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번엔 진짜로 파혼이라지? 그 새끼, 아니, 그 쭉정이랑 드디어 찢어지냐? 야, 야, 잘됐다. 축하한다? 그러게 헤어질 거였으면 진즉에 헤어지지 그랬냐. 그놈은 네 짝이 아니에요~, 어?”
“…….”
“후, 선심 썼다. 이 오라비가 괜찮은 다음 후보…….”
“……냐?”
“뭐?”
“뒈지기 싫으면 닥치라고.”
록시디언과 노아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록시디언의 이죽거림에 드디어 폭발하고 만 뒤였다.
“꺼져, 꺼지라고! 왜 나타나서 사람 속을 긁어? 이 XX! XXXX! XXXXXXX!”
“……너 욕 잘한다? 죽을래? 감히 나한테 쌍욕을 해?”
“어, 그래, 했다, 했다! 왜! 그 X 같은 면상 꼴도 보기 싫어!”
“뭐야? 이 잘생긴 얼굴에 면상? 보자 보자 하니까.”
“뭐, 보자?”
샤를리즈가 손에 집히는 것을 냅다 던졌다. 아니, 후려갈기는 쪽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그건 쿠션이었고 이 쿠션은 록시디언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졌다.
“억!”
록시디언은 대단한 기사였다. 그러나 이걸 왜 맞았느냐 하면은…….
설마하니 샤를리즈가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던질 줄 몰랐다.
‘이 계집애, 뭔데 정확도가 좋아?!’
록시디언도 인내가 강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매 싸움에 인내력을 발휘하는 다정한 오빠는 아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샤를리즈의 발광에 록시디언이 욱했다.
“지금 수백 억보다도 귀중한 이 얼굴을 쳤냐?”
“왜, 죽이겠다?”
“뭐 하러 죽이냐? 내 채무자님을? 어?”
“허?”
록시디언이 삐딱한 미소를 내걸었다.
걸어 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설사 남매 싸움이라도.
“그렇게 당당하게 꺼지라고 하고 싶냐? 그럼 내 돈 갚아.”
록시디언의 비장의 무기에 샤를리즈 또한 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굴까? 살인마? 폭군?
아니다. 잃을 게 없는 놈이다.
바로 나!
“싫은데?”
“뭐?”
샤를리즈가 거의 반쯤 돌아 버린 눈을 한 채 방긋 예쁘게 웃었다.
“나 돈 없어. 알아서 가져가든가 말든가.”
놀랍게도 샤를리즈는 그대로 벌렁 뒤로 누워 버렸다.
“배를 째서 가져가든가? 아, 옷도 걷어 줘?”
“야! 야! 이게, 미쳤나. 옷 안 내려? 잡아! 노아 눈 돌려, 이 새끼야!”
“…….”
샤를리즈가 정말로 배라도 드러낼 듯이 옷을 헤집자, 록시디언은 여유도 잃고 놀라 손을 뻗었고, 노아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얼굴을 돌렸다.
동시에 노아는 열심히 말리고자 애를 썼다.
“공녀님! 소리 지르시면 피부에 좋지 않습니다……!”
“닥쳐, 저놈을 맨날 순간 이동하게 만들어 주는 네가 더 나쁜 놈이야, 알아?!”
……노아는 중재에 나섰다가 괜히 쌍욕만 얻어먹었다.
한편 샤를리즈는 혈압이 오르다 못해 이제는 눈마저 빨개졌다.
그 오만하고 유아독존인 록시디언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이 멍청한 여동생이 진짜 돌아 버렸나?
‘……사람이 실연당하면 미쳐 버리는 경우도 있다던데.’
솔직히 제 여동생이 오죽 험한 꼴을 당했던가.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애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 앞에서 차였다!
록시디언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럼 알츠베이트를 더 싫어하게 되겠지?
한편 노아는 슬쩍 눈을 뜨고 생각했다.
현재 샤를리즈의 발광하는 모습은 마치 록시디언이 초기에 광증이 도질 때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역시 남매인 걸까?
샤를리즈의 발광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노아가 록시디언을 데리고 얼른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게 제일 좋은 판단이라 여겼다.
다행스럽게도 록시디언은 별말이 없었다.
노아가 더 큰 재해를 방지했단 생각에 안심하는 순간이었다.
록시디언의 표정을 본 노아가 흠칫 놀랐다.
“하하하…….”
돌아온 록시디언의 얼굴에는 더없이 강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이걸 숨기는 기색 없이 노아 앞에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노아는 분명, 록시디언이 알츠베이트와의 정쟁에서 승리했을 때 저런 표정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만족해하시는 거지?
“봤느냐, 보좌야?”
“공녀님을 뵌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같은 걸 보았습니다만, 폐하의 의중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영문으로 웃으시는 겁니까?”
“하하하, 안 좋아하게 생겼냐.”
록시디언이 주먹으로 툭 제 책상을 두드렸다.
“쟤, 분명 알츠베이트에서 한소리 들은 거야. 그 한 치 앞도 못 보는 대머리 너구리가 뭐라고 한 거겠지. 틀림없어.”
파혼으로 긁었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분명 록시디언이 나타나기 전에 샤를리즈의 역치는 한계치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를테면 눈이 가득 쌓인 지붕 위에 록시디언의 등장과 비아냥이 마지막으로 내려앉은 눈이 되어 지붕이 무너진 거다.
그렇다면 이 여동생을 이토록 진심으로 분노하게 만드는 존재가 누가 있겠는가.
바로 알츠베이트 공작밖에 없었다.
합리적인 추론이었고, 합당한 결론이었다.
적어도 이안 차일드가 샤를리즈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록시디언이 낼 수 있는 정확한 결론이었다.
아무튼 알츠베이트 공작이 샤를리즈에게 뭐라고 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록시디언은 홀로 만족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노아가 염려스럽게 한마디 했다.
“……폐하께서는 확대 해석이 너무 잦으십니다.”
“닥치거라.”
록시디언은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 안의 행복 회로를 활활 태웠다.
“설사, 아니면 어때? 그때는 그렇게 만들면 되는 거지.”
하지만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보좌가 마음에 들지 않아, 팩트 폭력을 맞은 폭군은 진짜 폭력을 보좌에게 돌려주었다.
* * *
다음 날,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정말이지,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오늘 그 인간과 호수를 가야 하다니.’
어제 록시디언과 노아를 향해 3분의 2쯤은 진짜 분노와 3분의 1쯤은 화풀이를 했더니, 속은 후련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 오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침대에서 빠져나가기가 싫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오늘 그 인간과 만나기가 싫어서.
나는 일부러 침대에서 더욱 뒹굴거리며 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떠오를수록,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인기척이 아주 작게 들렸다.
‘무슨 일이지?’
아마 전담 하녀들이 서성거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녀들을 불러들였다.
‘왜들 이렇게 눈치를 보지?’
서로 눈치만 보기 바쁠 뿐 말을 꺼내지 못하는 기색이라, 그중 수잔을 콕 찍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으음, 저, 그게…… 밖에 차일드 가문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이거야 이미 익히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기, 마차가 다섯 대나…….”
“뭐?!”
마차를 다섯 대나 이끌고 와서 아침부터 대기 중이란다.
나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진짜였다.
마차 다섯 대가 떡하니 대기 중이었다.
‘저건 또 무슨 신종 미친 짓이지?’
그런데, 한 대는 분명 사람이 타는 마차였다.
반면 나머지 네 대는 일반 마차라고 보기엔 몹시 이상했다.
생긴 게 흡사 대형 화물 트럭같이…… 짐마차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 탓에 이안 차일드의 마차는 나들이를 위한 마차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디 피난이나 이사를 간다고 치면 딱 알맞아 보이는 구성이었다.
‘내가 정말 미친놈이랑 나들이를 가야만 하나.’
나는 순간 약속을 깨 버릴까 고민했지만, 저 또라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최대한 천천히 준비할 요량으로 아침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오늘 거절했다가 다음에 알츠베이트 공작까지 대동해서 귀찮게 굴면 그게 더 곤란해.’
나는 탁자 앞에 앉아 곧 들어올 식사를 기다렸다.
최근 모든 식사는 식당 대신 방에서 하곤 했는데, 식당에서 먹을 시 랜덤한 확률로 알츠베이트 공작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그 보기 싫은 영감의 얼굴을 봐서 뭐 하겠는가?
게다가 그쪽은 내가 토라진 게 금방 풀릴 줄 알고 있더라. 그렇게 두는 쪽이 나았다.
그러다가 아주 큰코다치게 될 테니까.
한참 기다리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식사인가?’
“들어와.”
그러나 왜인지 들어오란 소리를 했는데도 밖에서는 계속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허락이 들리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미간을 찌푸리며 수잔, 들어오라고 말했음에도 여전히 노크가 이어졌다.
심란했던 탓에 모든 하녀들을 내보내서 문을 열게 할 사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쾅!
문을 닫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핸드 카트를 쥐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왜 네가 여기 있냐는 말도 안 나오네.’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는 벙찐 기분이었지만 꾹 참은 채 지그시 노려보았다.
“짜란! 아침이 준비되었습니다.”
짜란은 뭔 놈의 짜란이야? 진짜 미쳤나?
만약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면 샤를리즈의 본능에 내맡긴 채 뭐든 던졌을 것 같다.
이미 어제 무려 록시디언에게도 물건을 던진 나다.
눈에 뵈는 게 없달지. 두려울 게 없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