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8/194)

87화

“어디 아파요?”

안색이 어두운 아리아가 염려되어 물었다. 혹시 스트레스 받아서 몸이 갑자기 안 좋아졌나?

……아니면 내가 물건 던져서 쟤 맞춘 거 보고 놀랐나?

안 되는데. 좋은 것만 보게 해 주려 했더니…….

“바로 돌아갈까요? 편하게 얘기해도 괜찮아요.”

아리아를 달래면서 나는 주변 점원과 의상실 주인에게 눈짓했다.

그녀들은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리아의 표정이 미세하지만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아…… 아, 아니에요.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다라……. 그럼 뭐가 불편했었는데요?”

“…….”

“흐응, 친구라면서 이런 거 하나 터놓지 못하면 나 서운해지는데.”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느새 토끼같이 동그랗게 뜨인 눈에는 지이잉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안심한 뒤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인데.

……저 사람이, 정말 무서웠던 거구나.

나는 모른 척 아리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를 괴롭힌 자가 다시 나타났을 때의 무서움은 잘은 모르지만, 안심되었을 때의 기분은 잘 안다.

아리아가 내게 편하게 뒷모습을 내어 줬을 때, 느꼈던 기분.

“왜 울어요? 여기가 맘에 안 드는 거죠. 딴 데 갈까?”

“아, 흡, 아니에요, 언니! 여, 여기 드레스들 하나같이 다 예뻐, 끕, 요.”

“음? 근데 왜 그래요. 씁, 빨리 말 안 할 거예요? 언니, 삐진다. 나 삐지면 아주 오래 가는데 괜찮겠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억 골드를 쥐여 줘도 안 풀리는…… 아, 잠깐 잠깐! 이 말은 취소, 취소.”

이어 감에 따라 완전히 울상이 되는 아리아를 보고서 놀라 허겁지겁 말을 바꿨다.

아리아가 취소란 말에 표정이 풀어졌다.

아리아는 양손 손가락을 비비다가 꾹 겹쳐 잡았다.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시녀…….”

“아, 그 썅X이요? 쟤 맞죠?”

“네?”

“아?”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입을 가로막았다.

와, 나 저기요, 몸의 본능 씨? 이제 끝났거든? 응징할 사람 없다고. 진정하라고!

그 인상 좋지 않은 여자와 겁먹을 아리아를 떠올리는 순간 자연스럽게 입버릇처럼 흘러나왔다.

그리고 샤를리즈의 원래 말버릇 중 하나기도 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돈 좀 벌어서 여기 온 것 같은데, 아리아에게 뭐라고 했어요?”

“아, 아니에요! 인사만 했어요.”

“인사만 했다? 그런데 제 친구인 우리 아리아가 지금 떨고 있고? 모처럼 기분이 좋아 한번 살려주려 했더니. XX 이거 도저히 안 되겠네.”

“네, 네, 네?!”

그러나 도대체 뭐에 스위치가 눌린 것인지,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욕이 흘러나왔다.

‘젠장!’

아니, 이놈의 욕. 아스킨 그놈한테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소리칠 때나 나올 것이지!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아리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야, 내가 무슨 해결사로 빙의한 건 아니지만 말이지……. 한 번쯤 정의의 사도도 좋겠지? 일단 넌 죽었어.’

주님, 한 놈 갑니다.

나는 느릿하게 목 뒤를 쓸어내렸다.

이 의상실은 매우 넓은 한편 뻥 뚫려 있는 식이었다.

덕분에 물건 너머로 금방 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방금 꺼진 그 X께서는 태평하게 가방을 보고 있었다.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어떻게 보면 대단하네. 신경 줄을 고래 심줄로 만들었나?’

우습지도 않았다.

이렇게 뻔뻔하니까 시녀면서 모시던 주인을 괴롭혔겠지.

……마주치기만 하면 사색이 될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돈 좀 생겼다고, 자신이 모시던, 게다가 아프기까지 한 애를 괴롭혀?’

안 그래도 체력도 약한데, 죽어가는 시한부 환자를 괴롭혀?

저런 것들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인생 실전이라고 말이다.

나는 가볍게 팔에 소매를 살짝 걷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가방 진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막 걸어가려는데, 아리아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어, 언니? 언니? 어떻게 하시려구요? 저 이제 다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요?”

“…….”

“그리고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떠시나요?”

나는 싱긋 우아하게 웃었다.

“저런 애들은 나 같은 나쁜 X들이 상대해야 해요. 잠깐만 딱 기다리고 있어요.”

한 걸음 더 디딘 순간 아리아가 허겁지겁 팔을 펼쳐 나를 가로막았다.

“언니, 그래도 때, 때, 때리시면 안 돼요. 말로 하세요.”

나는 저 멀리 우리 대화를 듣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 있는 여자를 한 번, 아리아를 한 번 보았다.

때릴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일단 걸음을 멈췄다.

“저 때문에 또 언니에 대한 소문이 나빠질까 봐…….”

흐음, 소문이라.

‘이미 파혼 이후로 나빠질 대로 나빠지지 않았나?’

샤를리즈는 자존심만 남은 악녀였다.

패악을 부린 삶의 대가로 주변에 사람 하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소중한 게 제 자존심 말고 뭐가 있겠나?

동시에 그 자존심을 앗아간 사람이 아스킨이었다.

적어도 소문 속에서는, 사람들이 아는 현재 상황은 그러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될 대로 되란 생각이지만.’

어쩌면 샤를리즈에게 당한 것이 있으면서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첫 사람이었다.

나는 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싱긋 웃는 동시에 윙크를 살짝 날려 주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리아를 안심시키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우리 어린 양이 놀라서 기절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때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아까 보았던 여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여자는 자신의 하녀에게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말이 화지, 화풀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지.’

그리고 저 여자가 진열된 물건을 골라 점원과 대화를 나누며 계산서를 쓰러 계산대로 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기했다.

여자가 마침내 계산을 하기 위해서 하녀를 시켜 지갑을 꺼냈을 때였다.

“거기, 잠깐만 기다려 봐.”

그러자 근처의 모든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그중 점원이 표정을 갈무리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개중 여자는 나를 보며 놀라더니, 이내 날 빤히 보았다.

왜인지 그 눈으로 미약한 기대마저 어려 있었다.

‘……뭐 콩고물을 먹든 하고 싶다 이건가.’

샤를리즈는 이런 곳에서 변덕을 부려 망나니 영애들에게 이것저것 사 주기는 했다.

그 기억이 또렷했다.

그 인간들 손절한 지 언젠데.

이전의 샤를리즈는 싹수없는 망나니들을 끌어모았다지만 나는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 내 기세에 눌려 쫓겨나고서 뻔뻔하게 기대를 보일 수가 있나?

진짜 망나니 계의 금빛 새싹인가 보네.

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저, 알츠베이트 공녀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가방 진열대를 담당하는 점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가방이랑 이거, 저거, 저거. 다 내가 살게.”

“아……! 그럼 제가 바로 새것들로 꺼내 오도록 하겠습…….”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저걸 사면 되니까.”

나는 다른 점원이 손에 들고 있던 걸 가리켰다.

여자가 사려던 물건. 그러고는 나를 쫓아온 하녀 수잔에게 눈짓했다.

수잔은 눈치 빠르게 얼른 물건들을 받아 옮겼다.

이 광경을 보던 여자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계산을 진행하다 멈춘 점원에게 말했다.

“그럼, 내, 내가 새 제품을 살 테니 가져다줘.”

“그럴 필요 없어. 여긴 전부 내가 살 거라서. 그리고 이게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가 수잔이 들고 있던 가방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샤, 샤를리즈 공녀님, 뭔가 오해가…… 꺄아악!”

“너 따위에게 누가 내 이름을 허락했지? 그리고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소리부터 지르니?”

지금 아리아의 때리지는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느라 날뛰는 샤를리즈의 본능을 꾹 참는 중인데 말이다.

하필 얘 비명에 멀리서 마음 졸이고 있을 아리아가 달려왔다.

“어, 언니 괜찮으신 거죠?!”

음, 이 괜찮다는 말은 나를 향한 걸까, 아니면 쟬 때린 게 아닌 거냐고 묻는 걸까.

나는 후자라고 판단했다.

“아니에요. 난 때리지도 않았는데, 저게 혼자 소리 지른 거예요.”

슬쩍 시선을 옮기자, 저 여자가 아리아의 등장에 흠칫 놀라더니 헐레벌떡 일어나 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이거, 그야말로 강약약강이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수리가 보이도록 고개를 숙인 저 여자를 한번 노려본 뒤, 아리아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아리아를 향했다.

아리아는 안절부절못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꾹 잡았다.

어째, 싸움 나면 꼭 말리러 오는 모범생 친구와 사고만 치는 날라리 친구가 된 기분이랄까.

아리아가 날 향해 ‘빨리 보내 주세요.’ 하는 입모양을 했다.

“꺼져.”

“네, 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름 모를 영애는 연신 정신없이 인사하더니 빠르게 몸을 돌려 일행들과 재빨리 출구 쪽으로 향했다.

“멈춰.”

내 단 한마디에 그녀와 그녀의 일행이 죽은 것처럼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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