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9/194)

98화

……뭐 어쩌란 거지.

뭐, 차일드 백작과 할 말이라도 있던 모양이지? 보통 공작 같은 고위 귀족이 자신보다 아래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 보지.

그런데, 저 남자에게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아닌가?

‘빚과 아리아.’

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그렇다면 저 남자가 평온하게 걷고 있을 리 없지.

그럼 다른 한쪽이었다.

술이 살짝 깨긴 한 건지 머리가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갔다.

‘설마, 차일드 백작에게도 돈을 빌렸던 건가?’

이렇게 생각한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빚쟁이면서, 빚쟁이 주제에 내 제안까지 거절했어?’

잊었던 부아가 치밀었다.

“레무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급히 인사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공녀님, 공녀님! 이곳에 오래 있으실 때가 아닙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뚝. 뚝. 바닥으로 피가 떨어졌다.

아스킨은 그제야 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했다.

둔하기는. 피 묻은 손을 이제야 발견하기라도 한 건가?

“……술 냄새가 나는군.”

늘 차갑던 저 목소리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넌 왜 나한테만 이렇게 박해?

“술을 마시고 사고라도 친 것 같니?”

“…….”

“제대로 봤어. 오늘 하나를 끝장내 버렸거든.”

아, 물론 끝장난 건 내 손이다. 아파 뒈질 것 같다.

하지만 저 남자 앞에서 끝내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는 건, 샤를리즈 본능에 남은 고고한 자존심 자락 때문일까?

어쩐지 수긍하는 듯한 저 얼굴이 꼴 보기가 싫었다.

“대체 무슨…….”

“죄송합니다, 공작님. 공녀님의 개인 용무이신 것 같아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아버지와 말씀 잘 나누셨길 바라겠습니다.”

이안 차일드가 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실랑이 할 힘도 없었던지라 나는 그 손에 잡혀 아스킨을 스쳐 지나갔다.

그저 아스킨에게 말하던 이안의 얼굴이 몹시도 서늘했기에, 저 얼굴이 저런 표정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이제 보니 차가운 얼굴 쪽이 더 잘 어울리는데.’

만약 이런 표정이 더 잘 어울림에도 내가 전혀 몰랐다면, 이 남자는 자신이 온화하게 보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한 게 아닐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솔직히 아스킨 보고 너랑은 상관없으니 관심 갖지 말라고 하는 말은 좀 통쾌하긴 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치료 마법사들이 셋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 가문이 진짜 돈만큼은 엄청나게 많구나 싶었다.

동시에 돈은 알츠베이트 가문만큼 많은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역시 이상하다. 이 가문과 이안 차일드는 어디서 툭 튀어나온 건지.

‘책 속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는데, 소설 전개를 뒤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니.’

나는 이 차일드 가문의 재력을 예상해 보며 치료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놀랍게도 길게 찢어서 쫙 벌어졌던 살이 아물고, 스크래치라도 난 듯 작은 상처만 남았다.

이 상처는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거라 약을 잘 바르면 된단다.

치료 마법사의 설명을 대충 넘기며 끄덕였다.

“……다행히 동맥을 끊을 만큼 상처가 깊지 않아서 그나마 치료가 빨리 된 모양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안, 이 남자는 마치 치료 마법에 익숙한지 마법사보다 더 설명을 잘했다.

자신도 이런 치료를 많이 받아 본 것처럼 말이다.

치료가 끝나서인지, 아니면 이제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잠깐 가라앉았던 술기운이 더욱 크게 올라왔다.

‘……이런 때 졸리다니,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이안은 어느새 내 상처 난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한없이 진지해서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간 이 남자가 짧은 시간에 행한 미친 짓과 또라이 같은 모습이 뇌리에 콕 박힌 탓이리라.

나는 놀람을 꾹 숨기면서 몽롱한 목소리로 툭 물었다.

“다 만졌니?”

아무래도 신경을 갉작거리며 괴롭혔던 고통이 사라져서 반동으로 더 몽롱하고 졸린 게 틀림없었다.

이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평소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니라면 더 만져도 됩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그런 변태 같은 질문을 하나.”

어차피 이미 미친놈에 또라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으니, 여기에 변태가 더해져도 상관없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손을 빼냈다.

미친 변태는 피하는 게 상책이지.

“치료도 했으니 돌아가겠어. 준비해.”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내가 여기서 쉴 수야 있겠니?”

나는 입술을 비죽 끌어올렸다. 삐딱한 미소였다.

“불쾌하고 불편한 인간뿐인데.”

여기 계속 있는지 돌아간 건지는 몰라도 아스킨 그 남자를 포함한 말이었다.

그러자 이안은 나를 빤히 보더니 진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끝까지 신경 쓰시는 군요.”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안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시겠다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에스코트까지 막진 않았다.

더 실랑이하기에는 지쳤던 탓도 있었다.

‘상처는 치료했으니, 알츠베이트 공작이나 폭군 오빠 귀에 들어갈 일은 없겠지.’

나는 복도를 걸으면서 알츠베이트 공작이나 록시디언에게 이 일을 함구하라고 이안에게 협박했다.

말했다간 모두 너 때문에 다친 거라고 할 거라면서.

이안은 내 협박을 알아들은 건지 몰라도, 어째서인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 눈이 무슨 귀여운 애완동물 보는 듯한 눈이라 기분이 매우 더러워졌다.

마차를 타러 나왔을 때, 이안은 당장 마차를 준비하겠답시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벤치에 앉아 낮게 숨을 내쉬는데, 내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시선만 올렸더니 놀랍게도 아스킨이 서 있었다.

“…….”

내 얼굴이 삽시간에 찡그려졌다.

내가 벌떡 일어나 이 남자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나를 불렀다.

“공녀.”

너, 그 여자. 이런 호칭이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봤는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얜 얼마 전에 차를 내주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할까.

하지만 나는 놈이 했던 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내 여동생에게 잘해 주면 내 마음이 달라질 거라 생각한 거라면, 미안하다.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다.”

사람이 한 번 속는 건 속인 사람 잘못이다.

하지만 두 번, 세 번째부터는 속은 사람도 잘못이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거니까.

두 번은 안 속지.

“그럼 집으로 돌아가지 어딜 가겠니? 넌 이제 와 참 멍청한 질문을 하네.”

“…….”

분명 싸늘하게 반박해야 할 이 남자는 어째서인지 나를 그저 보더니, 물었다.

“……정말 그 상처는 사람 하나를 끝장내고서 난 건가?”

별게 다 궁금하네. 새삼스럽게?

“그래, 그렇다면? 너랑 무슨 상관이지? 아, 왜 또 도덕이니 뭐니 재미없는 소릴 운운하겠다?”

샤를리즈 기억 속 아스킨의 모습이 떠올랐다.

악독한 행실을 보며 혐오를 담아 외치는 모습. 물론 오늘 끝장난 건 내 손뿐이었지만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흐응, 아니라고 하면 믿을 생각이나 있고?”

내 입에서 비아냥거림이 튀어나왔다.

피곤하게 뭘 또 입씨름을 하고 있냐. 그래, 어차피 파탄 난 거 돌아올 것도 아니고.

그대로 지나가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아스킨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뜻 헤아릴 수 없었지만 왠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바래다주겠다.”

“뭐?”

……역시, 두 번은 안 속지. 또 무슨 망발을 지껄이려고.

나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파혼한다며?”

“…….”

그럼 그렇지. 나는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째서 레무트 공작님께서 데려다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인지.”

동시에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마차를 불러온 건지 멀리서 느릿하게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공녀에게는 가는 길에 용건이 있다. 그리고 내가 가는 방향에 수도가 있으니 공녀의 저택을 들렀다가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인 듯하군.”

“공녀님께서는 제 손님이십니다, 공작님.”

이안이 나와 아스킨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 집주인으로서 끝까지 배웅할 의무가 있지요.”

두 남자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문제는 난 술기운이 자꾸만 오르는 것 같아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단 거다.

저 하얀 놈과 대화도 하고 싶지 않고, 저 회색 놈의 배웅도 받고 싶지 않다.

“둘 다 필요 없으니, 꺼져.”

난 짜증이 나 싸늘하게 지껄이고는 마차로 들어가서 앉았다.

쾅, 마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올라타려는 이안을 보며, 나는 그를 흉내 내듯이 빙긋 웃었다.

“타기만 해 봐. 평생 내 머리카락조차 못 보게 될 거야.”

그가 멈칫했다.

“……저는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하곤 하죠.”

이안이 얌전히 내려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부에게 잘 일러두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처세 하나는 얄밉도록 잘하는 인간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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