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한참 신경을 잔뜩 기울여 머리를 빗어 주는데, 내 눈으로 헤져 버린 아리아의 옷깃이 보였다.
잠깐이지만 손이 멈췄다.
“언니?”
멈춰진 내 손길에 아리아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이내 손을 멈추고 말했다.
“아리아, 지난번에 내 머릿결이 부럽다고 했죠?”
“네? 네에…….”
아리아는 멈춰선 손길에 뒤돌아 나와 눈을 맞추면서도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아리아의 뺨이 예쁘게 상기되었다.
“사실 머릿결뿐만 아니라 언니의 모든 것이 부러워요. 아주 많이, 음, 그, 동경해요!”
……역시, 사람이 이렇게 귀여우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왠지 아스킨 그 남자를 이것 하나만은 이해할 것 같았다.
여동생이 멀리 못 나가게 한 건 불안해서가 아니겠어?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 다 하니 말이지?
“과찬이네요.”
“진심이에요!”
연회에서 망나니 영애들이 나를 보는 것과는 다른 눈빛이었다.
시기, 질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동경 어린 시선. 이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 참.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눈빛이 너무 빛나잖아.’
그 눈빛마저도 이 동그란 얼굴에 잘 어울리긴 했다.
잘 어울려서 무서웠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는 무조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예요?”
“네?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웃으며 아리아의 손을 잡고 빗을 돌려주었다.
아리아는 빗을 소중하게 꼬옥 쥐며 눈을 깜빡거렸다.
“나처럼 되고 싶다면서요?”
나는 아리아의 손을 잡고 휙 일어났다.
이쪽은 워낙 가벼워서 내 힘으로도 일으킬 수 있었다.
“일단 일어나서 갑시다.”
나는 아리아의 손을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서 내 마차로 들어갔다.
아리아를 먼저 마차에 들여보낸 뒤, 시종을 시켜 아리아가 타고 온 마차에 내 명령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내 마차를 모는 마차와 호위 기사들에게도 목적지를 전달했다.
내 명을 받은 일행은 마차를 몰아 어디론가 출발했다.
* * *
“뭐? 아리아가 알츠베이트 공녀를 만나러 갔다고?”
같은 시간, 레무트 공작가는 발칵 뒤집어졌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아스킨은 사색이 되었다. 보고를 올리는 벤과 기사들의 얼굴 또한 사색이 된 채였다.
“……예, 알츠베이트 기사가 직접 와서 아가씨를 모시고 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쾅!
아스킨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친 순간 굵은 원목 책상에 금이 쩌저적 갔다.
힘 조절을 했음에도 이 정도라니, 벤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아스킨이 진정 분노한 얼굴이었다.
그는 분노할수록 더욱 차가워지는 주인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전혀 화가 보이지 않는 저 모습은…… 정녕 얼마나 화가 나신 거란 말인가.
“대체 말리지 않고 뭘 한 거야!”
아스킨의 소리가 높아졌다.
“아리아님께서 고집하셔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그 여자의 부름인데!”
아스킨이 생각한 바를 벤이 생각하지 못할 리는 없을 테고, 벤은 이 모든 일을 방관했다.
결론을 내린 아스킨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그게…… 아리아 님께서 너무 간절하게 부탁을 하셨던지라…….”
이 저택에서 아리아가 진심을 다해 부탁했을 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금 이렇게 분노하는 아스킨조차도 모진 마음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아리아는 너무나 착해서 부탁조차 잘 하지 않는 아이였다.
욕심이 없는 걸까 고민하게 만들었을 선량한 여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자신이 없는 사이 간절히 부탁했다니…….
아스킨이 숨을 푹 내쉬었다.
분노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아스킨을 바라본 기사들과 벤이 공통으로 느낀 감이었다.
“그 기사가 정말 샤를리즈 알츠베이트의 기사가 맞았나?”
“네, 넷! 이전에 그 공녀와 함께 나타난 적이 있기에 똑똑히 기억합니다.”
벤이 군기가 바짝 든 채 대답했다.
벤은 군인 출신의 보좌관으로서 아스킨과 옐로우 로드 토벌에도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 보니 긴장할수록 군인일 적의 버릇이 함께 나오곤 했다.
“……공녀가 아니라 공작이 보낸 하수인이거나 기사일 확률은?”
“그건…… 없습니다.”
군기가 든 채 빳빳하게 선 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 쪽 기사였다면, 공녀님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아리아 아가씨께서도 제게 외출을 지시하시거나 따라나서지 않으셨을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리아를 움직인 것이 샤를리즈의 이름이란 소리였다.
아스킨의 미간으로 주름이 졌다.
‘으윽, 더욱 화나셨구나……!’
거세지는 기세 속 기사들은 속으로 비명을 꾹 참으며 인내했다.
“무엇보다도…… 알츠베이트 공작 쪽에서 아리아 님이 공작님께 어떤 존재이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건드리거나 납치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황제 록시디언이 알츠베이트 공작을 두고 늙은 너구리라고 험담하지만, 그보다는 늙은 여우에 가까운 존재.
그 노련하고 약은 노귀족은 영웅에게 건드려서는 안 될 지점이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노귀족의 사냥 방식은 숨통 구멍을 트여 준 채 차차 입지를 좁혀 나가는 것.
납치 같은 험악한 방식은 겉으로라도 품위를 추구하는 그의 방식에 맞지 않았다.
‘속된 말로 눈이 돌아 버린 우리 공작님이 모든 걸 버릴 각오로 쳐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게다가 샤를리즈와 파국을 맞이했다고는 하나, 알츠베이트 공작 쪽에서는 레무트를 멋대로 양념하여 꿀꺽할 수 있는 곳으로 보았다. 이제와 강경 수단을 쓸 이유가 없다.
위험 요소가 논리적으로 완전히 제거된 뒤에야, 아스킨은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아리아, 그 애는 정말 자기 의지로 샤를리즈의 기사를 따라간 것이다.
어째서?
‘내가 분명 그 여자와는 더는 엮이지 말라 말했는데?’
선하고 착한 아이였다.
아니다. 선하고 착해서, 그 여자가 만든 영악한 꾀에 빠져 홀린 듯 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순간 아스킨의 눈앞으로 한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비가 쏴아아 내리는 풍경 속, 빗물 아래서 서럽게 우는 얼굴이었다.
이 빗물 아래라면 제 눈물도 가려질 줄 안다는 듯이, 서럽게 일그러지던 얼굴.
끝까지 자존심은 놓지 않은 얼굴이라 생각했건만, 어찌하여 떠오르는 건가.
아스킨은 분노했다.
그래 이건 분노 때문이다.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사람에 대한 분노.
“……어디로 갔는지 당장 알아내. 내가 직접 갈 것이다.”
기사 중 하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저토록 표정이 없으시다니, 이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로 화가 나신 거란 말인가.
벤 또한 걱정이 깊어졌다.
‘……알츠베이트 공녀를 살해하시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 공녀는 언젠가 등에 칼을 맞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원한을 좀 샀어야지…….
이미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칼을 맞을 뻔한 횟수만 한 손가락 횟수를 넘어간다고 했다.
벤은 그 소식을 듣고 그럴 법하다 생각했다.
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아리아에게서 들었던 목적지를 말했다.
수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공원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아스킨의 표정이 묘해졌다.
“……공원? 그 여자의 지하실이 아니라.”
“예, 그렇습니다.”
벤은 겁먹은 표정을 한 채 소심하게 덧붙여 보았다.
설마하니 제가 아가씨가 그 여자의 지하실로 가게 두겠습니까……. 목적지를 들었다면 결단코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아리아의 옆에 레무트 영지 기사를 한 명 함께 보냈다.
영지에는 몇 없는 마법 장치도 딸려서 보냈으니, 만약 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세트인 마법 장치에 신호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장치는 아직까지도 잠잠했다.
무엇보다도 아리아가 자신 있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장담했다.
벤은 솔직하게 아리아가 그토록 간절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충분히 화나실 일이지.’
벤은 숨을 참으며 자신에게 떨어질 처분을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왜일까, 줄곧 아스킨이 분노에 찬 상태라고 생각했다.
한데, 볼수록 아스킨의 상태가 이상했다.
저 표정 없는 얼굴이 분노라기에는…….
벤은 아스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지만, 아리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수하로서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저건 분노일 거야. 암. 암. 뭔가 누그러진 표정 같다니, 말도 안 되잖아?’
그때였다.
“고, 공작님.”
아스킨이 참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여니 베테랑 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아스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님, 저어…… 알츠베이트 공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