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앗, 오늘 하루는 제게 허락된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기억은 없는데?
게다가 이 인간, 대답하면서 은근슬쩍 방 안으로 들어오려 들었다.
정말 여우가 따로 없었다.
어쩐지 저 뒤로 악마의 꼬리인지 여우의 꼬리인지 모를 것이 살랑거리는 기분에 핸드 카트를 잡고 확 끌었다.
나는 카트만 안으로 들이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가져오긴 했는데…….’
막상 카트를 보고 있으려니 입맛이 이미 뚝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저 인간이 가져왔다고 생각하니 먹기가 싫어졌어.
나 참. 어느 인물에 빙의했든 한국 소설이라면 모름지기 밥은 잘 먹여야 하는 것 모르나?
신이 있다면 밥 정도는 편히 먹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물론 따지자면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어려운 과제를 줬냐고 멱살부터 쥐고 흔들고 싶었지만.
당신 때문에 내가 두 번 뒈지게 생겼다고 말이다.
‘하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 봤던 양피지는 다시 보이지 않으니, 뭐.’
그보다 이 카트를 보고 있자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면, 저 남자 샤를리즈의 지능적 안티 아니야?
왜, 팬인 척 집요하게 악플을 달거나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악질 네티즌처럼 말이다.
‘내게 관심 있는 척하면서 내 화병을 유발하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정말 지능 안티라서 이 음식에도 독을 탔을지도 모르지.
내가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화병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빨리 해치우고 말자.’
오늘 이후로 저 인간이랑 어울려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하녀들만 불러들인 뒤,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저 남자랑 외출이라 생각하니, 옷 고르는 것도 성의가 없어서 대충 걸쳐 입었다.
……내가 대충 한다고 해서 하녀들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대충 옷을 걸치고 정문으로 내려왔더니, 어느새 이안은 마차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와, 진짜 마차가 다섯 대네.
이미 창문으로 보았지만, 떡하니 놓여 있는 마차들의 모습에는 그저 감탄이 나왔다.
나쁜 쪽으로 나온 감탄이다.
“한 가지만 묻자.”
나는 결국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를 가리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들은 마차 자랑 하려고 가져왔니?”
“그럴 리가요.”
이안은 몹시도 즐거운 농담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농담 아닌데?
“그럼 뭐, 오늘 이사라도 해?”
내 비아냥에는 끄떡없는 강철 방패를 가진 이안은 그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실례가 되지 않을 선에서 내 옷을 잠시 보는 것 같았다.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더라. 뭐야?
“대단히 실례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실례할 일은……. 야, 어디가?”
이안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심지어 이안은 사람이 탈 수 있는 마차가 아니라 화물 트럭같이 보이는 짐마차 중 하나로 향했다.
왜 저리로 들어가?
곧 마차에서 잠깐의 시간을 보낸 이안은 마차의 문을 열고 다시 나타났다.
‘헐. 미친.’
그리고 이안을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저 인간, 진짜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지경인데?’
놀랍게도 이안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와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오늘 붉은 색이 살짝 섞인 의상을 걸치고 나왔는데, 포인트가 똑같은 옷이었다.
대체 저런 옷은 어디서 찾았나 싶을 정도 비슷한 옷이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
이건 태연한 척을 할 수가 없는 미친 짓이었다.
나는 마침내 감탄했다.
‘이 새끼……. 찐이다. 찐이야.’
이 정도의 광기면, 솔직히 인정해 줘야 했다.
나는 목숨을 얼마 남지 않은 망나니 시한부로서 이 인간의 광기를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인정 안 할 수가 없잖아.
다른 말로는 학을 뗐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제는 인간 아닌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이안이 출발하자며 손을 내밀었을 때도 전처럼 화를 내진 않게 되었다.
진짜 인간이 아니라 또라이의 화신을 보는 기분이네.
“설마 저 마차들도 같이 가져가니?”
“그럴 리가요. 목적을 달성한 마차들은 돌아갈 겁니다, 공녀님.”
그럼 정말로 옷 하나를 위해 마차를 네 대나 가져왔단 소리였다.
이걸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라 불러야 할까. 곱게 미친 게 아닌 것 같아.
……왜 소설에 이 사람에 대한 묘사 한 줄 안 나온 거지? 이렇게 독보적인데?
그렇게 나는 차일드 가문의 마차를 타고 호숫가로 출발했다.
마차 안에서 이안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는 거의 대답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말을 끊기 아주 좋은 단답으로 끝냈다.
이안은 몇 번 더 시도하더니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그를 관심 밖에 두었고, 풍경만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이안을 보지 않았다.
이안 쪽에서 무언가 사각사각 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쳐다보지 않아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듣기로는 펜 소리 같았는데, 내가 상대해 주지 않으니 서류라도 보나 싶었다.
그렇게 침묵으로 가득한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한번 호수 공원에 도착했다.
하필 오늘도 날이 무척이나 좋아 사람이 많이 보였다.
‘확 구름이나 낄 것이지. 흐리고 구름도 끼고?’
비는 안 된다.
비가 왔다간 분명 그 핑계를 대면서 다른 날로 이동하자 배를 까뒤집을 모습이 선했으니까.
게다가 나도 비 오는 날에 움직이는 건 원치 않았다.
걷고 있으려니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이쪽으로 꽂혔다.
내가 시선을 돌리면, 언제 쳐다봤다는 듯이 홱홱 고개를 돌리며 애써 자기 일을 하는 귀족들이 보였지만.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끼며 성큼 걸어갔다.
이윽고 우리는 가장 명당자리에 도착했다.
내가 아리아랑 함께 놀았던 그 자리였다.
이 남자는 이 자리는 어떻게 잡은 건지, 사람이 없었다.
비교적 주위에 있던 사람조차도 그날처럼 날 보고 짐을 후다닥 챙겨 슬슬 물러나더라. 내가 잡아먹나.
‘오늘은 사람이 좀 있어 줬으면 했는데.’
얘랑 둘만 있기 싫다고.
내가 뚱하게 서 있는데, 이안이 대뜸 무언가를 내밀었다.
돌돌 말린 양피지였다. 이건 왜 주는 거지?
눈을 돌려 슥 보자, 이안이 싱긋 웃으며 자신에게로 가져와 직접 펼쳐 보였다.
놀랍게도 양피지를 펼치자 웬 그림이 나왔다.
‘……나?’
내 모습을 그린 초상화였다.
샤를리즈의 얼굴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나 싶은 얼굴이었다.
‘잘 그렸네.’
신기한 건 사람들이 바라보는 샤를리즈는 아름답지만 마치 독사과처럼 표독스럽고 악독한 여자였다.
이 때문인지 알츠베이트 저택에도 샤를리즈의 초상화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책 속 악녀란 이름에 걸맞게 간드러지게 웃거나, 표독해 보이는 인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그림은 뭔가…… 선해 보였다.
샤를리즈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채색은 넣지 않은 미완성이었는데, 굉장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
“제가 그렸습니다.”
뭐? 나는 이번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내보였다.
정확히는 ‘말도 안 돼. 네가?’ 하는 표정에 가까웠을 거다.
“아직 공부 중이라 그렇게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공녀님께서 가만히 계셔 주신 덕분에 거의 완성했습니다.”
……마차 안에서 들려왔던 사각사각 대던 소리가 설마 그림을 그리는 소리였어?
그저 내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 남자도 자기 할 일이나 하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관심 주지 않으니 할 거 하는구나 정도의 감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그림으로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걸렸다.
저택에 걸려 있던 무수한 초상화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네가 보는 나는 이래?”
“네? 네. 그렇습니다. 부족한 솜씨지만요.”
“…….”
“못생겼는데.”
“네? 그럴 리가요.”
“난 이렇게 순하게 생기지 않았어. 네 눈은 아무래도 크게 잘못된 것 같네.”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한참을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제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걸 보면, 공녀님께서는 소문과는 다르거나…… 아니면 달라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보이냐, 아스킨아. 물론 당신이 이 상황을 볼 수는 없겠지만.
날 처음 본 사람은 이렇게 느끼는데, 당신은 대체 나한테 왜 그랬냐.
나는 입술을 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 쪽은 거의 완성한지라 이대로 색상까지 칠해서 제 방에 전시하고자 합니다.”
“……미쳤니? 그걸 왜 네 방에 걸어 놔. 너 범죄자야?”
이거 완전 스토커 아니야? 내가 혐오하는 시선을 보내자 이안이 화들짝 놀라며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 제가 그린 그림이니까요?”
“몰래 그린 거겠지.”
“음, 혹시 불쾌하셨다면 모델 값으로 식사 대접할 기회를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당했다. 이걸 원한 거였구만? 화를 내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어쩜 이렇게 작업과 수작질을 위해 태어난 것 같지?
설마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식사를 위한 발판이었던가.
나는 속으로 이거 진짜 프로 바람둥이 뺨친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됐고, 미리 말했지만 이 호수를 한 바퀴만 돌면 끝이야.”
이렇게 자리를 잡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 약조는 어디까지나 호수를 함께 걷는 것이었으니까.
이안은 이것마저 항의할 생각은 없었는지 얌전히 수긍했다.
그러면서 에스코트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놈의 팔을 잡다가…… 역시 안 되겠다 싶어서 내팽개쳤다.
“널 잡았다간 분명 내 발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네?”
“아, 발길질 정도야, 애정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 귀여운 짓을 하겠어? 하이힐로 찍어 버릴 건데.”
“……그, 그것도.”
“어딜 찍을지도 물어볼래?”
“…….”
그렇게 우리는 합의하에 함께 그냥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