이도 꽤 차이가 났다.

‘우와, 이 아가씨 두상도 예쁘잖아?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내 얼굴도 예쁘기는 하지만, 이 아가씨가 크면 정말 엄청나지 않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머리를 빗겨 주기 위해 빗을 들었을 때, 나는 순간 묘한 감정을 느꼈다.

‘……뒷모습.’

내가 눈을 뜬 후, 내게 이렇게 편안하게 몸을 내어 주는 사람이 있었나.

가족이라던 할아버지는 내킬 때만 인자하며 돈만 쥐여 주면 다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폭군 오빠야…… 속을 알 순 없지만 그것이 결코 순수한 호의는 아닌 것 같았다.

가족이 이러했고, 샤를리즈는 친구도 없었다.

있다면 시기와 동경이 뒤섞인 나쁜 짓 메이트와 적, 다시 적, 그리고 원수. 자신이 쌓은 업보만 있을 뿐.

이것들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로 샤를리즈로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게 뒷모습을 내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면서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깔았다가 이내 가벼이 손을 움직였다.

“아프면 꼭 말해 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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