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번엔 아스킨 뿐만 아니라 벤은 물론 함께 있던 기사들의 기세도 흉흉해졌다.
‘감히 이곳에 나타나다니, 어디라고 온 것인가.’
그러나 정작 가장 분노해야 할 아스킨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분명 그의 주인은 분노할수록 표정이 사라지고 더욱 차가워지지만…… 분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 레무트를 뭘로 보는 건지.”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던 듯 아스킨의 얼굴로 만년설 같은 싸늘함이 내려앉았다.
아스킨이 잡은 손잡이가 손안에서 우그러진 모습을 본 벤이 눈짓으로 하녀를 물렸다.
“공작님, 일단 알츠베이트 공작을 만나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리아 님은 지금 당장 제가 찾아서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이 순간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왜 레무트 영지에 나타났단 말인가?
벤은 머릿속으로 최악의 가정부터 떠올렸다.
아리아가 그토록 간절한 모습은 처음이라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게 저 간악한 알츠베이트 공녀와 공작의 합작이라면?
그렇다면 아리아가 위험했다.
조금 전 아스킨의 분노를 맞닥뜨릴 때와 다른 싸늘함이 벤의 속을 헤집었다.
어느 쪽이든 알츠베이트 공작의 방문은 불길한 상상만을 낳았다.
그가 이 지경이니 아스킨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
아스킨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감정이 앞섰던 자신의 상태를 누그러뜨렸다.
동시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아리아부터 찾아. 찾게 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아스킨이 눈을 다시 떴을 때,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던 그의 별칭, ‘겨울의 늑대’라는 이름답게 차갑고 사납게 가라앉은 시선이었다.
아스킨의 명을 받은 벤이 기사들과 함께 빠르게 뛰어나갔다.
홀로 남은 아스킨은 검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검을 뽑은 기사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히 옮겼다.
그는 복도에 남아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공작을 응접실로 안내해.”
“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무트 저택의 응접실로 알츠베이트 공작이 등장했다.
이미 응접실에 앉아 있던 아스킨은 알츠베이트 공작의 등장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차를 마셨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를 부득 갈았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제 앞에서 공작이랍시고 당당한 꼴이라니. 알츠베이트 공작이 표정을 지워 내며 좀 더 걸어가자, 아스킨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은 채로 알츠베이트 공작을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숨기지 않은 제국 최강 기사의 기세에 알츠베이트 공작은 온몸에 저릿함을 느꼈다.
‘감히, 이 몸을 검기 따위로 압박해?’
알츠베이트 공작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 눈빛 아주 오랜만일세.”
“…….”
두 공작이 서로를 응시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의 주름진 얼굴로 조소가 스쳤다.
“망해 간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직 귀족일진대 예를 차리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인가?”
“예는, 차릴 만한 인간에게나 차리는 것이지.”
아스킨이 평온하게 대꾸했다.
“어쩐 일이지?”
노골적인 불청객 대우였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지독한 불쾌감을 느끼며 픽 웃었다.
“나도 내 귀중한 시간을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에게 쓰긴 싫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정말이지 시간 낭비였군. 알츠베이트 공작은 이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파혼, 진행해 주도록 하지.”
아스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가 그간 그토록 바라던 일을 마주했음에 불구하고.
“그 말을 하러 이렇게 직접 온 건가?”
알츠베이트 공작은 속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까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노공작은 곧 눈을 가늘게 좁히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아스킨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낯으로 노공작을 마주했다.
“끝까지 당당한 척하는 건지, 믿을 만한 뒷배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뒷배 부디 단단하기를 바라보겠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으름장을 놓은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차일드 가문의 장자에게 샤를리즈를 주기까지 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으로서는 통 크게 쓴 셈이었다.
이따위 뻣뻣한 놈보다야 차일드의 그놈이 눈치도 썩 빠르고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꼴이 그의 입맛에 딱이었다.
“계산은 계산이니 확실히 하지.”
알츠베이트 공작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고, 이를 던지듯이 아스킨 앞에 내밀었다.
아스킨의 시선은 미동 없이 노공작의 얼굴을 향할 뿐이었다. 이내 시선을 느릿하게 옮겼지만 마치 그렇게 해 주겠다는 식의 오만한 시선이었다.
내민 서류를 살펴보던 아스킨은 이내 헛웃음과 함께 알츠베이트 공작을 노려보았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라는 별칭이 과연 과언이 아니군.”
“허허허허, 그대가 칭찬도 할 줄 알던가? 그런 인간에게 내 피 같은 돈을 먼저 빌려간 건 그쪽이라네. 아니 그런가?”
껄껄 웃던 알츠베이트 공작의 얼굴은 뒤로 갈수록 점차 노련하고 사나운 빛을 띠었다.
“나는 공작처럼 무례하진 않아서, 그대가 실추시킨 내 가문의 명예 값은 받지 않기로 한 건데 오히려 감사 인사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공작도 잘난 능력만 믿고 주변은 보지 않는다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
아스킨은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이죽거리는 알츠베이트 공작이 보기 싫었다.
보기 싫을 뿐일까,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것을 견뎌야 했다.
이는 본능이었다.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지점에 위치한 인간을 향한 혐오스러움.
‘아리아와 관계된 일은 아니었던가.’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생각에 빠진 이성이 존재했다.
아스킨은 곧 알츠베이트 공작이 내민 서류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귀찮다는 듯 서류를 던지듯 돌려주었다.
자신이 행한 그대로 돌려받은 알츠베이트 공작이 모멸감으로 뺨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테이블에 던져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알츠베이트 공작은 서명된 것을 꼼꼼하고도 빠르게 확인한 뒤에 만족한 듯 자신의 품에 잘 넣었다.
“피차 인사 따위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난 이만 가 보지.”
노인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이죽거렸다.
“한 달. 이 안에 은화 한 닢 차이 나지 않게 잘 부탁하겠소.”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문을 나간 뒤, 그 뒤에도 아스킨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힘을 조절하지 않은 탓에 테이블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하아, 하아…….”
마지막까지 조롱하는 알츠베이트 공작의 행태에는 아주 신물이 났다.
지긋지긋했고 진저리 났다.
일시적이지만 제 목을 죈 족쇄를 치워 낸 것 같은 기분에 후련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계속해서 끓어오르는 화를 느끼는가?
풀풀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아스킨은 오싹하도록 이상한 제 감정을 마주했다.
* * *
고급스럽게 생긴 건물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의 형태와 작게 달려 있는 간판을 보며 흡족함을 느꼈다.
‘이런 고급스러운 곳은 오히려 간판이 없거나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더니 진짜였네.’
샤를리즈의 기억을 더듬었다.
돈많은 VVIP를 취급하는 가게는 간판이 필요 없다. 손님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손님들은 대체로 디자이너를 직접 부르는 탓에 디자이너들이 방문하는 쪽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다.
물론 VVIP가 이러하고 다른 VIP급 손님들은 방문하는 일도 자주 있었기에 가게도 잘 꾸며 놓긴 했다.
“세상에, 언니 여긴 어디예요? 벽돌이 예쁘고…… 끄응, 비싸 보여요.”
나는 생긋 웃으며 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기사를 보며 여전히 마차에 탄 채 나를 보고 있는 아리아를 눈짓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잡아 준 기사는 다름 아닌 제트였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아리아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제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왔다.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졌네요. 일단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
나는 두르고 있던 숄을 풀어 아리아의 목에 둘둘 감아 주었다.
세상에, 이 아가씨는 강렬한 빨강도 어울리네?
‘샤를리즈가 걸치니까 요염한 색이 되더니, 이 아가씨가 걸치니까 빨간 망토네.’
나는 빨간 망토를 두른 동화 속 주인공을 떠올리며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리아는 어어, 끌려가면서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없이 나를 쫓아왔다.
부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반짝반짝 했다.
이러한 태도는 안으로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공녀님께서 이곳에 직접 방문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환영합니다,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곳의 주인은 내 방문에 매우 놀란 얼굴이었지만, 베테랑답게 금방 얼굴을 수습했다.
흐음, 이 정도 임기응변은 되어야 이 변덕스러운 샤를리즈를 상대했겠지?
우리는 주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