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마차가 달리는 내내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샤를리즈는 어둠이 내려앉는 창밖 풍경을 보고 있었고, 아리아는 그런 샤를리즈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리아의 눈에 샤를리즈는 항상 당당한 사람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오만함이 가득한 당당함이었다면, 여행을 다녀온 후 나타난 모습은 좀 더 건강한 자신감과 당당함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아는 지금의 샤를리즈가 좋았다.
아니, 지금의 샤를리즈 모습이 아니었다면 샤를리즈를 다시 보고 좋아하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왜인지 표정 없는 샤를리즈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오빠가 샤를리즈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샤를리즈의 뒷모습이 처음으로 가엾게 느껴졌다.
‘왜, 언니는…… 그렇게 가진 것이 많은데.’
아리아는 하지 못한 말을 꾹 삼켰다.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로워 보여요?’
* * *
쉴 새 없이 굴러가던 마차가 멈춰 섰다.
좋은 마차답게 멈춰 서는 것조차 소리 없이 조용했다. 나는 풍경에서 눈을 뗐다.
‘어라, 언제 도착했지.’
뭔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는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아리아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지다니 이런 실례가 어딨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아리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인지 해석하기 힘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리아?”
이렇게 부르는 순간이었다.
완전히 멈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열린 문 사이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과 마주했다.
잔뜩 화가 난 얼굴, 언제나처럼, 늘 그렇듯이 그림같이 잘생긴 모습이었다.
비록 등골이 오싹하도록 차갑고 야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는 하지만.
아스킨 레무트였다.
그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더니, 아리아를 보고서 흠칫 놀랐다.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리아 너…….”
왜 그러나 싶었다가 아하, 싶었다.
‘그치, 댁이 봐도 우리 아리아 너무 예쁘지?’
오늘 아리아를 괜히 그곳에 데려간 게 아니다.
헤어에 있어서만큼은 수도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곳에 데려가 남은 시간 내내 정성껏 관리했다.
사람의 신체란 참으로 신기해서 정성들인 만큼 티가 난다.
물론 이 티가 확실하게 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아리아는 전자에 해당했다.
게다가 조금은 작고 낡았던 드레스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하얀 드레스까지 입혀 놓으니, 솔직히 주접 부려서 백합의 요정인 줄 알았지 뭐야. 아니다, 눈의 요정? 눈 토끼 요정?
‘다 어울리네.’
내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스킨이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멍하니 봤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리아, 너, 대체!”
“…….”
그러나 아스킨은 다시 한 번 더 말을 멈춰야 했다.
놀랍게도 아리아가 아스킨을 본 체 만 체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어라……?’
아리아가 방긋 예쁘게 웃었다.
“언니, 저, 정말로 행복했어요. 오늘. 정말이에요.”
“아, 음? 어. 응. 저야말로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아리아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언니, 또 불러 주셔야 해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기서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아 뭐시기께서 신경 안 쓰이는 건 아닌데. 이제 알 게 뭐람.
“좋아요. 다음에는 티 룸에 가볼래요? 예쁜 곳이 있어요.”
“좋아요. 꼭 불러 주기예요.”
“그럴게요.”
어차피 나도 친구는 아리아 당신밖에 없거든요. 나는 하지 못한 말을 슬쩍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아리아는 끝까지 자기 오빠는 본 체 만 체하면서 마차에서 내리더라?
아리아가 자기 오빠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벤을 불렀을 때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놀라웠고 말이다.
‘……저 남매에게서 이런 광경을 다 보네.’
조금 전 다 오빠 탓이라고 외치던 아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나 만나기 전에 둘이 싸웠나?
이 남매가 싸우는 건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아리아가 아스킨을 무시하다니.
나도 아리아에게 인사를 하러 내린 참이었다.
막 생각났다는 듯 뒤에 서 있던 수잔을 불렀다.
“아, 수잔. 얼른 내려서 선물 가져다 드리렴.”
“네, 아가씨.”
곧 수잔이 내리더니 다른 하녀들과 기사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물건을 들고 줄줄이 아리아를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라타려 했다.
‘살다 살다 저 인간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처지가 되는 걸 다 보네.’
물론 아리아가 했듯이 아스킨 레무트에게는 처음을 제외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막 마차로 돌아가려 하는데, 그림자가 나를 막아섰다.
시선을 돌리면 마차의 문을 살짝 잡은 아스킨 레무트가 보였다.
별생각 없이 눈을 굴렸다.
밤이 깊었네. 돌아가면 시간이 늦겠다.
“……사과하지.”
내 눈이 다시 아스킨에게로 돌아갔다.
그림자가 옅게 진 얼굴은 우수에 찬 듯 반듯한 선을 그렸지만, 내게는 놀랍도록 감흥을 주지 않았다.
“아리아에게 나쁜 짓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의심한 점 사과하고 싶다.”
“사과하면 받아 줘야 하고?”
커다란 어깨가 흠칫 굳었다.
아주 잠시이지만 거리가 가까웠기에 똑똑히 보였다.
‘웃기네. 왜 당연히 받아 줄 것처럼 사과하지?’
조금 전 그의 언행은 이렇게로만 보였다. 아니었다면 뭐 잘못 느낀 거겠지만.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진심이다.
“어차피 맨날 의심받았는데, 이제 와서 또 의심받는 게 새삼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
“의미 없잖니.”
평온한 말들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나왔다.
사람이 체념하면 이렇게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구나.
심지어 늘 두렵던 저 남자의 분노한 표정에서도, 죽음의 공포에서도?
“당신이야말로, 화나서 달려올 줄 알았더니. 용케 집에서 기다렸네.”
나는 오늘 낮, 공원으로 분명 레무트 영지 사람이 올 거라 생각했다.
기사가 됐든, 아스킨 레무트 본인이 됐든.
그렇기에 제트를 남겨 아리아를 데리러 온 사람들을 잘 돌려보내라고 했다.
아리아는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이를 믿을지 말지는 그들의 자유였지만.
그 후 전혀 방해가 없었던 걸 보면, 제트가 잘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치료약도 중요하지만, 아리아와 바람도 쐬고 좀 해. 사람은 그저 물질만 채워 주면 다가 아닌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
이 말은 지나친 오지랖인 것, 인정한다.
말이 하다 보니 너무 진심이 나와 버렸네. 이 남자가 반발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남자가 나와 다시 약혼하겠다 마음먹지 않는 한, 1년만 그 약혼을 유지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모두 소용없는 것을.
아, 역시 폭군 오빠 그놈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좀 빡치긴 하지만 잘한 일이었다.
슬슬 빡침이 올라 올 것 같으니.
“나 추워서 마차 안에 들어갈 건데 할 말 남았니?”
나는 약속대로 아리아를 무사히 돌려보냈다.
게다가 선물까지 안겨 보냈지만, 이건 이 남자와는 관련 없는 아리아와 나 둘만의 일.
“……없다.”
그래, 나는 대답도 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소리 없이 옆에 서 있던 제트가 손을 잡아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쿵, 마차 문이 닫혔다.
나는 앉은 그대로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하, 나 잘한 거겠지.”
응. 잘했어. 완전 잘했다.
스스로 쿨한 척의 맥스를 찍은 나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암, 오늘만은 네가 최고다 윤지후.
난 스스로 칭찬을 하며 온몸의 힘을 빼고 채 의자에 늘어졌다.
그때 마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창문?’
창문 쪽이었다.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빼꼼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창문 너머에는 아스킨이 서 있었다.
뭐야? 설마 마차를 빨리 빼라, 이런 소리나 하고 싶은 건가?
나는 탐탁지 않은 속내를 숨기며 창문을 열었다.
“뭐야?”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는데, 못 했다.”
할 말? 설마 연회 날 했던 말 외에 아직도 할 말이 남았단 말인가.
이 남자가 샤를리즈에게 당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했지만 알 게 뭐야.
나는 그 샤를리즈가 아니다.
찡그리며 한소리 하려는데, 아스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아리아가 가져간 것들, 그건…….”
“내가 선물로 준 거야. 당신, 내가 준 빗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
“건드리지 마. 너랑 상관없이 아리아가 좋아서 선물한 거니까.”
왜, 여기서 또 한마디를 하려 하는 건가? 내 여동생을 감히 물질로 유혹하려 했다, 뭐 이런 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아스킨이 조금 더 다가왔다.
“오늘 아리아에게 비용을 많이 지불한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갚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