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잠시 시무룩해하던 이안은 걷기 시작하자 금세 텐션이 돌아왔다.
쉴 새 없이 떠들며 이 호수 곳곳의 특징과 포인트들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듣다 보니 이놈의 설명이 재미가 있었다.
마치 아주 솜씨 좋은 가이드라고 할지, 박물관의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 호수 서쪽에 우뚝 선 바위가 있게 된 것이지요. 그 뒤로 제국의 모든 연인의 제 1순위 밤 데이트 코스가 되었습니다. 저 바위 앞에서 밤에 입을 맞추면 영원히 이어진다고들 하니까요.”
“웃기지도 않네.”
영원히 이어진다, 이런 소리를 들으니 아스킨이 절로 떠올랐다.
그 인간과는 영원히는 됐고 딱 1년만 약혼했으면 했는데 말이지.
1년짜리 계약을 성공시켜 주는 소원 바위는 없나?
“만지면 돈이 나오는 바위 같은 건 없어?”
“이런, 공녀님께서도 돈이 필요하십니까?”
“있어서 나쁠 거 없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나는 이안의 설명을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다음에 아리아와 다시 오게 된다면 알려 주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아마 눈을 빛낼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선명해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부와 재화를 말씀하시니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이안이 나를 이끌고 간 곳은 분수대였다.
마법을 이용해 호수 물을 끌고 와서 만든 분수대라나.
“이곳에 동전을 던져서 그릇 안에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흐음, 이런 분수대는 세계 어디를 가도 있구나.
한국에도 있고 유럽에도 이런 곳이 있었지.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안이 준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소원이 이루어지긴 해?”
“네. 물론입니다. 이 분수대의 신상은 대신전과 성기사단 단장이신 카하스 님마저 인정하신 신성한 동상입니다. 신성력이 깃들어 있어요.”
이안이 정말이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내가 조금 전 사랑 바위인가 뭐시기처럼 콧방귀를 뀌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만약 이런 걸로 소원이 이뤄진다면 못할 것도 없잖아?
나는 그릇이 있는 곳을 유심히 보았다.
분수대에는 커다란 물병을 안고 허리를 숙인 여성의 조각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여신이란다.
“세계를 수호하는 여신이시지요, 여신께서는 소원을 꼭 들어주실 겁니다. 물론 동전을 정확히 저 접시에 넣는다면 말입니다.”
한 손에는 물병을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었는데, 저 접시 안에 몇 개의 동전이 보였다.
물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동전이 보이는 것에 비해 접시에 담긴 것은 거의 없었다.
이안은 이게 보기보다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이라, 있긴 하겠지. 나를 책에 빙의시킨 신도 있으니까.’
그래, 이렇게 책에도 빙의했는데, 내 소원도 이뤄 주지 않으려나?
신은 정말로 있다.
내 소원을 정말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은화 한 닢을 던졌다.
땡그랑!
“이런, 아쉽군요…….”
아쉽게도 내가 던진 은화는 그릇에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그릇의 테두리를 맞고 떨어졌다. 아쉽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원은 이렇게 비는 게 아니죠. 만약 제가 던진 은화가 들어가면 공녀님께 양보하겠습니다. 공녀님께서 소원을 비시지요.”
내가 간절하긴 했나 보다. 다정한 저 목소리에 순간이지만 혹하고 말았다.
그래, 솔직히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그러나 나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눈을 지그시 좁혔다.
“그걸 핑계로 또 무슨 이상한 조건을 내밀려고?”
“아, 아닙니다. 제가 오해하게 해 드렸군요. 그저 이건 선물이니,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이안은 내 노려보는 눈에 다정하게 대답하고는 잠시 기다리라며 마차로 뛰어갔다.
쟨, 대답하더니 갑자기 왜 마차로 뛰어간 거야?
곧 이안이 돌아왔다.
게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잘 보라는 말까지 했다.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뒤로 물러나 주먹을 든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주먹 가득 움켜쥔 은화가 보였던 것이다.
촤아악!
땡그랑! 땡그랑!
이안이 움켜쥔 은화를 공중으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은화들이 쫘아악 날아가더니, 놀랍게도 꽤 많은 동전들이 그릇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저거 넣기 힘들다며?’
어떻게 저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앗, 웃으신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몰라?”
하지만 우습긴 정말 우스워서 결국 살짝 소리마저 내고 말았다.
정말, 소원을 들어주긴 할까?
“소원을 양도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아, 저도 이렇게 많이 들어갈 줄은 몰랐는데…….”
“그냥 잘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실제로 뛰어난 기사들도 넣지 못해서 영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인 걸요.”
이안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정말, 정말로 간절한 소원만을 들어준다고들 하더군요.”
진지한 표정이었다. 유들유들함이나 장난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표정.
이에 나는 슬쩍 분수대를 보았다.
온화하게 웃는 저 여신은 혹시 나를 이곳에 보낸 여신일까?
나는 신상을 빤히 바라보다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저 좀 살려 주시고, 제 코인도 돌려주실 수 있나요? 이대로 죽으면 아까워서 원귀가 되고 말걸요?’
그냥 원귀도 아니고 생전 샤를리즈보다 더욱 악독한 악녀 악귀가 될 테다.
내가 속으로 소원을 빌고 돌아서려는데, 뭘까.
접시가 아주 잠깐 반짝거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햇살에 잘못 반사된 것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날 따라오며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 한 번 웃겨서 헛웃음이 터졌다.
호수를 절반쯤 걸었을 때, 정비된 길 사이로 예쁘게 생긴 정자가 보였다.
이건 아리아랑 왔을 때는 보지 못했는데, 걷지 않고 한자리에만 있어 발견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자에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호화스러운 차림새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사치에 익숙한 샤를리즈의 눈으로 봐도 잘 차려진 테이블이었다.
‘여기서 피크닉을 보내는 귀족이 차려 둔 건가?’
사실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슬쩍 배가 고팠다.
게다가 아침도 저 남자가 준 식사는 먹기 싫어서 걸렀지 않았나.
하지만 ‘샤를리즈’와 다르게 나는 다른 귀족의 소풍 점심까지 뺏어먹을 정도의 악녀가 아니었다.
‘먹을 거 뺏으면 저주받아. 암.’
내가 애써 눈길을 돌리는데, 놀랍게도 이안이 정자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인상을 찡그리려 하자, 나를 돌아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시장하시지요?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혹시나 배가 고프실까 봐요.”
나는 가기 싫었지만……. 솔직히 인정한다.
나름 나쁘지 않은 가이드와 분수대로 인해 마음이 1할 정도 풀려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못 이기는 척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자, 놀랍게도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하녀들과 시종들이 주르륵 나타나 그릇의 뚜껑을 여는 등 세팅을 마쳤다.
나는 차려진 것들 중 3층 트레이에 있던 치즈 케이크를 한 조각 가져와 먹었다.
‘……이 맛 뭐야?’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렸으니까.
게다가 약간의 짭조름함마저 있어서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좋아하던 솔티 카라멜 마카롱을 먹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샤를리즈가 먹는 것은 거의가 제국 최고의 것들이라 봐도 좋았다.
내가 치즈 케익을 좋아한 탓에 좋다는 케익은 다 먹어 봤지만, 이번에 순위가 바뀔 것 같다.
그 정도로 맛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허겁지겁 다 떠먹고 또 먹고 싶은데, 체면을 차리기 위해 천천히 음미하는 척하며 먹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면 어째서인지, 이안은 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야, 쟤? 왜 기분 나쁘게 떨고 있어?
“아, 죄송합니다. 자, 끕, 잠시 오한이…….”
나는 이상한 소릴 하는 이안을 무시한 채로 놓인 음식들을 하나씩 먹었다.
여기 놓인 음식은 하나같이 다들 너무 맛있었다.
‘내가 배가 고파서인가?’
아니다. 샤를리즈 몸은 까탈스러웠다.
평생을 맛에 예민하게 살아왔고, 샤를리즈가 사라진 몸에도 그런 본능과 버릇이 남아 있어서 나는 팔자에도 없는 편식마저 할 지경이었다.
이건 절대적으로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공녀님.”
내가 한창 음식을 먹는 동안 이안이 와인을 꺼내 왔다.
아까 하녀들도 그렇고 대체 어디서 휙휙 나타나고 꺼내 오는 거지?
“지난번 와인은 역시 애주가이신 공녀님께 맞지 않으신 것 같아 이번에 특별히 준비해 보았습니다.”
나는 감흥 없는 눈으로 와인을 보다 살짝 놀랐다.
내가 놀란 게 아니고 샤를리즈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고 할까. 저 와인, 샤를리즈의 기억에 있었다.
‘……애주가인 샤를리즈조차 단 한 번밖에 못 마셔 본 와인?’
가격이 문제라기보다는 구할 수가 없는 와인이었다.
그런 와인을 내게 내미는 저 남자는 또 뭔지.
나는 와인 자체엔 딱히 관심도 없었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게 등장하자 본능적인 호기심이 들고야 말았다.
사실 의욕적으로 살 때야, 내가 빙의하면서 몸이 알코올 쓰레기가 되고 말았겠다,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는 지킬 이유가 없었다. 막살겠다 결심하지 않았던가.
“시음해 보시겠습니까?”
“……그럼 자랑하려고 꺼냈니?”
그런 생각으로 내미는 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