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곧 각종 드레스들과 보석들이 진열된 거대한 방이 드러났다.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백화점 내 한 층을 뚝 떼어 놓은 느낌이었다.
막 들어갔을 때 저 멀리 몇몇 드레스를 걸친 영애들이 보였다.
한창 옷을 보던 이들은 내 등장을 모르는 듯했다.
그만큼 넓다는 소리기도 했다.
‘……건물이 엄청나게 크더라니.’
이건 나도 놀라웠던지라 속으로 감탄했다.
동영상으로 보았던 명품 VIP들만의 공간은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찐 VVIP들은 아예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쇼핑을 한다던데?
답은 샤를리즈의 기억 속에서 톡 튀어나왔다.
‘아, 안쪽에 공간이 더 있구나.’
이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면 은밀한 또 하나의 공간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고, ‘샤를리즈’가 찾던 곳은 바로 그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을 성싶었다.
‘아리아가 구경하기엔 여기가 더 좋겠는데.’
아리아는 섹션별로 나눠진 드레스와 보석이 가득한 공간을 쭉 살펴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눈치를 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내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니, 언니!”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였다.
속닥속닥, 아리아가 작게 속닥였다.
“여긴 언니 개인 옷장이에요?”
“푸흡!”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배에 힘을 주며 꾹 참았다.
아니면 체통이고 이미지고 뭐고 파하하 웃어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웃는 거야 나쁘지 않았지만 아리아가 혹시라도 기분 상하거나 침울해할까 봐 꾹 참다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눈물이……. 우리 아리아는 유머 감각도 있네요. 그래요, 여기가 내 개인 옷장이다 생각하고 천천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봐요.”
나는 팔짱을 낀 채 옷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러나 아리아는 상기된 뺨을 한 채로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엄청 넓어요…….”
그러게요. 나도 기억에서 떠올리기 전까진 이렇게 넓은 줄 몰랐네요.
아리아는 한눈에 봐도 어색해하는 것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위층에 다녀올게요.”
친절하게 검지로 위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자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주인에게 돌아오는 토끼처럼 내게로 달려올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너무너무 귀여웠다.
나는 주변의 직원들에게 눈짓했다.
마네킹처럼 서 있던 그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손하게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이렇게 새하얀 피부시라니, 혹시 천을 추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가 감히 액세서리 또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어, 언, 언니?”
“그 사람들, 친절해요.”
친절하지 않으면 샤를리즈 패악에 목이 똑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거든요.
물론 나는 샤를리즈처럼 죄 없는 목숨을 가지고 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아리아가 불안해하지 않게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살며시 잡아당기며 근처 드레스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직접 안내했다.
그러고도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아리아는 샤를리즈가 사라지기 무섭게 주인 잃은 아기 고양이처럼 불안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언니가 어디 가셨지?’
한창 신기하게 드레스를 바라보다가 샤를리즈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불안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함께 있던 직원들이 극도로 공손하게 ‘공녀님께서는 곧 돌아오실 겁니다.’ 하고 말을 건네자 조금씩 안심한 표정을 하더니, 주저함이 사라지고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아리아는 다시 옷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정말 많은 옷을 가지고 있구나…….’
아리아는 샤를리즈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물정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탓이었다.
아스킨과 레무트 가문은 온 힘을 다해 아리아를 보호했다.
그 탓에 아리아는 무탈하게 자랐지만, 타인의 의지로 강제로 순수해진 하얀 도화지나 다름없었다.
이 옷은 언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아! 저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아. 끙, 저 옷도 너무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참 아리아의 조그만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점원 하나가 사랑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문제는 지나치게 조용했던 탓에 웃음소리가 아리아의 귀에도 들렸다.
아리아가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갸웃하자 점원이 사색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얼른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리아는 깊이 사과하는 점원의 태도에 어리둥절해 했다.
“난 괜찮아요. 고개 들어요.”
언니의 하녀들은 참 공손하구나. 이리 생각했다.
점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영애님. 저희가 의상을 더 안내하거나 추천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세상에, 그 샤를리즈가 데려온 이 아가씨는 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무엇보다 착해 보일 수 있지?!
점원들은 아리아가 착하고 순해 보일수록 속으로 동정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 예쁜 눈동자, 거기다 아직 어리고 가냘프지만 엄청난 미모!
볼수록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레무트 공작을 본 적 없는 점원들은 무성한 소문으로 아스킨의 머리색과 눈 색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숨을 꿀꺽 삼키며 결론에 도달했다.
……그 악녀가 이제 약혼자랑 비슷한 색을 가진, 그것도 순진한 사람 하나 꾀어다 괴롭히려나 봐! 세상에, 저런!
“이 드레스 중에…… 디자인이 마음에 드시는데 색이 마음에 안 드시면 제작도 가능하오니, 편안하게 보시면 됩니다.”
“와, 정말요?”
어째서 샤를리즈 언니의 옷 제작을 내게 말하는 걸까 싶었지만, 아리아는 즐거워하면서 옷 하나를 가리켰다.
샤를리즈는 언제나 강렬한 색을 걸치곤 했다.
그건 레무트 성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는 오빠인 아스킨이 황실 연회에게 가기 위해 걸쳤던 의복을 떠올렸다.
샤를리즈도 분명 새하얀 색이 바탕이 되고 강렬한 색을 덧입힌 드레스를 걸쳤었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 행복해졌다. 그날 아리아의 눈에 샤를리즈와 아스킨은 하늘이 내려준 것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언니는 분명 그냥 하얀색 옷도 잘 어울릴 거야.’
“감사합니다. 저기, 그러면 저기에 흰 드레스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점원들은 아리아의 선량하고 착한 말과 행동에 더욱더, ‘샤를리즈가 이제는 어리고 예쁜데 신분이 낮은 영애를 잡고 괴롭히는구나.’, ‘약혼자랑 비슷하게 생긴 이 사람이 다음 희생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입어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니, 전.”
“이쪽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준비는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리아가 샤를리즈와 똑같은 공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점원들은 안타까움에 더욱더 친절하고 공손해졌다.
아스킨이 워낙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정작 그 외양이 몹시 아름답다는 것 외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아리아는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아니, 저는 잠시, 언니의 옷을…….”
“네, 공녀님께서는 아마 위쪽에서 정하고 계실 겁니다. 염려 마시고 걸쳐 보시어요.”
“맞아요, 이 옷은 영애님께 딱이실 거여요.”
아리아는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커튼이 쳐진 곳으로 안내받았다.
점원들은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아리아가 편안하게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리아도 하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보통 아리아의 하녀가 되기 위한 1순위 능력은 ‘병간호’였다.
이 능력을 기준으로 능숙한 사람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아리아는 이렇게 옷을 갈아입는 것에서 거의 한 손처럼 움직이는 능숙한 점원들의 손놀림에 놀라 남몰래 감탄했다.
동시에 앞을 가렸던 커튼이 걷혔다.
그러자 앞에 있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와아.’
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아, 너무 예쁘다…….’
레무트 영지 사정 탓에 아리아는 제대로 된 드레스를 걸친 적이 드물었다.
이는 아리아의 몸이 허약해서 무거운 드레스는 걸칠 수 없는 사정도 한몫했다.
그러나 지금 걸친 옷은 나들이용으로 만들어진 가벼운 의상으로 특히나 이곳은 샤를리즈가 즐겨 찾는 의상실답게 최고급 천만을 다뤄 왔다.
드레스를 만든 천 또한 매우 고급스러운 천이자 얇고 가벼운 편이었고, 디자인도 가볍고 산뜻했다.
아리아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 움직이는 리본의 천들은 오히려 아리아를 하늘에서 똑 떨어진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정말…… 너무 예쁘세요. 이 드레스가 드디어 주인을 만나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딱 맞으시죠?”
“조심스럽지만 이런 청순한 디자인은 어울리기 힘든 편인데…… 영애님을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 같아요.”
점원들은 본디 어떤 사람이 옷을 걸치든 감탄하는 게 업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비즈니스를 떠나 순수하게 감탄했다.
점원들 또한 사람인지라, 샤를리즈의 압도적인 미모에 단련된 탓에 웬만한 아름다움엔 감탄하지 못하게 되었다.
새하얀 백합 같은 이 어린 아가씨의 등장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