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1/194)

100화

“하지만.”

아리아가 시무룩해했다.

“……아리아?”

“제게도 친구는 언니뿐인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

어, 이게 아닌데? 뭔가 아리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나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고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화제를 돌려야 한다!

“당신의 방은 공작의 집무실 방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네요.”

“오빠는 언제 오냐구요?”

“네?”

왜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내가 눈을 깜빡이자, 아리아가 나를 응시했다.

“혹시 절 보러 온 게 아니라, 오빠를 보러 오신 거였나요?”

아리아가 입술을 삐죽이는 게 보였다.

나는 픽 웃으면서 아리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삐진 척하는 걸로 친구 놀리면 못 써요.”

“……티 났어요?”

아리아가 금방 웃었다.

“하긴 못난 오빠 뭐 볼 게 있다고, 언니가 보겠어요. 안 그래도 오빤 이 시간 즈음에 온다고 했으니 조금 있으면 올 것 같긴 한데…….”

아리아는 시계를 흘끗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언니는 계속 이 방에 계셔도 돼요.”

그 남자와 마주쳐서 불편할 것 같으면 여기 계속 있어도 된다고.

나를 배려해 주는 말이었다.

……역시 아리아는 그 남자에게 한 만 배쯤 아까운 동생 같아.

이대로 나도 알츠베이트를 탈출하고 아리아를 빼돌려 어디 갈 수는 없나.

망상에 가까운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아리아의 수다에 집중했다.

한편으로는 아리아의 방을 한번 슥 둘러보며 눈에 담았다.

방은 꽤 넓었지만, 방을 채우는 가구들은 공녀가 쓴다기엔 한없이 단출했다.

이런 내 모습을 눈치라도 챈 건지, 아리아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언니 혹시 저택을 구경시켜 드릴까요? 아직 언니가 이 저택을 둘러보진 못하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그 말은 맞지. ‘샤를리즈’는 여기 오는 족족 쫓겨났었고, 나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리아는 이제야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걸 깨달은 듯 떼를 썼다.

솔직히 떼라고도 할 수 없는,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본 것뿐이었으나 나는 껌뻑 넘어갔다.

‘솔직히 아리아의 성장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좀 아쉽긴 하다.’

이 아가씨는 얼마나 미인으로 성장할까?

원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엔 ‘샤를리즈’가 관여하지만.

내가 곧 죽을 테니 이 아가씨가 일찍 죽을 일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쪽이에요!”

아리아가 날 데려간 곳은 아리아의 모친, 선대 공작 부인이 쓰던 방이었다.

방 한쪽에는 가족 전체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이전에 응접실에서 보았던 초상화와 비슷한 그림이었다.

응접실에 걸린 그림은 다들 딱딱한 표정이었다면, 이 방에 걸린 초상화는 부드럽게 웃거나 활짝 웃는 표정들이었다.

마치 단란한 가족을 살포시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다정한 초상화였다.

‘다시 봐도 선대 공작 부부는 엄청난 미남미녀네.’

아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선대 공작 부인께서 정말 미인이시네요. 아리아는 엄마를 닮았나 봐요.”

“아니에요, 엄마가 훨씬, 훠얼씬 예뻤어요.”

아리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초상화를 향했다.

그러고는 대뜸 초상화 속 모친을 향해 나를 소개했다.

“엄마, 이쪽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예요.”

“…….”

“성격은 조금 까칠하지만 친해지고 보니까 속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리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나는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저기, 아리아? 이건 칭찬인 거니, 까는 거니?

설마하니 아리아가 대놓고 먹이는 망나니 영애들처럼 굴진 않을 테니…… 그저 정말로 모친에게 말하는 건가 보다 싶었다.

“예전에 괴롭힐 땐 조금 미웠는데……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 결국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어진 아리아의 중얼거림에, 나는 생각하던 것을 모두 잊었다.

한편으로는 어쩌면…… 아리아는 진짜 샤를리즈의 유일한 이해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한 들었지만 지금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 악녀는 지독하게 자존심이 드높았으니, 아리아의 이야길 제대로 들을 생각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아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나도 모르게 어린 여동생을 대하듯 우쭈쭈 하는 나긋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쭈쭈, 아리아 다 컸네요.”

네 오빠보다 훨씬 났다. 훨씬.

“꺄악 언니!”

“어휴 정말 다 컸어요, 다 컸어.”

“저, 전 진작 다 컸거든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내면이 다 커야 큰 거죠. 이 세상엔 나이만 먹거나 몸만 큰 어른들이 아주 수두룩하거든요. 그리고 아리아, 아쉽지만…… 나는 아리아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는데 왜 이리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아리아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언니, 혹시…… 저도 언니한테 뭔가를 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나는 해 준 게 없는데. 그리고 부담 안 가져도 돼요.”

“아니에요. 저도 언니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아리아의 눈이 똘망똘망했다.

그런데 왜인지 순식간에 시무룩해지더니 시선을 내렸다.

“……물론 이건 못난 오빠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요.”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그 남자의 허락이 필요하다니, 내키진 않지만 대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아리아의 얼굴이 침울했다.

심지어 의기소침해져서는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기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때였다.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아스킨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리아,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눈이 마주쳤건만 왜인지 저 남자 쪽에서 시선을 피했다.

피해? 피했다고? 쟤가 나를? 착각인가 싶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무엇보다 여긴 선대 공작 부인의 방인데, 저 남자가 어쩐 일인지 의문이었다.

물론 아들이 모친의 방에 오는 게 이상하진 않지만 왜인지 저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왔어? 그리고 사람이 손님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무엇보다 놀란 점은 아리아가 아스킨의 등장에 놀라기는커녕 태연하게 인사를 했는데, 어딘가 조금 뾰족한 태도였다는 점이었다.

“나보고는 그렇게 예의를 강조하더니, 오빠 갈수록 실망이야.”

……으응? 뭐지. 이 두 남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속으로 살짝 당황하며 남매를 번갈아 보았다.

한참 시선을 주고받던 남매 중 아스킨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타박하는 여동생의 말 때문인지 눈 밑을 살짝 붉히더니, 곧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이군.”

“별로 보고 싶은 얼굴도 아닐 텐데?”

“…….”

“어제 봤는데도 오랜만이라고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뭐 기분이 나쁘진 않네.”

말만 이러했을 뿐 내 목소리는 날카로운 듯 무관심했다.

내가 저 남자에 대한 걸 모두 체념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분노도 관심에서 비롯한 감정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저 어색한 인사에 핀잔을 주자, 이런 나를 보던 아리아의 눈에 어찌 된 영문인지 날 향한 존경심마저 보였다.

글자로 표현한다면 ‘언니 멋져요. 더 해요!’ 하는 듯한 표정이라 당황스러웠다.

……아리아?

“오늘도 아리아를 보러 온 건가? 그렇다면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 * *

아스킨은 샤를리즈를 향한 아리아의 눈빛에 놀란 나머지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얼른 떠나고 싶으면서도 좀 더 이 자리에 머물고 싶은 이 모순된 마음은 무엇인가 싶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잠깐만.”

아스킨이 돌아서는 순간, 샤를리즈가 그를 불렀다.

저도 모르게 얼른 다시 고개를 돌리니, 샤를리즈가 고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스킨은 이상함을 느꼈다.

무엇이 이상한가, 샤를리즈는 줄곧 저를 노려보거나, 삐딱하거나, 오만하거나 혹은 비웃거나.

넷 중 하나를 보이곤 했다.

그랬었는데 샤를리즈가 찌푸리는 모습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지다니.

그는 샤를리즈가 최근 들어 그를 향해 비웃음이 아닌 웃거나 난감해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는 걸 느닷없이 깨달았다.

모두 거짓이라 여겼건만, 지금 저 무관심한 표정을 본 순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도.

“그냥 무시할까 싶기는 했는데, 마지막에 찝찝함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샤를리즈는 뜻을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너한테도 볼일이 있어.”

“나한테? 무슨 일이지?”

샤를리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리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차일드 저택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그게 뭔지 궁금해졌거든.”

“그게 궁금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건가?”

아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오빠.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처음 봐.’

그도 그럴 것이 아스킨이 샤를리즈의 답변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려 하고 있었고, 그건 짜증이나 분노와는 다른 의미의 찡그림 같아 보였다.

“아니, 아리아를 보러 왔는데? 널 보니까 생각났을 뿐이야. 여전히 자의식이 엄청나네?”

샤를리즈가 픽 웃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 내가 만들어 준 자의식인가. 그 목소리는 잘 모르는 이가 들어도 느껴질 만큼 깊은 체념이 느껴졌다.

아스킨은 어째서 이런 목소리에 묘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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