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뭐 어쨌든 아리아 앞에선 하기 어려운 말이니? 자리를 옮겨야 하나?”
“언니, 안 돼요!”
아리아가 서둘러 샤를리즈에게 팔짱을 끼고는 제 오빠를 슬쩍 노려보았다.
“또 우리 오빠가 언니한테……!”
나쁜 말 할지도 몰라. 언니가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아리아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스킨이 빠르게 말을 건넸다.
“아니, 아리아 앞이라 오히려 잘 되었군. 내 여동생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것, 진심으로 감사하다.”
“……옷 사 준 걸 말하는 거야? 그건 이미 지난번에 감사 인사를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샤를리즈의 얼굴로 허, 하는 웃음이 스쳤다.
“정말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샤를리즈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니, 네 덕분에 아리아가 예전의 환한 미소를 되찾은 것 같다. 거기에 대한 감사 인사다. ……은혜는 꼭 보답하도록 하지.”
이번에도 아스킨이 내 여동생을 꼬셔서 제 환심을 사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면 더는 참지 않고 꿈속에서처럼 걷어차 줄 생각이었다.
물론 아리아 앞이었지만, 알 게 뭐람, 하고 성질을 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스킨은 샤를리즈를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샤를리즈 아니, 샤를리즈의 몸에 빙의한 윤지후는 ‘샤를리즈’가 아스킨에게 어떤 짓을 했었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깜짝 놀랐다.
저 인간의 답답하도록 고지식하고 곧은 성격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행동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이었다.
이를 아는 샤를리즈와 아리아 모두 놀란 눈을 했다.
‘왜, 지금 와서……!’
샤를리즈는 잠시 부아가 치미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픽 숨을 내쉬었다.
“은혜는 무슨. 방금 한 인사로 갚은 걸로 쳐.”
“언니, 무슨 말이에요?”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 샤를리즈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눈 토끼 같은 이 아가씨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소리를 슬쩍 높였다.
“이럴 때는 왕창 뜯어내야 해요!”
……샤를리즈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평소의 순진하고 무구한 이 아가씨가 할 말이 아닌데?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오빠를 대상으로?
그러나 아리아의 표정은 굳건했다.
“어릴 적부터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게 우리 가문 전통이에요, 언니. 여기서 언니가 이 저택이라도 달라고 한다면…… 오빠는 줘야 해요!”
“……난 이 저택이 필요 없어요, 아리아.”
“하지만…….”
아리아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다, 이내 시무룩하게 히잉 하고 소리를 냈다.
“아리아, 친구라고 해 놓고는 은혜니 뭐니 자꾸 따지면 나 불편해서 못 와요.”
“아앗, 그건 안 되죠. 그럼 언니!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줘요. 오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렇지, 오빠?”
아리아는 오빠를 불퉁하게 응시했다.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아니, 됐어.”
샤를리즈는 단호하게 말했다.
보답은 무슨.
샤를리즈는 냉소적이었다.
저리 말하면서도 어차피 속으로는 엮이고도 싶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할 거 아닌가?
참으로 놀랍게도 지긋지긋했다.
“받은 걸로 쳐.”
금품이 됐든 물건이 됐든 이미 샤를리즈는 알츠베이트라는 가문인 탓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가장 소중한 목숨이란 놈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뒤인데, 다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곧 파혼서에 도장 찍을 처지에 더 엮여서 뭐 해. 피차 불쾌하기만 하겠지.”
샤를리즈의 무심한 목소리에 남매는 동시에 놀랐다.
아리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는 샤를리즈 모습에 놀랐다면, 아스킨은 낯선 기분에 침음마저 꾹 참았다.
“…….”
샤를리즈는 아리아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아, 그녀의 긴장을 풀어 줄 겸 살짝 미소 지었다.
“저 남자에게 받는 건 됐고, 그래요, 꼭 받아야 한다면 아리아에게 받는 걸로 할게요.”
“……제게요?”
“네. 아리아와 저 사이의 일이잖아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아스킨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샤를리즈의 의사에 아리아는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보아하니 아리아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 오빠와 영 삐걱거리는 것 같은데, 자신까지 저 사이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난 요즘 집 안에만 있더니 영 좀이 쑤셔요.”
저 얼굴을 계속 보느니 내가 아리아랑 놀러나 한 번 더 가고 말지.
어차피 저 남자에게 받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던 샤를리즈는 아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언니, 혹시…… 동물원 가 보셨어요?”
동물원? 동물원 잘 알다마다.
근데 이곳에도 동물원이 있단 말인가? 샤를리즈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서둘러 진짜 ‘샤를리즈’의 기억을 뒤져 보았다. 정말 있었다.
심지어 이 수도의 명물 같은 장소였다.
‘허, 이 세계에도 동물원이 있구나…….’
빙의자인 윤지후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런데 여기서 동물원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동물원은 가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샤를리즈’는 동물원에 가 본 적 있다. 그곳에서 괴물 개 ‘테리’를 데려왔으니까.
그러나 현재 몸을 차지한 빙의자 윤지후는 가 본 적이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 거기 놀러 가요.”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네, 저도 한 번도 못 가 봤거든요. 언니도 안 가 보셨다니까 이번에 같이 가는 게 어때요?”
“그래요. 뭐. 가요. 친구가 가자는데 어딘들 못 가겠어.”
“오빠는 왜 대답이 없어?”
허? 샤를리즈는 살짝 당황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아스킨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가야 하는 건가? 난 오늘 바쁜…….”
“언니에겐 내가 직접 은혜를 갚기로 했지만, 어쨌거나 오빤 내 보호자로서 보답을 꼭 하고 싶었던 것 아니야?”
무구한 질문에 아스킨은 더욱 당황했다.
물론 아리아가 이곳에 가고 싶었단 사실은 그로서는 살짝 충격이었고 오빠로서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함도 들었다.
하지만 샤를리즈에게 보답하는 것과 동물원에 가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관계란 말인가?
“아리아, 그냥 우리끼리 가요. 가기 싫은 사람 데려가 봐야 피곤하기만 하죠, 뭐. 공작은 바쁘니 열심히 일이나 하세요.”
샤를리즈의 무심한 말이 이어졌다. 아스킨은 왜인지 반박하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은 오지 말라는 말에 반발을 느껴야만 하는가?
“오빠, 나는 이렇게 생각해. 지난번에 알츠베이트 가문에서 모든 걸 해 주셨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지면 안 되잖아. 이제 레무트에서 언니를 대접할 때도 됐잖아.”
“그럼 내가 부관들을 붙여 주지.”
샤를리즈는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아리아는 받은 것이 많아 미안한 한편 당장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돈도 재력도 없으니 제 오빠의 노동력이라도 착취하려는 건가 싶었다.
다음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오빠, 언니는 직접 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는데, 지금 오빠는 부관과 언니의 위치가 동등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게 바라는 게 뭔데?”
“오늘 다니면서 짐도 좀 들어 주고, 아 오빠 혹시 마차도 몰 줄 알아?”
“뭐?”
“왜? 오빤 기사고 말도 잘 탈 거니까. 그리고 마차는 말이 끄는 거니까?”
아리아가 방긋 웃었다.
“아, 오빠는 함께 다니되 입은 열지 않아도 괜찮아.”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리아의 말을 해석했다.
‘와, 이거 재밌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거 아스킨한테 다니면서 발닦개나 하라는 소리잖아?’
샤를리즈는 나서려다가 아리아가 눈짓으로 자신이 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기에 멈칫했다.
이 상황이 재밌어진 샤를리즈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믿었던 여동생에게 배신당한 듯한 저 표정이 조금 통쾌했던 까닭이다.
물론 정말로 함께 가려고 든다면 샤를리즈는 단칼에 끊어 낼 생각이었다.
‘내가 왜?’
끝난 사이다. 저쪽이 아주 박살을 내주었지.
뭐 하러 저 불편한 인간이랑 함께한단 말인가?
이미 미련은 거둬들인 지 오래였다.
한편으로 눈앞에서 이 몸에서 눈을 뜬 뒤로 가장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그 아스킨이 쩔쩔매는 모습이 꽤 우습기도 한 탓이었다.
하기야, 그 고고한 공작 나리께서도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 앞에서는 한낱 맘 약한 오빠셨지.
샤를리즈에게도 오빠란 놈은 있었지만 윤지후일 때 오빠인 ‘윤지훈’도 지금 샤를리즈의 오빠인 록시디언도 아스킨만 한 오빠는 아니었다.
솔직히 그녀 같은 남매가 많으면 많았지 이런 애틋한 사이가 드물 것이다.
부럽지는 않았지만 새삼스럽게 샤를리즈는 자신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거나 가족이 없음을 자각했다.
동시에 결심했다.
하하하하. 어차피 뒈지겠다, 이런 또라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내가 더 또라이가 되리라.
왜? 어차피 곧 죽을 거.
“그래서 같이 가자는 소리더냐.”
아스킨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막 긍정하려는 순간이었다.
샤를리즈가 생각에 잠긴 사이 아스킨은 아리아의 말들에 꼼짝없이 져 주는 느낌이었다.
달갑게 구경하던 샤를리즈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됐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대체 내가 왜 같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만은 같이 가지. 대신 알츠베이트 공녀도 내가 가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어머나. 참으로 놀랍게도 저 남자는 자신의 동행이 샤를리즈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 놀랍게도 말이다.
샤를리즈는 입매를 예쁘게 비틀었다.
“됐어. 가기 싫은데 오긴 왜 오니?”
예쁜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도 너 싫어.