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7/194)

86화

아리아는 평소 샤를리즈의 걸음을 유심히 봐 온 터라, 거울 앞에서 샤를리즈처럼 걸어 보기도 했다.

“꼭, 사세요. 영애님.”

“네, 저희가 업무를 떠나…… 간청드릴게요. 이건 정말이지 영애님의 옷이에요.”

점원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다가 이내 아리아에게 간청을 시작했다.

아리아는 당황했다.

그제야 이곳이 단순히 샤를리즈의 건물이 아니라, 가게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의 얼굴이 발긋 달아올랐다.

착각할 것이 따로 있지 어쩜 이런 착각을 했담.

……언니가 나를 멍청이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온통 새하얀 의상 속에서 발그레 상기된 아리아의 뺨은 그녀를 이 드레스와 더욱더 잘 어울리게 만들어 주었다.

점원들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한 번 더 구매를 부추기자,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이 드레스는 얼마인가요?”

물론 살 생각은 없었다. 능력도 없었다.

그래도…… 기억해 두면 언젠가는…….

“알츠베이트 공녀님 지인이시니 제가 디자이너님께 말씀드려서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바로 계산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마, 샤를리즈와 함께 이곳에 올 정도면…… 지금 당장은 잘해 준다는 소리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인 디자이너도 이런 할인에 무어라 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저렇게 잘 어울리니 오히려 홍보가 될 판이었다.

의상실이 생길 때부터 함께했던 베테랑 점원의 감이었다.

점원은 종이 위에 여러 가지 계산을 거치더니 곧 아리아에게 흰색 종이를 내밀었다.

아리아는 건네받은 종이 위에 적힌 가격표를 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질 뻔했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금화 30개? 이 가격이면 잘은 몰라도 우리 가문의 한 달. 한 달…….’

아리아는 돈 계산에 밝지는 못했다. 물정에도 밝지 못했다.

따라서 가문의 재정을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이 드레스의 가격이 보통 고가가 아님은 충분히 알았다.

……적어도 자신의 약값은 아무리 쉬쉬해도 들을 일이 꽤 있었으니까.

아리아가 최대한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이어 가던 도중 날카로운 음성이 아리아의 귀를 할퀴었다.

“당장 내와! 없으면 만들어 오라고. 색이 없다니, 장난해?”

몹시도 날카로운 하이 톤이었다.

아리아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어쩐지, 너무나도 익숙한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기억이 아리아의 머릿속을 헝클여놓았다.

“세상에 어떡해요, 공작님은 공녀님을 그저 불쌍하게 생각하실 텐데. 때로 성가시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이런 동생이랑은 못 살아요. 가엾어라.”

아주 익숙한 음성이었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시녀가 지금 아리아의 눈앞에 있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 레무트 공녀님?”

* * *

“감사합니다, 공녀님!”

디자이너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의상실의 주인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정확히는 이 건물은 1층은 의상실 2층은 헤어와 관련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었는데, 눈앞의 디자이너는 2층의 디자이너, 즉 미용사였다.

보통 귀족의 머리는 솜씨가 좋은 전담 하녀가 맡곤 했으나, 이렇게 전문적인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일도 잦았다.

‘정말이지, 있을 건 다 있는 세계라니까.’

나는 이 헤어숍에다 특별 부탁을 마치고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난간에 서서 아래로 보이는 아리아가 하는 일을 즐겁게 구경했다.

마침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온 아리아는 몹시도 예뻤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더라.

‘세상에, 그 뻣뻣한 남자 아래에 어쩜 저런 동생이 나왔을까?’

아깝다, 아까워. 삐딱하게 생각하다가도 픽 숨을 내쉬었다.

왜긴 왜겠어. 자기 목숨까지 걸고 애지중지 했으니까 저렇게 사랑스럽게 큰 거지.

한참 구경하는데, 내 눈에 흰색 종이를 들고 덜덜 떨고 있는 아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에휴……. 저 모습 나랑 똑같잖아? 나도 예전에 명품 매장에 들어갔다가 가격표 보고 딱 저랬었는데…….’

어째 우리 예쁜 공녀님을 보고 이런 기억을 떠올리려니 서글퍼졌다.

그래 생각하면 뭐 하나, 남은 인생 신나게 막 살다 가야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막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고함이 들리는가 싶더니, 웬 여자가 씩씩대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들어올 때 저 멀리 영애들이 꽤 보이더니, 그중 하나인가?

‘어라? 저건 뭐래?’

바로 저 안쪽 은밀한 공간에 들어갔다면 아리아와 내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둘이서만 의상을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그곳은 이렇게 진열해 두는 곳이 아니라 맞춤 디자인을 하는 곳이었다.

‘물론 맞춤옷도 선물할 생각이지만.’

아리아라면 구경을 더 좋아할 것 같아 이곳에 잠시 남겨 둔 것인데.

날카로운 고함이 썩 좋게 들리진 않았다.

이건 몸에 남은 본능일 거다.

그도 그럴 게 샤를리즈는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즐겨 찾는 의상실 디자이너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숍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끝내고 나와 함께 내려오다가 나와 덩달아 멈춰서 대기하던 주인이 멈칫하더니, 사색이 된 모습이 보였다.

고함의 주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머, 어머. 세상에, 레무트 공녀님?”

저쪽에서 아리아에게 접근했으니까.

“레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어……. 소, 소피 잘 지냈어?”

어라, 아리아가 아는 사람인가?

그런데 웬걸 아리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래, 이 제국 제일의 패악질 넘버원 악녀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서 판단하건데, 쟤 아리아를 괴롭힌 X이다. 본능이 마구 외치네.’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는 건지.

웃기지도 않게도 샤를리즈 몸에 남은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쟤, 망나니 영애들 과라고.

‘게다가 선량한 아리아를 괴롭혔다니 악질 중에 악질이겠지.’

“저야 보다시피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제가 공녀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호호호.”

“……으응.”

“그나저나, 공녀님께서는 정말 건강이 좋아지셨나 보네요?”

궁금한 건데 나쁜 애들은 뭐, 비슷한 걸 먹고 사나? 왜 느껴지는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 같은 것이 비슷한 건지. 아, 아니면 관상이 비슷한 건가.

악의를 품은 저 여자의 얼굴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럼 공작님께서 이제 공녀님을 버릴…….”

제 머리로 떨어지는 물건에 말을 잇지 못했으니까.

내가 던진 건 다른 건 아니고 헤어 제품이었다.

2층에서 좋은 것 좀 줘 보랬더니 하나 주더라고.

‘새 걸로 가져오라고 해야겠네.’

생각할수록 샤를리즈의 본능은 꽤 편한 것 같다.

깽판 좀 쳐야겠다 생각하니까, 글쎄 손이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지 뭔가.

게임으로 치면 자동 사냥 같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성큼성큼 내려와서 아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이름 모를 여자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의상실이 고요해졌다.

헉, 숨을 삼키는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흘끗 보면 나를 발견한 또 다른 영애들이 덜덜 떨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리아가 뭐라 부른 것 같은데.

딱히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알 게 뭐야.

잘 만났다. 내가 이제 깽판을 마음껏 칠 거거든?

‘하지만 아리아랑 첫 외출인데 여기서 깽판을 칠 순 없지.’

나는 가까스로 참았다.

“아리아,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요?”

“어, 언니…….”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부릅뜬 여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넌 뭐야?”

“고, 공, 공녀님을 뵙습…….”

“누가 인사하래?”

“네?”

“누구냐고. 아리아에게 볼 일이라도?”

“아,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럼 저리 꺼져.”

아무래도 저 이름 모를 영애는 복장을 보아하니 돈깨나 있는 가문의 영애인 듯싶었다.

게다가 이 의상실에는 웬만한 자금으로는 방문할 수 없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나는 고개를 반쯤 돌렸다.

“……마음에 들었던 곳인데, 관리가 엉망이네?”

“고, 공녀님! 아닙니다. 저희 불찰이에요.”

난 단숨에 꼬랑지를 내리며 액세서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영애의 뒷모습에만 시선을 줄 뿐이었다.

오냐, 너 내가 얼굴 딱 기억해 놨다. 지금 아리아의 얼굴을 하얗게 만들었냐.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애를…….

내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눈짓으로 저 여자를 가리키자, 의상실 주인이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아리아를 향해 생긋 웃었다.

“세상에, 이 드레스는 아리아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네요.”

나는 아리아의 손에 들린 하얀 종이를 슬그머니 빼앗아서 등 뒤로 숨겼다.

내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이런 계산서 따위는 신경 쓰지 말기.”

이렇게 돈 많은 친구 이용 좀 해 주세요. 언니 돈 많아.

그리고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거라 펑펑 쓸 예정이니까. 같이 즐기자고요.

“…….”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리아는 표정이 어두웠다.

어둡다 못해 땅속으로 파고들 듯이 침울했다.

……방금 저 여자가 무슨 말을 더 했나? 아닌데. 내가 금방 처치한 것 같은데.

저 여자가 누군지는 나름의 눈치로 짐작했다.

“그렇구나. 그 시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어요?”

“그 시녀는…….”

끝내 말하지 않았던 시녀. 시녀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대신 화제를 옮기던 아리아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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