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100/194)

99화

* * *

샤를리즈를 실은 마차가 완전히 떠났다.

저벅저벅 돌아온 이안은 집주인으로 돌아와 또 다른 손님인 아스킨을 배웅하고자 했다.

비록 아버지의 손님이긴 하나, 더는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스킨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태도였다.

“괜한 오해를 하게 만든 것 같아 유감이군.”

아스킨의 서늘한 말에 이안은 더는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지 않았다.

복도에서 아스킨을 마주했을 때처럼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괜한 오해는 습관이 될지도 모르니, 앞으론 오해할 일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이 방점을 찍듯이 말했다.

“수도 모든 사람이 이미 두 분의 파혼을 알고 있습니다.”

알다 뿐일까, 딸랑이를 쥐고 노는 아이조차도 부모의 수다를 따라하듯 파혼, 파혼하고 옹알이를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파다하게 퍼진 일이었다.

“불필요한 오해는 공작님의 대업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스킨은 전과 다르게 도전적인 이안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여기서 검을 뽑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딪히고 싶지않은 마음에 돌아서서 원래 가려던 길로 향했다.

성큼 성큼 멀어지는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그윽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미난 친구네.”

홀로 속삭이면서.

* * *

집에 도착하자, 전담 하녀들이 너나할 것 없이 우르르 나와 나를 반겼다.

개중에는 전담 하녀로 부리던 삼총사뿐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우르르 나온 거지?

나는 하녀들의 눈에 하나같이 설렘과 기대가 어린 것을 발견하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 그놈과 옷을 맞춰서 외출하는 걸 이 언니들도 봤었지?

‘근사한 데이트라도 한 걸로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지금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목욕 준비해.”

“네, 공녀님.”

곧이어 빠르게 준비된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하녀들은 목욕 시중을 들며, 은근하게 오늘 외출은 즐거우셨냐는 둥 떠보는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 마시고 목욕은 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욕조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물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으니.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바래다주겠다.”

그 말을 하면서 보였던 표정.

분명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남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기나 할까?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던 그 표정을.

‘나도 참 웃기네.’

나는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하, 웃었다.

‘이제 와 혹시 파혼을 미루자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하다니.’

조금 전에 두 번 속으면 학습 능력이 없느니 운운했건만.

내가 바로 그 멍청이일지도 모르겠다. 짜증 나.

입술을 꾹 다물고 욕조를 노려보던 나는 이내 파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술기운도 있고 해서 일단은 오늘은 푹 자야겠다.

“모두들 돌아가.”

“……네, 공녀님. 편안한 밤 보내시어요.”

목욕이 끝난 뒤, 나는 방 안에 혼자 남아 눈을 꾹 감았다.

그날은 참 우스운 꿈을 꿨다.

“네가 바라는 게 이건가?”

아마도 현실에서는 절대 할 것 같지 않는 젖은 흰 셔츠와 풀어헤친 단추.

방만한 차림새를 한 아스킨이 놀랍게도 한 손에 무언가를 든 채로 내게 다가왔다.

“어떤가.”

그 손에 든 것이 코인이라면 믿기겠는가?

……미친, 코인을 든 아스킨이 옷을 풀어헤친 채로 다가오다가 소파에 누워서는 내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이것도 가지고, 나도 가지는 건?”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스킨이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이 남자를 걷어찼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눈을 뜬 뒤에 탄식했다.

이런 개꿈을 봤나!

……하지만 눈을 뜨고 나서 속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 * *

내가 눈을 번쩍 떴을 땐 경악스럽게도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시계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뭔데 이렇게 오래 잤어?’

경악은 곧 가라앉았다. 맞아, 나 어제 과음했지?

다행스럽게도 숙취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는 조금 아파서 수잔을 불러 숙취 약이나 먹어야겠다 싶었다.

……아니, 사실 이 머리는 숙취 때문에 아픈 게 아닌 것 같다.

‘대체 내가 무슨 개꿈을 꾼 거지?’

나는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신음을 흘렸다.

누가 꿈은 욕망이 발현되는 통로라고 했는데, 그거 아무래도 개소리겠지? 그렇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왜 그 남자가 젖은 셔츠를 입고 나오냐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꿈에 관한 명언은 또 있지 않은가.

꿈은 반대라고, 현실에서 답답할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 인간에 대한 반발심이 이렇게 나타난 게 아닐까?

무엇보다도 내가 그놈을 걷어찬 게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현실에서도 한 대 차주고 싶네.’

한참을 생각하다가 생각의 방향이 엉뚱하게도, 이제 못할 거 없지 않나? 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아리아를 생각해서 관두기로 했다.

‘이렇게 꿈으로 나타날 정도라…….’

이건 다 어제 그 남자가 내게 말하려던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대뜸 이상한 표정을 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그 소리가 뭔지, 내가 또 속고 실망하게 되더라도 듣고서 실망해야겠다.

어차피 이젠 잃을 것도 없잖아?

최소한의 준비를 끝내고 저택을 나섰다.

‘돌아오면 밤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하늘을 보며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할아버지가 출타 중이었기에 더욱 마음 놓고 출발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영감이 있었더라도 ‘어쩌라고’를 외치며 출발했겠지만.

호위는 최소한으로 꾸렸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제트만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그건 어려운지라 대충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인간들만 끌고 왔다.

마차가 달리고 달려, 이윽고 레무트 영지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이 영지에는 내 소문이 퍼지지 않은 건지, 아니면 퍼지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지민들은 지난번처럼 알츠베이트 표식을 단 내 마차를 보고 여전히 환호를 보내 주었다.

어떤 이들은 ‘공작 부인님!’ ‘예비 공작 부인님!’ 하고 외치는 바람에 기분이 묘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기란 불가능해서 갈수록 불쾌한 기분으로 바뀌어 갔다.

‘내가 딱, 그놈이 뭐라고 하는지만 듣고 돌아간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꾹 붙잡고 성에 도착했다.

마침내 익숙한 성문 앞에 내렸을 때였다.

오늘도 낯익은 기사가 서 있겠거니 하고서 고개를 드는데 누군가 내게로 달려왔다.

숨을 몰아쉬는 인영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언니!”

놀랍게도 아리아였다.

“아리아? 당신이 어떻게 알고 달려온 거예요?”

일단 몸이 약한 아리아에게 무리가 될까 싶어 서둘러 아리아를 잡아 주었다.

아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창문으로 밖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마차가 오늘 걸 보고 달려 나왔다고.

얼마나 열심히 뛴 건지 새하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아리아의 이마를 닦아 주는 동안 아리아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켰다.

“달려오면서도 제가 잘못 봤나 싶었어요.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신 거예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리아를 보러 왔죠.”

사실 마차에 막 올라탔을 때만 해도 아스킨 그 인간을 만나 못 들었던 얘길 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진정이 되질 뭔가.

그래, 그 얘길 들어서 어쩔 거야?

만약 별 시답잖은 얘기거나 또 한 번 속아 넘어간 거라면 억울하겠지.

게다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면 그 인간이 날 찾아와서 얘기하고도 남았겠지 않겠나?

꿈으로 치솟았던 분노가 시간이 지나 가라앉은 셈이었다.

그래서 내릴 즈음 되어서는 아리아를 보고 가야겠다 마음먹은 참이었다.

‘나 완전 열반한 사람 같은데. 이게 죽기 전 사람의 자세인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아리아가 상기된 뺨으로 활짝 웃는 모습이, 기쁨으로 차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추워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 언니!”

“네. 당신을 위해서도 그러는 게 좋겠네요.”

아리아가 내 손을 잡아당겼고, 나는 아리아의 손에 순순히 이끌려 가면서도 잠깐 멈칫했다.

“아리아, 내 방문은 공작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오빠는 지금 저택에 없으니까요. 가요, 무조건 괜찮아요!”

아리아의 무조건 괜찮다는 말이 아리송하긴 했지만, 그 남자가 없다는 말에 들어가기로 했다.

사실 있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내 기분이 나빠질 게 뻔했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아리아는 그대로 나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고는 방 한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고는 옷장을 열고는 내가 사 준 옷들이 예쁘게 진열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이 흡사 세 잎 클로버를 열심히 모아 두고 뿌듯해하는 토끼를 보는 것만 같아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예쁘게 정리를 잘했다고 칭찬하자, 아리아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사실 언니가 사 주신 것들을 언제 다 입어 볼 수 있을지 염려는 되지만…… 너무 좋아요.”

“왜 못 입어요, 매일매일 하나씩 입어 보면 되죠.”

“하지만 저는 외부에 나갈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럼 나랑 쇼핑 갈 때마다 입으면 되겠네요.”

“네?”

“나는 자주 가요, 쇼핑.”

그러자 아리아는 화들짝 놀라서는 자신은 돈이 없어서 자주가 아닌 가끔 동행할 수 있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모두 사 주겠다고 하자, 언니한테 자꾸 신세 지면 안 된다며 거절이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는 웃으면서 짐짓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친구가 아리아 하나뿐인데, 아리아가 거절하면 누구랑 놀죠?”

“네?”

“하나뿐이라서 사 주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 꼭 받아 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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