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2/194)

91화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난, 네 마음 얻어 보겠다고 아리아에게 잘해 준 게 아니야. 혼자 상상하고 혼자 잘난 척하는 그 버릇 이제 고쳐.”

……이번엔 자신이 틀린 건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의 예민한 귀로 복도의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샤를리즈가 목 따가워 하며 씩씩거리면서 걸어가는 소리였다.

“……흡.”

고도로 발달한 그의 감각은 샤를리즈의 울음소리마저 잡아냈다.

울음? 울음이라고……?

물론 샤를리즈는 뜨거운 차 때문에 목이 따가워서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이었지만, 아스킨이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아스킨이 제 눈을 짚었다.

현재 상황에서 샤를리즈가 울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환심을 사려고 아리아에게 잘해 준 것이다.’

자신의 속내를 들켜서 막혀버리자 분해서 눈물이라도 흘린 것인가?

결론은 하나였다. 샤를리즈 알츠베이트는 자신을 포기하지 못했다.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래, 그런 기분일진데…….

왜 조금 전보다 나아진 기분인 것 같은 걸까.

* * *

잠시 후 아스킨은 아리아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노크 후 아리아의 답을 기다리는데, 한참이 흘러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두드리는 즉시 들어오란 말이 들려와야 했다.

특히나 아리아는 아스킨이 두드리는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러니 자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허락이 없었음에도 아스킨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왜 들어왔느냐는 말은 없었다.

다만 웬일인지 아리아는 침대가 아닌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아리아의 품 안에는 빗이 꼬옥 들려 있었다.

거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보며 아스킨은 생경함을 느꼈다.

‘평소 퀭한 자기 모습이 싫다며 거울 앞에 거의 나서지 않았는데…….’

거울로 아스킨의 등장을 분명 보았을 아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킨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빠, 나 피곤해.”

“……아.”

“아주 많이 피곤해.”

피로할 만했다.

오늘 아리아는 공원은 물론 수도의 의상실까지 갔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얘기를 이렇게 노려보면서 할 일인가?

아스킨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리아가 자신과 대화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거기다 아리아가 자신을 이렇게 노려보다니?

여동생이 그토록 말리던 토벌이나 전쟁에 나가서 피투성이로 돌아왔을 때에도 원망은커녕 울면서 안아 주던 아이였다.

아스킨이 주춤하던 사이에 아리아가 한 번 더 말했다.

“나 많이 피곤해. 얼른 나가 줄 수 있어? 일찍 자고 싶어.”

거울 앞에 앉아 있던 아리아는 어디로 보나 자려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스킨은 물러나려다가 이내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얘기 좀 해.”

아스킨이 말문을 열었다.

“넌 어딜 가면 간다고 정확하게 내게 말하고 가야 했어. 아리아.”

“…….”

아스킨은 아리아가 어딜 향하든 외출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위험한 곳으로 가겠다고 하면 당연히 막겠지만, 그는 아리아가 좋아하고 건강만 허락한다면 더 많은 경험을 했으면 했다.

분명 어린 시절에도 이런 마음을 다짐했던 것 같은데…… 잊고 있었다.

“치료도 중요하지만, 아리아와 바람도 쐬고 좀 해. 사람은 그저 물질만 채워 주면 다가 아닌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니?”

샤를리즈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진.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오래 전에 생각해 왔던 것을 떠올렸다.

“나가지 말란 게 아니야. 오늘같이 네가 위험한 사람을 만난다면 난…….”

“위험한 사람? 그게 누군데? 샤를리즈 언니?”

무구하게 묻는 질문에 아스킨은 말문이 막혔다.

호칭을 부르는 것이 너무나 친근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빠. 언니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몇 번이고 오빠에게 이야기했어.”

아리아가 억울한 듯이 말하다가 이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내 자신의 말을 무시한 건 아스킨이기에 더는 말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아리아. 그 공녀는…….”

“왜? 언니가 오빠에게 최근에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아리아는 샤를리즈가 과거에 나쁜 짓을 했다는 것까지 잊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오빠는 도무지 현재의 샤를리즈를 보려 하는 것 같지 않아서 안타까웠고 동시에 낯설었다.

왜 샤를리즈의 일에서만큼은 오빠가 고집을 꺾지 못하는 걸까?

“오빠. 오빠는 뭐든지 오빠 마음대로 상상하고 혼자 잘난 척할 때가 있어. 나는 오빠를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이럴 때는 조금 미워.”

미워. 두 글자가 아스킨의 머리에 쾅쾅 못질당했다.

아스킨은 충격에 빠졌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리아를 보다 그대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에는 샤를리즈가 마시고 버려두고 간 찻잔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잘난 척하는 그 버릇 이제 고쳐.”

아리아가 놀랍도록 샤를리즈와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 목소리가 오래도록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갈수록 커지는 제 마음속 한 가지 후회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샤를리즈의 변명을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연회 날의 자신을 향한 후회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당장 치료 마법사를 불러 입 안과 목을 치료했다.

돌아오는 내내 욱신거리며 나를 괴롭혔던 고통이 사라지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곧 나는 따뜻한 물이 가득 받아져 있는 욕조에 몸을 기댔다.

‘아, 살 것 같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몸을 감싸자, 머릿속엔 고통에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내 여동생에게 잘해 주면 내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한 거라면, 미안하다.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다.”

“아아아악!”

내가 대뜸 소리를 지르자,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얼른 달려왔다.

나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 말하며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홀로 남아 젖은 머리를 콱 쥐었다.

‘웃기지도 않네. 게다가 뭐가 어쩌고 어째? 지가 뭔데 내 옆에 누구를 들이밀며 어울리니 마니 해?’

샤를리즈가 너무 싫다? 인정. 너무 싫어서 파혼하고 싶다? 인정한다.

모두 아스킨 레무트가 ‘샤를리즈’에게 할 수 있는 말이고 품을 수 있는 마음이다.

끝끝내 고고하신 그 얼굴로 내 변명 한번 듣지 않고 내쳐 버린 인간 아니던가?

근데, 내게 새로운 남자를 운운한다? 그건 선을 넘었지.

그 남자는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인간의 한마디로 인해 죽을 운명에 처했다.

아니,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콱 뒈지겠지

무지가 무죄와 같은 단어는 아니었다.

내가 뒈지는 건 그 망할 알츠베이트 공작과 이 남자의 합작이다.

내가 사랑스러운 코인을 돌려받기는커녕 죽는 것 모두!

결국 목욕은 힐링이 되지 못했다.

중간부터 떠오른 그 남자의 개소리 3어택이 내내 머릿속을 괴롭힌 탓에 나는 생각보다 더 오래 욕조에 있었다.

빨갛게 익은 뺨으로 가운을 걸치고도 속으로 씩씩대기 바빴다.

내가 보기엔 누워서도 분노로 이불을 뻥뻥 차지 싶었다.

가까스로 분노를 잠재우고 침대로 향하는데, 수잔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저, 공녀님……. 씻으시는 동안 급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

나는 봉투를 받아 뒤집었다.

내 표정은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게 가지런한 글씨, 아니 교본에 나올 것 같은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는 이름이, ‘이안 차일드’였으니까.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 내용은 확인해 보고 바로 쓰레기통, 아니 화로에 버리자.

‘이 자식은 오후에 봤으면서 뭘 또 편지를 보내냐.’

당장 찢어 버리란 말을 하지 못한 건, 오늘 낮에 그 인간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욕으로도 해갈되지 않은 내적 분노가 남아 있는 지금 이 기분으로 편지 내용을 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거 테이블 위에 올려 둬. 내일 아침에 볼 테니까.”

“네, 공녀님.”

수잔이 테이블 위에 편지를 올려 둔 뒤 물러났다.

수잔뿐만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모두 물러났다.

나는 홀로 방 안 침대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은 탁월한 또라이란 말이지.’

조연만큼이나 잘생기고, 성격도 독보적이다.

게다가 미친놈인가 싶은 또라이력과 실행력과 추진력까지.

아무리 봐도 그냥 엑스트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을 열심히 뒤져 봐도 원작에서 ‘이안’이라는 인물을 본 기억은 없었다.

‘아니, 뭔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아른거리면서도 떠오르진 않았다.

나는 그대로 한참 고민에 빠지다가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어젯밤 분노하고 고민에 잠겼던 것치고는 너무나 푹 잤다.

눈을 떠 보니 상쾌한 아침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나른하게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었다.

새의 지저귐을 쫓아 창문 앞에 멍하니 선 채 자연스럽게 창밖의 풍경을 구경할 때였다.

막 정원 쪽을 응시하던 내 미간이 자연스럽게 찡그려졌다.

“공녀님, 일어나셨습니까?”

“수잔.”

막 불려온 수잔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 밑에 마차가 하나 서 있는데, 무슨 마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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