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도 조소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웃겨서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이 남자가 결벽적으로 보일 만큼 남에게 빚을 못 지는 사람인 건 아주 잘 알겠다.
그런 사람이 여동생을 위해 빚을 지고 패악에 온갖 모욕과 조롱은 다 당했을 테니 그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이제 와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이미 빚으로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서 또 빚지고 싶어? 웃기는 인간이네.”
“…….”
조금 피로했다.
아마도 아리아랑 신나게 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리아를 생각하니 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저 남자를 바라보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남매의 생김새는 똑 닮았건만 그들에게 각기 느끼는 감정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대로 둬 봤자, 이 남자는 또 듣기 싫은 소리나 해 댈 테지.
“정 미안하면 차나 한 잔 주든가.”
얼른 쫓아내라는 심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이러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싸늘하게 욕이나 하겠지 싶어,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이게 웬걸.
“……서쪽 지방에서 나는 전통차가 있는데 이런 차라도 좋다면 마시겠나.”
……응? 뭐야. 지금 내가 헛걸 들었나?
잘못 들은 거지?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제 환청을 듣는 거야.
‘그래, 잘못 들었겠지. 설마. 저 남자가 내게 차를 한잔하자고 청했다니.’
상상력이 지나쳤다.
역시 환청이었어,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싫다면 가도 좋다.”
뭐야. 뭔데. 뭐냐고.
환청이 아니라고? 나는 속으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당황했다.
……이미 게임 끝 아니었어? 뭐냐고.
그러나 이미 몸은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은 벌떡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이를 참고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그렇게 나랑 마시고 싶으면 한잔하든가.”
이렇게 말하면서.
* * *
‘이게 무슨 일이지.’
잠시 뒤, 나는 이 남자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앞으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차랑 눈싸움을 하기라도 하듯 열심히 노려봤다.
‘역시 이건 꿈인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생생한 걸 보니 꿈이 아니었다.
아니, 저 남자가 내게 차를 청하고 이렇게 나를 자기 집무실 안으로 들이다니.
대체 왜? 끝이 얼마나 험악했던가.
나는 순간 이 차에 독이라도 들어서 독살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철벽의 남자가 나를 초대해서 차를 마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아스킨 레무트가 샤를리즈에게 바랄 만한 건 ‘돈’밖에 없을 텐데.
저 남자는 샤를리즈의 제국 제일 미모도 알츠베이트의 권력에도 혹하지 않았다.
아마 정말 간절하고 곤궁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샤를리즈의 돈 따위 평생이 지나도 받지 않았을 대쪽 같은 인간이었다.
나는 애써 떠오르는 기억을 지워내며 집무실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다급했고 절박했지.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누군가의 관심을 원해본 적은 처음이었을 거다.
곧 다가온 아스킨 레무트가 내 앞에 앉았다.
3분 전 놀랍게도 이 남자는 직접 내 몫의 차를 내왔고, 지금은 제 몫의 차를 들고서 내 앞에 마주앉았다.
나는 속으로 신음을 흘리면서 찻잔을 들어올렸다.
신기하게도 차는 전생에서 가장 좋아하던 꽃차의 향기가 났다.
……그리운 향이네.
향을 음미하며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드는데, 눈이 마주친 아스킨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놀라는 모습이 우스워서 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도 귀족인데, 차를 다루는 기본예절은 알고 있어.”
얌전히 차를, 그것도 예법에 맞춰 먹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 남자가 봤을 샤를리즈가 뭘 마시는 모습은 죄다 술 마시는 모습 아니었을까.
샤를리즈는 예법을 몰라서 안 지키는 게 아니다.
‘안 지켜도 상관없는 삶을 사니까 멋대로 사는 거지.’
참으로 편한 삶이었다.
내 타박에 아스킨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한숨인지 그저 평온한 날숨인지 모를 것을 쉬더니.
“……오해한 것이 맞다. 사과하지.”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저 신기하게 저 남자를 응시했다.
뭐지, 진짜 무슨 꿍꿍이가 있나.
왜 순순히 인정하는 거지?
아스킨이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색했던 분위기가 서먹해지기까지 했다.
말이 서먹하다지, 나는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마저 느꼈다.
‘이러다가 네 할아버지 때문에 분노로 잠을 못 이뤘다, 네가 대신 죽어라 하면서 검이라도 들어 올리진 않겠지?’
샤를리즈 주변에 있는 가족이라곤 죄다 폭군 오빠나 알츠베이트 공작 같은 사람뿐이니, 나도 사상이 오염된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난 왜 들어오라고 한 건데?”
이 남자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던지라,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갔다.
“한 가지 묻고 싶었다.”
“뭘?”
아스킨은 진중한 얼굴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술을 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질문은 아니겠군.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약…… 내 여동생에게 잘해 주면 내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한 거라면, 미안하다.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다.”
이건 또 무슨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치는 소리래?
어디 혼자서 K-김칫국을 사발로 퍼 마시셨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무슨 이런 개소리가 있나 싶어서 내 시선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빚은 조만간 모두 갚을 예정이다.”
“그래서?”
“내가 돈을 갚지 못할까 우려하지 말라는 소리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스킨은 평소와 같이 차갑고 서늘했으며 놀랍도록 차분했다.
나를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하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다음 순간, 아스킨의 표정이 굳었다.
“……네게도 이미 새로운 남자가 생긴 걸로 아는데.”
이건 또 무슨 2차 개소리지? 요즘은 개소리도 뭐 세트로 나와?
“이안 차일드.”
그러나 이름까지 나오자 내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2차가 아니라 3차였네. 아주 각가지로 흘러나오는 개소리였다.
“그 남자는 나와 다르게 좋은 반려가 되겠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허? 나는 아스킨의 표정이 왜 갑자기 굳은 것이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면 터져 나오는 이 분노와 솟구치는 짜증을 달랠 길이 없었으니까!
‘허, 미친, 뭐? 그 또라이랑 잘해 보라고? 악담인가? 개소리도 작작해야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개소리를 듣겠다고 쭐레쭐레 따라온 꼴이라니.
혹시라도 게임이 리셋 됐나, 희망이 생겼나 싶어 기대한 내가 바보였지.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꽃병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나왔다.
“야.”
나는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난, 네 마음 얻어 보겠다고 아리아에게 잘해 준 게 아니야. 혼자 상상하고 잘난 척하는 그 버릇 이제 고쳐. 다른 사람에게 그래 봐야…… 왕자병 말기 소리나 듣지.”
“왕…… 뭐?”
“다른 여자에게는 이딴 개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다른 여자에게 이런 소릴 할 리가……!”
아스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 내가 찌릿 노려보자, 어째서인지 말을 잇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네. 기대한 내가 머저리지.”
나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목 앞에 엄지를 가져다 대고는 살벌하게 휙 그었다.
“내 앞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앞에 놓인 차를 벌컥벌컥 원 샷 했다.
“이걸로 끝이지?”
찻잔마저 바닥에 휙 떨어트리고는 돌아서서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왜인지 아무도 없었다. 저 남자의 지시인가?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복도 벽을 잡고 끙끙댔다.
‘악, 아악! 내 목! 모옥!’
다 식지 않는 차를 벌컥 마셔 버린 탓에 뜨거워 죽는 줄 알았다.
지금도 목에서 타는 듯한 화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에라이, 그놈의 가오가 뭐라고…….’
쿨한 척 두 번만 했다간 목구멍이 타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씩씩거리는 소리 반, 끙끙거리는 소리 반 정도 되는 신음을 복도 가득 흘리며 걸어갔다.
빡침 가득한 걸음이 쿵쿵 발소리를 남겼다.
* * *
홀로 남겨진 아스킨은 천천히 제 얼굴을 만져 보다, 그대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지금 말을 흘릴 수 있다면 외계언어에 가까운, 의미 모를 의성어만 잔뜩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째서 방금까지 자신의 모습이 이다지도 멍청하게 느껴진 건지.
대체 저 여자를 이 집무실까지 왜 끌어들였단 말인가?
……게다가 어머니가 좋아하는 차를 직접 대접한 건 또 뭐고.
아스킨은 진정하기로 했다. 그래, 방금 한 말은 꼭 필요한 말이었다.
샤를리즈가 제 환심을 사려 이제는 아리아에게까지 접근한 것 아닌가.
그게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그토록 저를 쫓다가 공개적으로 파국을 맞이했건만, 그런 남자의 여동생과 온종일 행복하게 놀다 온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무슨 꿍꿍이가 없고서야.
하지만 아스킨은 한편으로 아주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