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컹! 컹컹! 컹컹컹!
반갑다는 듯 테리가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미친, 꼬리 힘 좀 봐. 헬리콥터인 줄 알았다.
“나랑 걷고 싶다길래. 내 사랑스러운 테리와 산책도 괜찮겠지?”
“…….”
나는 테리를 쓰다듬는 채로 고개만 돌려 이안을 응시했다.
이 남자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테리는 훈련이 잘된 개였고, 내게 달려들면 안 된다는 걸 잘 안다는 듯 내 앞에 착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내 손길을 즐겼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듯, 이안을 본 순간 으르릉,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소리를 냈지만.
“사랑스럽지? 내가 원하면 누구든 물어뜯는 애야.”
나는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 언제든지 시체를 치울 사람들도 널려있고.”
한참이나 테리를 바라보던 이안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 위로 난감한 웃음이 어렸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더는 과도하게 굴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과도하다니, 그런 것도 알았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녀님 목소리 한번 듣지 못할 것 같아서요.”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공녀님과 좋은 걸 해 보기도 전에 팔이나 다리나, 배에 개 이빨 구멍이 뚫리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만 까불겠습니다. 하는 말로 들렸다.
나는 이로는 안 된다는 듯 테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과연 팔, 다리, 배만 뚫릴까?”
“……얼마나 더 항복하면 될까요?”
이제는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자세를 취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사과하는 방식도 정말 보통 사람이랑 다르네. 또라이 같아.’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음껏 웃음을 토했다.
능글능글하고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던 얼굴이 일그러지니 통쾌했던 것이다.
어휴, 샤를리즈의 기억과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나도 자꾸 물들어 가나.
“아쉽네. 오랜만에 테리에게 포식을 시켜 주려고 했는데.”
“……테리의 한 끼 식사가 되기엔 아직 제국을 위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요.”
이안이 정말로 무릎을 꿇으며, 굴복한 자세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공녀님과 하고 싶은 일도 아주 많습니다.”
“반성이 덜 됐네. 테리?”
컹컹컹! 컹! 카르르르륵!
“……어떤 반성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한참의 사죄 끝에 나는 테리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개는 애교도 부릴 줄 알았고 감정도 풍부했다. 내가 돌아가려 하니 끙끙대며 내 몸에 머리를 비벼 댔다.
나는 문득 이 테리가 샤를리즈 말고는 찾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밥을 주는 사람도 혹시나 사나운 개에게 물릴까 싶어 던져 주고 매번 달려 나온다고 했다.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구나.’
나는 머리를 만져 주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 커다랗고 무서운 개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머리를 한 번 더 비비적거리고는 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쩐지 체념 어린 뒷모습이 마음에 걸려 죽기 전에 자주 찾아오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시없을 경험을 했습니다.”
“흔치 않긴 하지.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경험은.”
“…….”
함께 걷던 이안이 손을 턱 아래 가져다댔다.
“확실히, 이 모습만은 소문과 일치하시는군요.”
“일치?”
“예, 아주 카리스마 있고,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공포에 떨 줄 알게 만든다는 소문.”
나는 픽 비웃었다.
“일치하는 게 있으면, 아닌 것도 있다는 소린가.”
“그 외에 전부.”
내 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돌아보면 이안이 선선히 웃고 있었다.
“전부 틀린 것 같습니다.”
나는 선량하게 휘어진 눈꼬리를 한참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을 조금만 일찍 들었다면 달랐으려나.
아마 아스킨에게 열렬하게 구애할 때 들었다면 힘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샤를리즈의 이미지를 바꿔 보려 정말 애를 썼으니까.
이제 와 들어 봐야 무엇 하나.
그렇지만 싫지는 않은지라 아주 찰나간 이 또라이 같은 영식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이게 아주 큰 잘못이었음을 5분 안에 깨달았다.
“……안 일어나?”
테리의 집에서 다시 건물로 돌아오자, 나는 빨리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산책은 이 정도면 족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이안이 대뜸 자신은 이 저택 앞 벤치에 앞으로 여기 살겠다며, 내게 먼저 들어가라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어디선가 본 또라이 짓인데.’
이건, 내가 아스킨에게 문전 박대 당했을 때 했던 짓이다.
노숙하며 아스킨을 기다렸던 기억이 잠시 떠오르며 어이가 없어졌다.
협박하듯 일어나라고 해봐도 일어나지 않더라.
“너 진짜 미친놈이야?”
“그 미쳤다의 목적어가 공녀님이라면…….”
“한마디만 더 해 봐. 그 소름 돋는 수작을 하는 순간 테리를 데려오는 수가 있어.”
“……공녀님과 꼭 호수 공원을 가고 싶은 것에 미쳐 있다고 해 둘까요.”
이안은 이 말과 함께 천연덕스럽게 벤치 위에 눕기까지 했다.
나는 깨달았다. 아니, 정말로 성 앞에서 노숙을 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저 눈은…… 찐이다.
‘찐이다. 찐이야.’
이런 곳에서 동족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착잡해졌고 어처구니가 없었으며, 대체 이 또라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체통에 안 맞게 생떼를 부리는 게 특기야?”
“고고하게 서기만 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공녀님. 그러니 그럴 때엔 할 수 있는 걸 뭐든 다 해 봐야지요.”
“잘난 척하지 말고 그 입은 너 잘하는 장사에나 쓰고. 내 집에서 꺼져.”
지금 샤를리즈의 본능이 ‘나 금방이라도 입 털어? 쌍욕해? 준비 완.’ 하고 속삭이고 있다고.
나는 목 끝까지 치솟은 욕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여기서 혈압 올라 봐야 내 손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입술 가득 비웃음을 매달며 돌아섰다.
“좋아, 그 약속 내일로 하지. 대신 그 이후로 내 눈에 띄면…… 이번엔 정말 테리 밥으로 던져 주지.”
이안은 더는 뻗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약조하신 날짜 똑똑히 기억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깍듯한 인사를 올리려다가, 대뜸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 가득 영문을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뭐야?
“딱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어쩐지 긴박함마저 느껴지는 호기심과 박력에 아주 잠깐이지만 압도당했다.
자존심 상했다. 뾰족하게 물은 질문에 답변이 돌아왔다.
“내일 무슨 색깔의 옷을 입고 오실 겁니까? 아, 공녀님? 공녀님! 어디 가십니까?”
……상대한 내가 등신이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돌아서 그대로 건물로 향했다.
이안은 나를 쫓아오진 않았지만,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일 자신이 시간에 맞춰 마차로 모시러 오겠다고.
‘시간은 알려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맞춰 오겠다는 거, 아.’
……오늘처럼 아침부터 대기하는 건 아니겠지?
돌아서서 시간마저 약속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나는 그대로 탁, 문을 닫았다.
방으로 올라가 멀어지는 이안이 탄 마차를 보며 참았던 욕을 갈기고야 말았다.
* * *
샤를리즈가 멀어지는 이안의 마차 뒤꽁무니를 보며 욕을 쏟아 내고 있을 때, 허공에는 스르륵 공간이 일렁이며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록시디언과 노아였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샤를리즈의 성난, 잔뜩 뿔이 난 표정을 목격했다.
록시디언의 입으로 작은 감탄이 어렸다.
‘와, 쟤가 저렇게 빡친 것도 오랜만에 보네.’
샤를리즈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를 걷어찼다.
그러다 시선을 돌리고는 록시디언과 노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숫제, ‘이제는 하나도 아니고 둘이야?’ 하는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록시디언은 몹시도 즐거워졌다.
어쩜, 저렇게 빡쳐 할수록 재밌는지.
아마도 세상 오빠들 중에 반 이상이 할 생각을 하는 동안 샤를리즈가 이를 부득 갈았다.
‘필요할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아주 밉상 짓만 골라서 하려고 왔지?’
샤를리즈야 폭군 오빠의 방문이 결코 즐거울 리 없었다.
“허.”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꽤 오래전?”
“……방금 도착했습니다, 공녀님.”
노아가 얼른 나서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지극히 정중한 모습은 도리어 예법 하나만큼은 완벽했던 이안 차일드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샤를리즈의 분노를 자극했단 소리다.
샤를리즈가 분노를 지우지 못하자, 록시디언은 노아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봤냐?’
‘보통 화가 나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치? 내게 맡겨.’
‘……예?’
두 주종은 오랜 시간 덕택에 눈짓만으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나 한 가지, 이 의사가 대부분 일방통행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노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둘 중 록시디언이 언제나처럼 짓궂은 미소를 얼굴에 내걸고 나섰다.
노아는 더욱 불안함이 들었다.
“야, 너 파혼한다며!”
노아의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