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194)

92화

알츠베이트 공작가를 방문하는 손님은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의 주인은 귀족파의 수장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당당하게 문 앞에 마차를 댈 수 있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알츠베이트 공작이 얼마나 오만한 자존심 덩어리인데, 자신의 마차나 댈 수 있는 자리를 감히 아무에게나 허락했을 리 없었다.

수잔이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일드 가문의 마차라고 들었어요.”

허?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마 내 어처구니없음이 얼굴 가득 표현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는 등골에 소름이 일 지경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미친개에게 제대로 물린 거 같은 기분인데?’

우습달지, 하찮달지.

분명 이 원작에서 미쳐서 집착하는 놈은 폭군 오빠 그놈이나 노아같이 서브남들의 역할이건만.

왜 저놈은 나한테 이런 집착 아닌 집요함을 보이고 있는 건지.

저 미친 짓의 원인이 무엇일까.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때려도 말을 안 듣는 놈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샤를리즈의 몸에 남아 있는 기억과 본능에게 물었다.

웃기게도 이 기억과 본능에도 감정이 있다면 당황하지 않았을까? 처음으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패악의 대가 악녀에게도 뚜렷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단 소리였다.

아, 물론 이어서 19금 딱지를 붙여야 할 것 같은 고문들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기각. 기각이요.

‘사람 죽일 생각 없거든?’

나는 질린 얼굴로 돌아섰다.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공녀님?”

“그냥 놔둬.”

어떡하긴. 무시할 거다.

나는 콧방귀를 뀌며 아침을 먹으러 향했다.

그렇게 배불리 식사하고 근사한 디저트까지 먹은 뒤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한참을 빈둥거렸다.

그러던 중 흘끗 창문 밖을 보았는데…… 아직도 마차가 있었다.

‘와, 아스킨이 내가 노숙할 때 이런 기분이었나.’

근데 나는 참작해 줘야 한다.

내로남불 같지만 나는 목숨이 달려 있었다고?

‘쟤는 시한부 카운트다운을 받은 것도 아닌데……. 속은 편하겠지? 생각해 보니 열 받네.’

다시 무시하고 의상실에서 보낸 디자인 화첩을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공녀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아니. 안 먹어.”

내 거절에 수잔과 전담 하녀들은 염려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들은 어디가 안 좋은 거냐며 걱정스럽게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진 않았다. 그저 마음이 뒤숭숭해 입맛이 없는 것뿐이었다.

이건 아마 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느끼는 초조함과 체념이 아닐까.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디저트만 먹겠다고 알렸고, 하녀들이 가져올 디저트를 기다렸다.

얼마 가지 않아 하녀들이 디저트가 담긴 트레이를 잔뜩 가져왔다.

능숙한 솜씨로 테이블이 차려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하녀들이 물러나는 대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기색으로 우물쭈물했다.

뭐지? 내가 눈짓하자, 개중 베스가 슬그머니 나섰다.

“공녀님…… 저희가 오면서 이상한 일을 겪었어요.”

“무슨 일?”

하녀들이 서로를 응시했다.

“복도에…… 차일드 영식께서 대기하고 있으셨습니다.”

허? 절로 혀를 찼다.

마차에서 기다리다 못해 이젠 직접 행차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희들이 준비를 위해 몇 번이나 오가는데도 단 한 번도 저희에게 공녀님이 일어나셨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어요.”

“…….”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건지 헝클이는 건지 모르게 머리를 헤집다가 소파에 늘어졌다.

“신경 쓰지 마. 이제 나가 봐.”

“네, 공녀님.”

하녀들이 나간 뒤, 나는 손을 뻗어 쿠키를 집어 들었다.

고소함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향긋한 시나몬 향을 맡으며 나는 고민에 잠겼다.

‘답답해서 산책이라도 잠시 다녀오고 싶은데.’

조금 걷고 싶건만 나갔다가는 한번 잡으면 놓아주지 않는다는 저승사자, 아니 또라이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가기가 싫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방 안에 갇혀 있기에는 날이 지나치게 좋았다.

따스한 햇살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내가 뭐가 무서워서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거지?’

이 생각이 드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든 나갔다 오는 거다. 시간이 아깝다, 아까워.

‘폭군 오빠 놈은 차라리 이럴 때 황성으로 오라고 노아나 보낼 것이지.’

폭군 오빠나 노아나.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이었다.

내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때, 얼마 안 가 이안 차일드와 마주했다.

그는 하녀들의 말처럼 복도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반듯하니, 뭇 또래 영애들이 보면 좋아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이미 질릴 대로 질린 내게는 또 한 번 질린단 감상을 주는 모습에 불과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 얼굴에는 그 어디에도 오래도록 기다린 자의 원망도 분노도 짜증도 없었다.

“공녀님, 푹 주무셨습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까지 잤다고 생각하냐?”

내 삐딱하고 무례한 어투에 이안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평소처럼 돌아왔다.

……아니, 좀 더 기뻐 보이는 건 착각인가?

“미인은 원래 잠꾸러기 아니겠습니까?”

“구시대 적에도 통하지 않을 개수작이네.”

“적어도 공녀님께서 대꾸는 물론 감상까지 해 줄 만한 발언이었군요. 감사합니다.”

“나, 가끔 네 입을 꿰매 버리고 싶어.”

내 감정에 반응한 건지, 샤를리즈의 본능이 툭 튀어나왔다.

나는 내가 한 말에 깜짝 놀라긴 했는데…… 솔직한 감상이긴 했다.

진짜 샤를리즈는 이렇게 해 버렸을 인물이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란 점이 다르겠지만.

“됐다. 됐어.”

나는 파리를 쫓듯 성의 없이 팔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걸음이 따라붙었다.

하필 이 날씨에 근사하도록 잘 어울리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귀를 쫓아왔다.

“실은 편지에 답장이 없으셔서 답변을 듣고자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대답? 무슨 대답.”

“역시……. 안 뜯어보셨을 줄 알았습니다!”

“……왜 기뻐하는 건데?”

“아, 저는 공녀님의 이런 멋대로인 점도 존경하고 애정…….”

“징그러우니까 닥치는 게 좋겠네.”

“분부대로.”

편지라면 분명 어젯밤에 보냈던 그 편지를 말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면 보려고 테이블 위에 두게 했던 것 같은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의 존재감밖에 없던 거겠지.”

“무엇이든지 아주 작은, 먼지 같은 것에서 시작했음을 아십니까? 저 하늘도 땅도 태양과 별조차도 말입니다. 사람의 인연도 조그만 것에서 시작…….”

“길어. 한 줄로 줄여.”

그러자 싱긋 웃음을 지은 이안이 내 앞을 조심스럽게 가로막았다.

“데이트, 해 주시겠습니까?”

장갑을 낀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눈을 감은 것처럼 휘어진 눈꼬리를 보다 그대로 지나쳐서 성큼 걸어갔다.

“이런, 이것도 너무 개수작이었습니까?”

“……잘 아네. 붙지 마. 꺼져.”

“사실 저희가 함께 호수를 걸을 날짜를 알고 싶었습니다. 고대하는 마음으로 잠도 오지 않더군요.”

과장되게 울상을 짓는 남자를 보며, 나는 이제 숫제 서커스단에서 나온 피에로를 보듯이 응시했다.

‘이 남자, 유튜버 했으면 되게 잘했을 것 같애. 리액션이 아주 그냥. 구독자 만족도 천 퍼센트이지 않았을까?’

아, 물론 이거 칭찬 아니다.

내가 밖으로 나서자, 이안은 덩달아 나를 쫓아왔다.

계속 졸졸 따라오길래, 나는 찡그리면서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약속이란 거 호수를 걸을 날짜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같이 걷고 있네.”

“네?”

“걷고 있잖아.”

나는 씩 웃으며 이안을 응시했다.

“따라올래?”

이안은 웬일로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우아하네.

표정은 멍청하게 넋을 놓았는데 말이지.

나는 이안을 이끌고 저택을 빙 돌아서 한 건물로 향했다.

알츠베이트 저택은 몇 개의 건물로 나눠져 있었는데, 개중 가장 작은 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정확히는 건물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

‘개집이거든. 이거.’

샤를리즈에게는 귀여운 강아지가 있다.

이건 그 악녀가 이렇게 부른 거고 실제로는 ‘괴물 개’라는 무지막지한 별명을 가진 개. 이름은 테리였다.

나도 눈을 뜨고 한 번 본 적 있는데, 덕분에 이 테리와의 기억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테리는 전체적으로 핏불테리어처럼 생겼는데, 근육이 정말 우락부락하더라.

나는 개한테도 이두, 삼두에 흉근이 저렇게 도드라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게다가 그냥 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멧돼지가 가진 것처럼 길쭉한 송곳니, 그것도 위아래로 긴 송곳니가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저런 걸 사랑스럽다고 한, 샤를리즈의 미감도 참.’

미남은 그렇게 밝히면서 동물을 보는 기준은 왜 이런 거지?

테리는 내 냄새라도 맡은 듯 내가 도착하자 즉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목줄도 차지 않은 모습은 지구에서였다면 경찰을 불러야 할 법한 모습이었지만.

이 반경에는 마법이 펼쳐져 있어 테리는 일정 경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물론 저 남자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만.’

놀라다 못해 처음으로 얼빠진 표정인 이안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안녕, 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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