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9/194)

88화

나는 배시시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기억하기로 샤를리즈가 이렇게 웃을 땐…… 패악을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너 오늘부로 그만 살고 싶니? 내가 굳이 입 아프게 입술을 움직여야겠어?”

“저, 저, 고, 공녀님 무슨…… 잘못했습니, 사, 살려 주세요!”

“왜 아리아에게는 인사 올리지 않고 가는 거야? 아니면 이제 돈 좀 있다고 모시던 주인이 우습니? 그 돈…… 노잣돈으로 쓰게 해 줘?”

조곤조곤 속삭이는데, 말이 길어질수록 샤를리즈의 내제된 본성이 툭툭 튀어나왔다.

‘욕 한마디 없이 사람 간 쫄리게 할 수도 있구나.’

내가 한 말이지만 감탄하면서 보고 있노라니, 곧 이 못된 영애가 아리아에게 다가가 큰절에 가까운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서야 이 영애의 일행은 숍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아, 이런 정신 줄 너무 놓았나 봐.’

나는 저 여자와 일행이 사라지고 나서야 후회했다.

아리아는 상상도 못한 광경을 보았다는 듯이 딸꾹질까지 하며 동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뺨을 매만지다가 난감한 얼굴로 슬쩍 천장을 보았다.

‘……어린 양에게는 자극적인 장면이었나.’

어쩌면 내가 빙의하기 전의 샤를리즈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후회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일어나 버린 일.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곧 수잔을 시켜 물을 가져오게 했고, 내가 직접 건네받아 아리아에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이것 좀 마셔요.”

“네…… 언니, 감사해요. 그, 언니 덕, 덕분에…….”

아리아가 머뭇머뭇 입을 열려 하길래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덮듯 말을 가로챘다.

“감사 인사는 넣어 두세요. 나만큼 악독할 필요는 없지만 저런 부류에게 약하게 보일 필요도 없어요.”

아리아가 컵을 양손에 든 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슬쩍 근처를 보는 것 같았다.

덩달아 함께 주변을 곁눈질해 보니, 아직 남아 있던 영애들이 움찔하더니 구십 도로 인사를 올리고는 후다닥 사라졌다.

‘내일부터 또 하나의 소문이 퍼지겠네.’

염려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소문 말고 눈앞의 아리아.

마음 가는 대로 돕다 보니, 가감 없이 샤를리즈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는데,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염려와 우려, 조금은 무서움이 섞인 시선으로 아리아를 바라보았더니 놀랍도록 투명하고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리아는 내가 부럽다고 했죠?”

“네! 저는 진심으로…… 언니가 부러워요.”

이 애는 ‘샤를리즈’처럼 될 수는 없을 거다.

사람에게는 천성이란 게 있으니까.

다만 다시는 아까 같은 망나니에게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오래도록 이렇게 지켜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적어도 얼마 안 남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는 도와주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아리아의 손에서 컵을 빼내고는 그 손을 잡았다.

컵은 자연스럽게 수잔에게 넘겼다.

“그럼 당당하게 가슴 딱 펴고, 일단 머리부터 하러 가요.”

“네? 네? 자, 잠깐, 잠깐, 언니……!”

나는 앞장서서 2층으로 올라갔고, 그 뒤를 내게 잡힌 아리아가 덩달아 발걸음을 옮겼다.

아리아는 딸꾹질이 아직 멈추지 않은 채였다.

계단 하나당 딸꾹질 한 번, 유쾌한 기분이었다.

“웍!”

“…….”

“딸꾹질 멈췄죠? 역시 이게 효과가 있구나.”

“어, 언니이……. 저 진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설마하니 내가 그런 표정을 할 줄은 몰랐다며 울상을 짓던 아리아는 곧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곧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고, 지켜보던 나 또한 소리 내어 웃었다.

함께 따라오던 점원이며 의상실 주인마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나와 아리아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아리아의 머리 손질이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 * *

“어, 언니.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아리아는 양손을 가슴에 얹은 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실컷 웃던 여파가 사라지지 않아 온몸이 기분 좋게 간질간질했다. 즐거운 기분이었다.

“정말, 정말로 잊지 못할 하루였어요.”

어느새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의 주황빛이 아리아의 눈처럼 하얀 피부에 내려앉았다.

마치 파스텔로 칠한 듯 물든 얼굴은 어느 것이 홍조이고 어느 것이 노을빛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발그레했다.

아리아는 정말이지, 이렇게 즐거웠던 날은 손에 꼽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정말 너무 고마워서 오늘이…….”

“또, 또 그런다. 이제 그만해요.”

아리아가 눈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서 샤를리즈가 웃고 있었다. 샤를리즈의 웃음은 몇 번이고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 본 얼굴은 다른 날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리즈의 흰 피부에도 노을이 내려앉았다.

어째서인지 샤를리즈가 반사하는 노을빛은 마치 자신이 직접 빛을 내기라도 한 것처럼 더욱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언니는 차가운 외모를 가졌지만 다정해…….’

아리아는 이것이야말로 샤를리즈만이 가진 특별함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 언니가 드, 드레스도 스무 벌이나 사 주시고, 가방, 액세서리까지.”

“나 돈 많아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언니를 더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웃고 있던 샤를리즈가 멈칫했다.

아리아는 내뱉고서 바로 후회했다. 그렇지만 오늘 내내 마음에 묻어 둔 고민이자 걱정이었다.

벤에게는 샤를리즈를 만날 거라 하고 간청해서 나왔다.

하지만 과연 오빠도 이를 받아들일까?

잠시 멈칫했던 샤를리즈가 자연스럽게 세련된 미소를 떠올렸다.

“별걱정을 다 하네요. 그리고 오빠가 말 안 하던가요?”

가만히 아리아를 보던 샤를리즈가 평온한 표정으로 툭 폭탄을 터뜨렸다.

“우리 곧 파혼할 거예요.”

갑작스럽게 떨어진 진실에 아리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미 수도 전역에 퍼진 진실이었다.

소문이 퍼진 지 아주 오래되었건만, 단 한 사람 아리아에게는 전달되지 못한 듯했다.

“네, 네에? 저, 정말요?! 정말이에요? 우리 오빠 때문이죠? 그렇죠?”

“…….”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처음 들었구나.

“음……. 레무트 공작 쪽에서 하자고 했으니, 맞긴 한데. 사실 다 제 탓이죠, 뭐.”

유책을 따지자면 죄는 이쪽이 많다. 훨씬 많다.

알츠베이트 공작 몫의 죄까지 더하면, 평생 죄의 저울이 아스킨 쪽으로 기울 일은 없을 것이다.

샤를리즈와는 엮이지 않는 쪽이 나았을 남자다.

아마도 샤를리즈에게도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 게 나을 남자였다.

‘이제 그 인간 내 알 반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샤를리즈는 딱히 아스킨에게 앙금이 풀리진 않아 저도 모르게 삐딱한 표정을 지으려다 황급히 수습했다.

“……아니에요. 언니, 저는 알아요! 오빠는…… 오빠는 한 번도 언니의 진심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제가 알아요!”

샤를리즈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게. 당신도 아는 건데, 어쩌면 그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 아는 것 같은데. 왜 그 남자만 모르는 걸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샤를리즈는 아리아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지만 만날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왜? 아리아가 원하더라도, 아리아의 건강이 오늘은 괜찮더라도.

저택에 있을 레무트 사람들이 보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리아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적어도 누군가는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아닐까?

이렇게 변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에 그 남자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샤를리즈의 업보였으나, ‘윤지후’에게는 서럽도록 억울한 일.

그녀는 점차 깊어지는 생각과 감정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그러니, 다 제 오빠 때문이에요. 아니, 오빠 때문인 거예요. 모든 게 오빠 탓이야.”

“음, 솔직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닌데, 그건 아니에요. 공작에게는 공작의…….”

“오빠 때문이에요.”

“…….”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역시 아스킨은 너무 과분한 여동생을 뒀다.

이건 아스킨을 질투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이런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매일같이 집에 가면 볼 수 있단 말이야?

……나는 매번 훼방만 놓고 거기 같은 소리나 툭툭 뱉는 인성 파탄 폭군 오빠밖에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이런 아리아의 순수함을 지켜 준 건 그 남자의 희생 덕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가 왜 사과를 해요? 그리고 누구 잘못이면 어때요.”

지금까지 되는 대로 막살자, 생각해 왔고 이는 샤를리즈의 진심이었다.

샤를리즈는, 아니 ‘윤지후’는 얼마 안 가 꽥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것이다. 물론 이 일을 모두 망쳐 버린 알츠베이트 공작에게 머지않아 빅 똥이든 엿이든 먹여 주고 갈 것이고 말이다.

“……인연이 아니라 생각할래요.”

그러나 동시에 이 순간만큼은 아리아 앞에서 더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욱신. 마음이 아픈 건 윤지후의 것이 아니다.

같은 의자에 걸터앉은, 희미하게 남은 샤를리즈의 기억이자 본능이 느낀 아픔이다.

‘나도 파혼하기 싫다고, 근데 댁 오빠께서 씨알도 안 먹힌다고.’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투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샤를리즈는 아리아와 그 남자를 떨어트려서 보고 싶었다.

아스킨의 동생 아리아가 아니라, 그냥 아리아 그대로.

“타요. 데려다줄게요.”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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