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194)

97화

한창 달고 짠 것을 잔뜩 먹어서일까? 오늘따라 와인도 달달한 게 맛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도수가 센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샤를리즈의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이전엔 이 술을 먹고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술이 조금 세진 것 같기도 했으니 더 마셔도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켜고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후회했다.

‘……사람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나는 멍청한 게 아닐까.

술기운에 알딸딸해지는 머리로 느꼈다. 아니, 확신했다.

‘아무리 정말 달콤하다지만 연거푸 들이켜다니, 미친 거지.’

게다가 도수도 모르는 술이었다.

그저 달콤한 맛에 취해 꿀꺽 마셔 버린 내 탓이었다.

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은연중에 한국에서 편의점에서 파는 도수가 거의 없는 달달한 술에 익숙해진 탓에 꿀꺽꿀꺽 마신 탓이기도 했다.

나는 끙, 후회하면서도 알딸딸함을 깨기 위해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하, 안 되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녀님?”

“나, 가야겠어.”

“이런…… 제가 모셔다…….”

“아니야!”

내가 직접 움직일 거야.

왜 이런 고집스러움이 툭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는데, 샤를리즈의 버릇이 아닌가 싶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낮술에 취하다니 참으로 추태였지만, 일어나서 억지로 가려다 술기운에 못 이겨 결국 휘청거리고 말았다. 이게 더 추태였다.

‘윽!’

시야가 기우뚱 기우는 순간, 이안이 잽싸게 나를 잡아 주었다.

허리에서 단단한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싸 안은 탓에 고개를 들면 이 남자의 얼굴이 매우 가까웠다.

몹시도 놀란 얼굴은, 평소와 같은 유들유들함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가질 여유도 없었는지, 미소도 잃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손을 들었다.

“너 왜 나 만져? 죽고 싶어?”

“……죄송합니다.”

“하아……. 이게 다, 네가 나가자고 해서 이런 거잖아.”

어휴, 추태다, 추태. 주정을 부린다는 자각을 하면서도 입이 멈추질 않았다.

속으로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놔, 너 또 뺨 맞고 싶어?”

“…….”

이안은 말없이 뺨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더욱 얄미웠다.

안 그래도 밉상인데 이 밉상 얼굴 한번 때릴까 하다가 발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공녀님께서는 자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몹시도 외로운 얼굴을 하세요.”

“……뭐?”

“저도 알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평생 사람만을 봐 오다 보니……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려도 괜찮다면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어요.”

“…….”

“왜 지금도 그런 얼굴을 하시는 건지 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멈췄던 발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 샤를리즈의 본능이 싫어하는 거야.

……이 남자가 또 나를 연민했으니까.

나로서도 못마땅했다. 네가 뭘 안다고 안쓰럽니 마니야?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샤를리즈의 숙련된 발은 정확하게 정강이를 걷어찼다.

정강이 중에서도 가장 아픈 곳을 차인 이안이 찡그리며 중심을 잃어버렸다.

그가 나를 안고 있던 탓에 나와 함께 넘어지며 테이블이 와장창 엎어졌다.

‘아 미친, 나를 안고 있었잖아!’

나는 후회했다.

……아무래도 술에 취하면 샤를리즈의 본능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은데.

이건 솔직히 막살자고 결심한 내 의지와 체념 때문에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누운 채로 매우 후회했다.

끄응,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손이 따끔해서 보았더니 손가락에 상처가 나 있었다.

쭉 찢어진 게, 아주 시원하게도 난 상처였다.

오, 피 나네. 술 때문인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신기하고도 멀거니 바라볼 때였다.

“공녀님!”

이안이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아챘다.

나는 처음으로 이 남자의 당황한 표정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왜 사과하는 걸까. 얻어맞은 쪽은 자긴데.

내가 넘어지고 다친 건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찡그리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안이 힘을 주어 잡았다.

“놔.”

“출혈이 큽니다, 여기서는 차일드 저택이 가까우니 이곳으로 치료를 하러 가시겠습니까?”

“아니, 돌아갈 거야. 내 기사를 불러.”

“공녀님! 아, 그럼 가는 길에 황실이 있으니 황실로 모시는 건…….”

내 또 다른 신분을 기억한 건지 황실 운운했지만, 내 기분은 더욱 불쾌해졌다.

이 상처를 폭군 오빠 놈에게 보이라고? 모르긴 몰라도 아주 신나서 낄낄 웃을 거다.

이제 패악을 부리다 네 손가락도 찢어 먹냐고 말이다.

“황실은 절대 안 돼.”

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이안의 표정에 간절함이 어렸다.

조금 전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저택으로 가면 안 되겠냐고.

“우리 가문에도 좋은 의사가 있으니까 제발 이제 좀 꺼져.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제가 들었던 소문이 모두 거짓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왜 없습니까?”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날 보다, 내 손가락으로 시선을 내려 꾸욱 잡았다.

“어떻게든 공녀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

이안이 급한 대로 손수건으로 내 손가락을 싸맸다.

“알츠베이트 가문의 주치의가 얼마나 대단한 의사인지는 잘 모르나, 이대로 공녀님을 그대로 보내 드리면 알츠베이트 공작님과 황제 폐하께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치료가 끝날 내까지만, 아니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이라도 차일드 저택에 머물러 주시겠습니까?”

알츠베이트 공작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잠시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이대로 돌아가길 고집하면, 알츠베이트 공작과 폭군 오빠의 귀 양쪽에 들어가는 건가?

‘그런 끔찍한 일이…….’

알츠베이트 공작과 이 남자가 같이 있는 꼴을 상상하니 끔찍하고, 여기에 폭군 오빠까지 끼어든다면 더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네 집에 가서 치료할 테니, 맹세해. 아니 명령이야. 이제부터 허튼 소리를 하면 정말로 테리 밥으로 던져 주겠어.”

“……맹세하겠습니다.”

평소처럼 능글맞게 받아치지 않아 낯설었지만, 그 얼굴이 진실되어 보여 결국 나는 이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는데, 내 손가락에서 생각보다 피가 많이 배어 나왔다.

이제는 손수건을 새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이안이 당황해서는 더욱 강하게 지혈했다.

“……넌 왜 이런 거에 익숙해 보이지?”

“타국 살이를 조금 험하게 했더니, 기초 의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가물가물한 시야 속에서 픽 웃었다.

“거짓말,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렇게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유들유들함이 빠진 목소리는 정중했다.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험하게 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이안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마부에게 속도를 낼 것을 명령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응시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어떻게 보이긴…….”

또라이처럼 보이지.

분명 속으로만 말했건만, 이안은 마치 듣기라도 한 듯이 실소를 흘렸다.

“물론 미친 척은 익숙하긴 합니다. 때로 미친 척할 일이 발생하기도 하더군요.”

“무슨 삶을 살았길래 미친 척이 익숙해? 생긴 건…… 바람둥이에 귀공자처럼 생겨서는.”

“아, 공녀님 눈에 잘생겨 보입니까?”

내가 한 말 중 어디에 잘생겼다는 소리가 있지?

취한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노려봤다. 이안은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런 상처는 덧나면 큰일입니다.”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 *

마차가 차일드 저택에 도착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인지 술에서 어느 정도 깬 나는 내 발로 걸어서 마차에서 내렸다.

이안은 지혈 때문이라며 여전히 내 손을 움켜잡고 걸었고, 나는 하는 수없이 손을 내어 준 채로 걸었다.

“복도에 피가 떨어지는데?”

“괜찮습니다. 저희 집 메이드 청소 잘합니다.”

“그게 아니라 내 손가락 잘리는 건가 궁금해서.”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릴 하십니까?”

그러게. 슬슬 아파 오니까 별생각이 다 드네.

중간부터는 이안의 손을 뿌리치고 내 스스로 손을 움켜잡고 걸었고, 이안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뒤따라왔다.

차일드 가문은 이번 대 수장이 돈을 아주 많이 벌었다던데, 과언이 아니었는지 저택 안이 꽤 으리으리했다.

물론 사치의 왕, 알츠베이트 가문에 비할 바는 되지 않았지만.

복도를 걸어가는데, 누군가 모퉁이를 돌아서 나왔다.

놀랍게도 아스킨이었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쟤가 왜 여기서 나와?

아스킨도 몹시도 놀란 표정이었다.

나와 비슷한 기분이라는 듯.

“…….”

“…….”

멈춰 선 자들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스킨을 무시한 채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었다.

“……나는.”

막 스쳐 지나간 순간, 아스킨이 입을 열었다.

마주친 시선이 어쩐지 흔들렸단 생각이 드는 순간 그가 이어 말했다.

“차일드 백작과 만나기 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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